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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2월04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05일 13시07분

작성자

  • 나은영
  • 서강대학교 지식융합미디어대학 교수, 사회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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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혐오’라는 강한 표현을 너무나 가볍게 쓰는 경향이 있다. 언론에 등장하는 ‘혐오’라는 감정단어 앞에 붙는 범주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노인, 외국인, 난민, 이슬람, 장애인, 남성, 여성, 전라도, 성소수자 등, ‘범주’를 나타내는 명사 뒤에 왜 이렇게 강한 부정적 감정을 담고 있는 ‘혐오’라는 단어를 붙여 남발하는 것일까. 실제로 이렇게 혐오의 감정이 강한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는 조금씩 다른 불편한 감정을 동일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일까.

 

□ 불편한 감정을 모두 ‘혐오’로 표현해서야

 

혐오(disgust)란 원래 찰스 다윈이 이야기했듯이 “실제로 지각하거나 생생하게 상상할 때 주로 미각과 관련하여 거부감이 드는 것, 그 다음으로는 후각, 촉각, 심지어 시각을 통해 이와 유사한 느낌을 유발하는 것”을 말한다. '역겨움’과 유사한 생리적 거부감을 뜻하다가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어 온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세대를 대하거나 서로 다른 성별을 대할 때, 또는 서로 다른 인종을 대하거나 서로 다른 출신 지역을 대할 때 경험하는 느낌이 과연 이러한 역겨움에 가까운 혐오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조금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어느정도 불편함을 느낀다. 물론 그 불편함의 정도가 클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때 감정의 ‘강도’에 따른 적절한 용어와 감정의 ‘종류’에 따른 적절한 용어가 다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혐오와 비교적 유사한 종류의 감정은 ‘미움(hatred)’ 또는 ‘적대감(hostility)’이다. 그런데 ‘Hate Speech’를 ‘혐오 표현’ 또는 ‘혐오 발언’으로 번역함으로써 ‘미움’과 ‘혐오’를 거의 동급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말의 어감은 전자보다 후자가 더 강하다. 물론 ‘강도’의 측면에서 보면 ‘미움’보다 ‘증오’가 더 강한 표현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수용’보다는 ‘거부’ 쪽의 감정이라는 점이 공통적이지만, 이 단어들이 사용되는 상황들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A가 B를 사랑하는데 B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A는 이로 인해 B를 미워할 수는 있지만 혐오하거나 적대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군가 내가 중요시하는 목표를 방해하거나 나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면 적대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혐오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인간 세상에는 유사해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감정들이 매우 다양하게 분포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범주의 대상들에 대해 느끼는 다소 불편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구분하지 않고, 또한 그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분석해 보지도 않고 모두 ‘혐오’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하고 나면, 이미 그 감정은 ‘혐오’라는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부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게 된다. 즉, 어떤 감정의 원인이나 상태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혐오’라고 명명해 버리면, ‘혐오’와 더 어울리는 상태로 감정이 조정되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 감정 입자도가 높은 세심한 감정 표현의 필요성

감정은 외부 자극에 의해 누구에게나 똑같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그때까지 어떤 경험을 해 왔으며 특정 상황에 대한 감정 표현을 주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해 왔는지에 따라 그것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결과로 구성된다. 아주 어린 시절에 예컨대 어린 아이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어머니가 “우리 ○○이 화났어?”라고 물어 보면 그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화난 것인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감정 구성의 개념을 학습한다.

 

비교적 최근에 리사 펠드먼 배럿(Barrett, 2017)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에서 ‘감정 입자도’에 관해 언급하였다. 이 책에 따르면, 감정 입자도가 매우 높은 사람은 “분노, 슬픔, 공포, 행복, 놀라움, 죄책감, 경탄, 수치심, 동정심, 혐오, 경외감, 흥분, 자부심, 당혹감, 감사, 경멸, 갈망, 기쁨, 활기, 사랑” 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또한 “성가심, 짜증, 좌절감, 적대감, 격분, 불만”과 같은 서로 관련된 단어들에 대해서도 잘 구분되는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감정 입자도가 낮은 사람은 이 중 몇 개의 감정 개념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몇 개의 용어만으로 그와 유사한 감정들을 뭉뚱그려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에 따라서도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에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분노’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는 것이 러시아어에서는 ‘사람에 대한 분노’는 세르디치아(serdit'sia), ‘정치 상황과 같은 추상적인 이유의 분노’는 ‘즐리치아(zlit'sia)’로 구분된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어는 ‘사소한 위반’에 대한 죄책감과 ‘심각한 범칙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서로 다른 단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감정들을 동일한 용어로 표현하고 나면 그 감정들 사이의 세밀한 구분이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세대, 성별, 지역, 계층 등 범주 간 모든 갈등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을 ‘○○혐오’라는 용어로 규정지어 버리면, 굳이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혐오 주변을 맴돌게 된다.

 

□ 감정도 우리가 구성해 가는 사회적 실재

우리는 후세에 어떤 감정을 물려주고 싶은가? 문명은 ‘공유’에서 출발하며, 공유에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것은 ‘언어’이다. 감정도 예외가 아니다. 혐오와 적대감은 또 다른 혐오와 적대감을 거울처럼 재생산할 뿐이다. 우리의 후손이 ‘자신과 다른 범주’의 모든 사람들을 혐오의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혐오’라는 용어의 사용 범위를 최소화하고, 각각의 불편한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평등이나 불공정의 해결, 개성과 다름의 존중, 함께 가는 사회의 아름다움 등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뇌는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 미래의 사건들을 해석하고 느끼기 때문에, 과거에 학대 받아 부정적 정서를 많이 경험했던 사람은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옮긴 후에도 이 세상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가정 하에 세상의 정보를 해석하고 느낀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 나아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 개념 체계를 재구성해 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포용적 분위기는 구성원의 감정 체계 구성에 매우 큰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후손에게 분노와 증오로 가득찬 감정 세계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주의를 돌려 그것을 하나하나 해결해 가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감정 입자도 높은 표현을 통해 모든 부정적 감정을 ‘단 하나의 매우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하기보다는, 좀 더 세심한 배려로 ‘긍정적인 인간 중심의’ 다양한 단어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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