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7 : 광개토대왕과 후연(14)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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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79) 불안한 승계와 후단후의 자결(AD396)
태자 모용보는 처음에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공손하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으나 황태자가 되고 부터는 게으르고 교만하며 주변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후단후는 그것이 걱정되어서 모용수가 살아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 태자가 승평의 시절을 만난다면 훌륭한 수성의 군주가 되겠지만
지금과 같은 혼란한 시절이라면
세상을 구제할 인물이 되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
요서왕(모용농)과 고양왕(모용륭)은 모두
폐하의 훌륭한 아들이시니
그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대업을 넘겨주셔야 합니다.
조왕 모용린은 간사하고 속이며 너무나 강퍅합니다.
일찍이 그를 제거하심이 옳습니다.”
모용보는 여러 주변 사람들을 잘 대접하므로 모용수는 그런 태자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 당신이 나를 진나라 헌공으로 만들 셈이요?”
진 헌공이란 춘추시대 진나라 주군으로 애첩 여비의 거짓말을 듣고 태자 신생을 핍박하여 결국 자살하게 한 사람이다.
후단후는 자신의 충심을 몰라주는 모용수를 야속해하면서 울며 뛰쳐나가서 자신의 동생인 범양왕 모용덕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 태자가 덕과 재능이 없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다.
내가 사직을 위해 충언을 했건만
주상께서는 나를 여희에 비유하시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태자는 반드시 사직을 잃을 것이다.
범양왕은 덕과 재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
사직의 존망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범양왕의 판단에 달려 있을 것이다.”
모용보와 모용린이 그 소식을 듣고 섭섭하고 한탄스럽게 생각했다. 모용보는 황위에 오른 보름 뒤 모용린을 후단후에게 보냈다.
“ 후께서는 일찍이 주상이 대업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시다면 일찍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셔서 단씨 종족을 보존하십시오.”
자결을 택하라는 말이었다. 후단후가 소리쳤다.
“ 너희 형제가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고
에미를 압박하여 죽이려 드는데
어떻게 대업을 지킬 수가 있겠느냐!
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느냐?
다만 나라가 오래지 않아서 망할 것이
억울해서 그런 것이다.! ”
후단후는 마침내 자결했다.
후연의 청하공 모용회는 희첩 단씨의 소생으로 어머니는 미천하였지만 용맹하고 사내답고 뛰어나서 모용수가 죽기 전에 몹시 총애하였다. 그런 까닭에 북위를 정벌하는 동안 모용회에게 동궁의 업무를 맡도록 했고 태자와 똑같이 대우하도록 했다. 모용보가 패하고 나서 직접 북위르 정벌할 때에는 모용회에게 용성에 진수하여 동북면을 방어하도록 했는데 모용회가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다스리면서 훌륭하게 행정을 펼쳐 보였다. 그런 솜씨를 지켜 본 모용수는 병이 위독해지자 유언으로 모용회를 모용보의 후사, 즉 태자로 삼을 것을 모용보에게 종용했다.
그러나 모용보는 모용회보다는 복양공 모용책을 더 사랑했으므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모용보의 다른 아들인 장락공 모용성이 자신이 나이가 같은 배다른 동생 모용회의 아래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따라서 삼촌 모용린과 함께 아버지 모용보에게 강력하게 11살 짜리 모용책을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모용책을 태자로 책봉했다. 모용성과 모용회 모두 왕으로 승격하였지만 이 일로 모용회는 마음이 크게 상하여 원한을 품었다.
9월에 장무왕 모용주(모용황의 아들, 모용수의 동생)가 모용수 자결한 후단씨를 받들어 용성에서 장사를 치렀다. 모용보는 조서를 내려서 그 지역에 있는 모용륭과 모용회의 가속 및 보좌관등 모두를 중산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용회는 조서를 어기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모용회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80) 북위의 후연 정벌 : 병주 장악 (AD396년 9월)
후연의 북벌군이 내부 사정으로 퇴각하자 북위 탁발규의 신하들은 존호를 사용하기를 권고하고 나섰다. 그리고 후연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서둘러 남쪽(후연)을 정벌하자고 졸랐다. 탁발규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보,기병 40만을 모아서 마읍(산서성 삭주)을 나와 남쪽으로 향했다. 깃발을 든 사람이 2천 여리에 걸쳐있다고 했을 정도로 대군이었다. 대군의 최선봉에는 좌장군 이율이 5만 기병을 이끌고 나아갔고 장군 봉진은 동도로 군도(북경 창평현)를 나와 후연의 유주(북경지역)를 습격하였다
9월 18일 북위의 군대가 양곡(산서성 양곡)에 도달했고 이어서 남쪽 진양(태원)까지 진출했다. 요서왕 모용농이 나와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모용농이 패전군을 이끌고 진양으로 돌아왔으나 사마 모여숭이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모용농은 동쪽으로 퇴각하여 도주의길에 올랐다. 모용농의 처자들은 쫓아오다가 모두 북위군사들에게 잡혔다. 모용농도 부상을 당한 채 기병 세 명과 함께 겨우 중산으로 도망 나왔다. 이로써 후연의 병주는 완전히 북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81) 후연의 북위침략 대책회의(AD396)
북위군이 남쪽으로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후연 주군 모용보는 막료들을 모아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중산윤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북위의 군마는 너무 많고 강합니다.
천리까지 달려와서 싸우는데다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으니 날카로워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험난한 곳을 막아 방어하는 것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중서령 휴수는 이렇게 말했다.
“ 저들은 기병 위주입니다.
그러니 천호당 1보로 삼아서
도랑을 깊게 파고 들판을 쓸어버려 군마가 먹을 것이 없게하면
60일 이내에 돌아갈 것입니다.”
상서 봉의는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북위 군사는 수십만 대군으로 천하의 강적입니다.
백성들이 보루를 쌓는다고 해봐야 수비가 안됩니다.
저들에게 곡식과 병사를 보태는 꼴이 되고 맙니다.
차라리 험난한 요새를 틀어막고 방어에 몰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왕 모용린은 이런 계책을 내 놓았다.
“ 북위는 승기를 타고 있어서 날카롭기 그지없습니다.
당연히 중산을 완벽하게 지켜서 그들이 피폐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기회를 타는 것이 좋습니다.”
모용보는 모용린의 전략을 택했다. 중산성을 다시 수리하고 식량을 쌓아서 장기전을 대비했다. 요서왕 모용농에게 명하여 나가서 안희(하북성 정주시 동쪽 15KM)에 주둔하도록 하여 중산의 배후를 튼튼하게 하였다.
(82) 북위의 동진정책과 쫒기는 후연(AD396)
탁발규가 우율제와 공손란에게 보기병 2만 군사를 주어 옛 날 전한 시절 한신이 조나라를 공략할 때 갔던 그 길로 후연의 중산을 공격했다. 그 길은 태행산맥의 끝자락 정형(하북성 정형)을 너머서 석가장에서 남쪽으로 꺾어서 업(한단)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다. 후연은 중산으로 접근하는 길을 막기보다는 중산을 지키기로 했으니 방어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탁발규가 상산(하북성 정정)을 접수한 뒤 주변의 후연 도읍들은 도망가거나 항복하거나 하는 바람에 후연의 성읍은 중산, 업 및 신도(하북성 冀현) 세 성 밖에 없게 되었다.
11월 탁발규는 탁발의에게 명령하여 5만 군사로 업을 공격하도록 했고 왕건과 이율에게는 그 남쪽 신도를 공격하도록 했다. 탁발규와 주력 부대는 중산성을 공격했는데 고양왕 모용륭이 외성곽을 훌륭히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탁발규가 중산의 수비가 견고한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 중산성은 견고하므로 모용보가 나와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급하게 공격하면 병사들이 많이 다칠 것이고
오래 포위하면 식량을 소비할 것이다.
먼저 업과 신도를 빼앗은 다음에 중산을 도모하자.”
탁발규는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장무공 모용주는 북위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쏜살같이 용성에서 계로 돌아와 양성왕 모용란과 함께 용성을 굳게 지켰다.
탁발규는 노구에서 진을 쳤다. 그 주변 박릉태수 신영은 하남(낙양)으로 도망가고 고양(박야)태수 최굉은 바닷가로 도망갔다. 탁발규는 평소 최굉의 이름을 듣고 있었으므로 추격하여 붙잡아 황문시랑으로 삼고 또한 장곤과 함께 국가 중대업무를 맡겼다. 업성을 지키고 있던 후연 범양왕 모용덕이 모용청 등을 시켜서 업성을 나가 북위군을 습격하도록 하니 북위군이 위세에 밀려 신성(하북 비향)으로 퇴각하여 주둔했다. 승리에 도취된 모용청이 북위를 추격하고자 하자 별가 한탁이 이렇게 말렸다.
“ 옛 사람들은 먼저 계획한 다음에 싸웠습니다.
북위군에게는 추격할 수 없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현군과 멀리서 원정 온 군대는 들판에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가 쫓아가다보면 군대가 몰려 있게 되어 반격에 취약한 것이고,
셋째가, 선봉이 패배하면 후봉은 매우 예리하게 갖추는 것이라 어렵고,
넷째가, 저들의 수는 많고 우리 숫자는 매우 적습니다.
관군이 의당 움직이면 안 되는 이유가 셋입니다.
스스로 걸어 들어가서 적의 지역에서 싸우는 것이 첫째요,
움직였다가 뜻대로 되지 못하면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둘째요,
우리 성과해자가 아직 충분히 수리되지 못했으니
나아가서 싸울 겨를이 없는 것이 셋 째 이유입니다.”
모용덕이 한탁의 말을 기특이 여기고 그대로 좇았다. 12월에 하눌의 동생 하뢰노가 2만 기병을 끌고 와서 탁발의와 함께 모용덕이 지키고 있는 업을 공격했다. 하뢰노는 하눌처럼 탁발규의 외삼촌이다. 다급해진 모용덕은 후진 요흥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83) 후연 모용덕의 북위 정건과의 내통(AD397)
하뢰노는 탁발규의 외숙이니 탁발규의 사촌동생 동평공 탁발의 따위의 명령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는 치명적인 갈등이 생겨났다. 탁발의의 사마 정건이라는 사람이 은밀히 모용덕과 내통하고 있었는데 모용덕과 함께 모용의와 하뢰노의 이간질을 계획했다.
정월 6일 바람이 많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 날 낮이 캄캄해지고 어두워졌을 때 하뢰노 군영에서 불이 났다. 정건이 탁발의에게 발했다.
“ 하뢰노가 불을 일부러 지른 것은 무언가 변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탁발의도 그렇게 여기고 군사를 모아 물러나기로 했다. 하뢰노도 탁발의가 군사를 되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뒤로 물렸다. 그 사이에 정건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모용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말았다. 정건이 탁발의의 군대가 노쇠하여 전투력이 약하다고 말하므로 모용덕은 군사를 이끌고 탁발의를 쫓아가 섬멸해버리고 말았다.
모용덕이 업 주변에서 승전하는 동안에 모용보는 모여등을 보내 빼앗긴 박릉을 탈환하고 지키고 있던 왕건을 잡아 죽였다. 북위가 60여 일 동안 신도를 공격했지만 쓰러뜨릴 수 가 없었고 탁발규가 몸소 대군을 몰고 오자 지키고 있던 의도왕 모용봉이 성을 타넘고 내려가 중산으로 도망가 버렸다. 25일 신도는 함락되어 북위에게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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