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달리, 원종국(1)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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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세느강 좌안에 위치한 오르세 미술관은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볼거리가 넉넉하다. 1900년 세계만국박람회를 기념해서 지은 이 건물은 기차역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대에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 거대하면서도 품격 있는 아치형 중앙 홀부터 그 흡인력이 압도적이다. 빨려들 듯 오르세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내로라할 인상파 화가들의 컬렉션 속으로 환각처럼 입사한다. 인상적인 흡인력 앞에서 우리는 시나브로 전율한다. 모네의 「점심 식사」,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 「화가의 아틀리에」, 그리고 밀레의 「만종」, 「이삭줍는 여인들」, 「봄」 등 미술사를 수놓은 걸작들과 일목요연하게 소통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 중에서도 밀레의 「만종」(1859년 작) 앞에서 우리네 발길이 오래 머무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돌이켜 보면 난 어릴 적 고향의 이발소 그림으로 「만종」을 처음 보았다. 푸시킨의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시구와 더불어 밀레의 그림도 유행했던 때였던가 보다. 석양 무렵 멀리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자 밭에서 일하던 부부가 잠시 일손을 멈춘 채 삼종기도를 올리는 모습. 참으로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감사의 기운이 느껴지고 평화로운 느낌이 전해지던 그림이었다. 빛바랜 사진으로 본 것이어서 아슴아슴 더 아련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밀레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아주 어렸을 적의 희미한 풍경이다. 헐벗은 나목(裸木) 아래 아이 업은 여인의 풍경을 즐겨 그렸던 박수근이 어릴 적 이 그림을 보고,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무렵이었다. 또 빈센트 반 고흐가 “이것은 시(詩)”라며 밀레를 가장 위대한 화가로 칭송했다는 일화도 들어본 적이 없는 때였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다시 「만종」을 접했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오르세에서 진품 앞에 섰을 때, 벅찬 전율이 복합적으로 다가왔다. 2008년 7월이었다. 어렸을 적 복제본 사진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던 겹겹의 환영들이 일렁거렸다. 평화를 간구하는 아우라가 스미다가 원인 모를 결핍과 연루된 불안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어떤 불안을 덜기 위해 저토록 간절히 기도하는가. 두 부부의 등 뒤에서 저물어가는 노을은 정녕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그렇다면 어릴 적 이발소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안기는 과연 어디서 연원한 것이었을까. 이런저런 불안 담론에 관심을 쏟던 무렵이었기 때문에 나 자신의 실존적 관심의 발원일 수도 있었으리라. 혹은 「만종」과 관련한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불안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나보다 훨씬 이전에 이 그림 앞에서 엄청난 불안기를 느끼며 「만종」의 심연에서 그 불안의 근원을 찾으려던 불세출의 화가가 있었다. 다름 아닌 스페인 출신의 천재적인 화가 살바도로 달리. 「만종」에서 평화를 호흡했던 어렸을 적의 나와는 달리 어찌하여 달리는 불안을 느꼈을까. 천재 화가다운 직관이었을까. <밀레의 만종과 비극적 신화>에서 달리는 1932년 6월 밀레의 「만종」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고 밝히고 있거니와, 그가 거기서 비극적 불안기를 느꼈던 것은 여인의 뒤쪽 수레 안이나 두 사람 앞에 놓인 감자 바구니 속 어딘가에 아이의 시신이 있을 것만 같은 환각을 무의식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제를 「삼종기도」라 했던 밀레는, 생전에 만종이 울리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가엾게 죽어간 이들을 위한 삼종기도를 경건하게 올리게 하셨던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적어도 이 그림의 표층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의 간절한 애도를 읽어낼 표지는 그다지 넉넉한 편이 아니다. 그러나 달리의 환각처럼 훗날 X선 투시를 통해 감자 바구니 심연에 관처럼 보이는 상자가 그려졌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그 상자를 꼭 아이의 관으로 볼 근거가 희박하다는 논란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논란이 거듭 된 데는 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난한 시골 농부 부부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게 된다. 그러자 부부는 죽어서라도 감자가 나오는 밭에서 잘 먹으라고 감자밭에 묻어주기로 하고 가서 매장하기 전에 아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린다. 이런 얘기를 들은 밀레가 그림으로 재현했는데, 그것을 본 친구는 너무 침울하다는 반응이었다. 이에 밀레는 관 위에 덧칠하여 감자 바구니로 바꾸었다는 얘기다. 물론 적층이 두터울 수 있는 유화의 특성상 그 텍스트의 심연을 다 헤아리기 어려운 사정에서, 주변의 이런저런 설로 확정적인 진실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감자 바구니의 심연에 죽은 아이의 관이 그려졌었다는 이야기는 내게 오래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오르세에서 처음으로 진품 「만종」을 볼 때, 그 이야기의 영향으로 불안기를 느꼈거나, 혹은 그 이야기에 영향을 받을 것만 같은 불안 때문에 또 다른 불안에 시달렸을 지도 모르겠다.
반 고흐나 박수근도 그랬지만, 「만종」의 화가 밀레에 대한 달리의 오마주는 대단한 것이었다. 「달리의 만종」, 「건축적인 달리의 만종」 「갈라와 밀레의 만종」을 비롯한 여러 변주를 창작하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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