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가 저멀리 느껴지는 까닭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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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는 산고의 고통
박근혜 대통령이 내건 창조경제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한데 창조경제를 이루려면 상상이상의 각오가 요구됩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낸다 함은, 때로는 뼈를 깍는 산고의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창조가 쉽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엄청난 천재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같은 보통사람은 이 글 하나를 쓰는데도 참으로 처절하게 씁니다. 괜찮겠다 싶었던 내용들을 썼다가는 지우고, 어휘∙자구를 택해 다시 채워넣고 사실확인도 하고 볼륨이나 운율을 맞추다 보면 며칠이 걸립니다. 무엇보다도, 내용이 와 닿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으면 탈고를 하지 못하고 괴로워 합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孫正義) 사장이 ‘손자(孫子)병법’에 자신의 말을 더하여 만든 「손(孫)의 제곱 병법」이라는 경영지침서가 있습니다. 5X5의 25글자로 만들어진 글자틀 속에는, 경영비전 제시의 하나로, ‘약(略: 덜어내다)’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사업을 이루어갈 때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하고 생각하여 군더더기는 잘라내고 곁가지도 쳐내 마지막 남는 그 하나가 ‘약(略)’의 정수(精髓)가 됩니다. 마침내 도달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가 당연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당사자한테는 흔들림없는 믿음으로 자리잡습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덜어내고 덜어내어 남는 핵심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일입니다.
보통사람들이 접하는 창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의 창조입니다. 이를 ‘비약창조’라 이름하겠습니다. 끼있는 사람이나 엉뚱한 사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는 입장은 비약창조를 강조한다 하겠습니다. 열띤 토론(brain storming)으로 이것저것 선보이고 이리저리 융합하다 보니, ‘어! 괜찮네’하는 돌연변이가 횡재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럴려면 권위가 배제되고 누구라도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어야 하니, ‘비약창조’는 횡적 성격이 강합니다. 미국에서 잘 나오는 창조라고 하겠지요.
다른 하나의 창조는 지금까지 해나온 것의 연장선상에서 조금씩 개량해 가는 창조입니다. 전보다는 좀 더 나은 것을 찾아내 하나 둘씩 편리함 쪽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입니다. 그 전과 같은 것은 아니고 약간 더하거나 바꾸어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개량창조’라 이름하겠습니다. 일본은 개량창조에 뛰어납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목숨걸고 사는 일소현명(一所懸命)을 중시해 온 나라인지라, 싫으나 좋으나 오물쪼물 고쳐가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토요타의 ‘가이젠(改善)’ 방식은 바로 개량창조의 대표입니다. 개량창조는 위에서 정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 종적사회에 맞는 창조입니다.
우리는 어떤 창조?
우리나라에는 끼가 있거나 엉뚱한 사람도 많으니 ‘비약창조’에 기대를 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한편, 겉치레한 위세나 권위로 위에서 찍어 누르거나, 아래서 알아서 기는 비굴한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비약창조’를 가로 막는 때도 즐비합니다. ‘개량창조’ 또한 딱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것 따라하기를 죽도록 꺼려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비약창조’도 ‘개량창조’도 아니고, 이 둘을 섞어 놓은 ‘비빔밥 창조’입니다. 비빔밥은 잘 비벼지면 맛깔나지만 잘못 비벼지면 이 맛도 저 맛도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무늬만 창조’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관계부처가 합동하여 펴낸 『창조경제 실현방안』에는 창조경제를, ‘국민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에 접목하여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하고, 기존산업을 강화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새로운 경제전략’이라 하고 있습니다. 즉, 정부가 그리는 창조경제 생태계는, [개인•기업•정부]→(과학기술, ICT 접목)→[창의적 자산]→(창업•융합)→[새시장창출•기존시장강화]→(공정한 경쟁•세계화)→[좋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연쇄를 갖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공무원이 가장 조심하여야 하는 것은, 탁상 위에서 작성한 보고서와 실제 생태계는 너무도 다르다는 점입니다. 위 창조경제 생태계는 새시장 창출의 ‘비약창조’가 될 수도 있고 기존시장 강화의 ‘개량창조’도 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엉거주춤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큰 애는 일본의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직장을 다닙니다. 작은 애는 한국으로 대학을 보내 이번에 졸업반이었는데 취업에 실패했습니다. 애비 탓에 일본, 미국, 한국을 경험하고 한국에서 취업을 해보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제 눈의 안경이라고 제가 보기엔 나름대로 착하게 열심히 살아왔고, 성격도 승무원 자존심을 짓밟던 조현아 전 부사장보다는 나은 듯한데 말입니다. 딸아이 능력이 부족하여 그랬겠지만 한국에선 취업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 창조경제 생태계의 종착역이 ‘좋은 일자리 창출’인데, 젊은이들이 비집고 들어가기에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부엽초(浮葉草)! 뜬풀. 우리 청년들의 마음이 지금 부엽초 같지는 않을까요? ‘여기에다 뿌리를 내려봐’ 할 수 있는 중심잡힌 어른들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떠다니는 청년들이 뿌리내릴 토양 만들기가 먼저여야 할 것입니다. 토양이 힘을 가지려면 비도 오고 눈도 오고 흙덩이가 질척해지며 박테리아가 분해되고 하는 긴 시간을 요합니다. 과연 우리 사회가 그걸 참을 수 있는 쪽으로 가고 있을까요? 비료만 많이 주어 속성재배를 하고 얼른 팔아 이익을 남기려는 쪽으로 가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지력(地力)이 약해지고 있다는 느낌은 저만의 기우이길 바래봅니다.
저의 조그만 꿈
한국이 ‘소모형 사회’ 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도 소모품. 살던 터전도 소모품…. 소모품의 특징은 한번 쓰고 나면 없어진다는 것인데, 존엄한 인간, 안온한 터전마저 소모품이 된다면 기댈 곳이 없어집니다. 쓸쓸하고 씁쓸해집니다. 저의 조그만 꿈이 있다면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하는 ‘빈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드리이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70년대 가요 ‘빈의자’ 가사)”
과연 저에게 뭇 사람들이 마음 턱놓고 쉴 수 있는 포근함과 포용력이 있는지? 반성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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