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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문화시평 <37> 지폐의 인물과 국가 이미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4년07월22일 17시12분
  • 최종수정 2024년07월22일 18시41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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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대부분의 국가는 화폐에 자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초상을 활용한다. 여기엔 예외 없이 정치, 사회, 문화, 과학 등 분야의 상징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달러에는 워싱턴과 링컨,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프랑화에는 마리 퀴리, 에펠, 생텍쥐페리, 마르크화에는 가우스, 그림 형제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인물 결정 과정은 그리 쉽지 않다. 복잡한 국민의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유로화의 경우, 특정 인물 대신 시대를 대표하는 ‘다리’와 ‘문’과 ‘창’이라는 건축물을 반영했다. 특정 국가의 인물을 반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폐가 가진 권위와 상징, 통합이란 특수한 의미까지 담아내기 위해 무려 6년간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도안에 공모전을 거쳤다 한다. 이처럼 화폐의 인물이나 도상을 결정하는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과 철학을 드러내며, 국민의 정서뿐만 아니라 국가의 이념과 역량을 모으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근 일본 엔화의 인물들이 20년 만에 전면 교체되었다. 가장 고가인 1만 엔을 장식한 인물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 5천 엔은 근대 일본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쓰다 우메코(津田 梅子), 그리고 천 엔은 일본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 柴三郎)로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메이지 시대의 인물들로 경제인, 교육자, 과학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1만 엔의 시부사와 에이이치이다. 시부사와는 다이이치 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 도쿄증권거래소 등을 설립한 대표적인 자본가이면서도 일본 경제의 설계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1867 파리만국박람회 참석했고, 이를 계기로 1871년 대장성 차관에 발탁되었다가 19세기 말부터 은행, 주식회사, 증권거래소를 도입하고 500여 기업을 설립했다. 

 

한국에서 그는 ‘조선 경제의 침탈자’로 불리기도 한다. 대한제국 시절, 경인 철도 합자회사와 경부철도 주식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경인선과 경부선 부설권을 인수하여 부설했고, 경성전기(한국전력공사의 전신) 사장을 맡았었다. 특히 대한제국이 외국 돈 유통을 금지한 방침을 스스로 뒤집고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일본 제일은행 지폐 1원, 5원, 10원권을 유통시킨 것도 그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경영학의 비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그에게서 경영의 본질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생전 500개 기업을 설립하고 경영하면서도 단 하나의 기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후임도 후손이 아닌 적임자를 찾아 맡겼고, 번 돈은 그가 세운 기업보다 많은 600여 개의 사회 공헌 단체를 세우거나 돕는 데 거의 썼다.

 

 우리 지폐의 경우, 신사임당,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등의 인물을 활용하고 있다. 모두 국가를 대표하는 위인들이다. 하지만 일본이 메이지 시대의 근대적 인물들을 선정한 데 반해 우리는 모두 조선시대 인물들이며, 주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황이나 율곡 이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이기론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또한 율곡과 신사임당은 모자 관계로, 역시 깊은 유교적 세계관에 묶여있는 인물들로 선택의 폭이 너무 좁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가진다. 

 

특히 2009년 발행되어 대중화한 5만 원권에는 우리나라 여성의 대표적 인물인 신사임당이 그려져 있다. 그동안 세종대왕, 이순신 등 남성 위인들로만 채워졌던 한국 화폐에 최초의 여성 위인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행 화폐 도안자문위원회에서는 인물 후보로 20명을 선발한 후 성인 남녀 1,000명과 각계 전문가 15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거쳐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했다. 발행이 보류된 10만 원권 후보엔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일찌감치 낙점됐지만, 5만 원권 후보였던 신사임당과 장영실이 끝까지 각축을 벌였다. 

 

결국 한국은행은 한국 사회의 양성평등 의식을 제고하고, 여성의 사회 참여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한다는 취지로 신사임당을 최종 선정했다. 물론 그녀는 초충도(草蟲圖)에 뛰어난 여류화가로서의 의미도 가지지만,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와 가정교육의 가치 등이 고려된 것으로 안다. 애초 계획했던 10만 원권은 국가의 경제 여건과 범죄 악용 소지 등의 우려와 함께 발권을 무기한 연기한 상태이다. 이 과정에서 10만 원권 후면에 담길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문제도 제기되었다. 발권이 연기된 김구를 제외하면, 우리의 근대화를 저해했던 주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주자 성리학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인 셈이다. 물론, 성리학을 우리 시대의 가치로 새롭게 재해석하는 입장도 없지 않으나, 이 인물들은 현재의 일반적인 사회 인식이나 가치관과는 거리가 있는 세계의 표출임은 확실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는 현재의 국가적 차원의 인물들도 아닌 점은 타국의 사례에 비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국가마다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의 결정은 국가의 정치·사회·문화적 가치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이다. 특히나 국력이 강해질수록 그 이미지는 더욱 더 국가의 상징성으로 중요해진다. 후발 국가의 경우, 정치지도자나 애국심을 강조하는 인물들이 전면에 부각되지만, 선진국의 경우, 좀 더 다양한 가치가 제시된다. 우리는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인물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좀 더 시대나 분야의 범위를 넓히거나 국제적 인지도를 가진 인물들을 찾는 것도 국가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의 경우, 근현대사에 대한 깊은 이념적 견해차로 사회적 의견수렴이 쉽지 않은 면이 있어 화폐의 인물들이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마치 한국이 과거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새로운 근현대적 인물을 찾는 일은 다소 어려운 과제임이 틀림없다. 인물을 찾다 보면 친일, 공산주의, 독재 등 우리 근 현대사의 질곡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라고 이런 복잡한 내용이 없을까? 때에 따라서는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나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 간엔 인물들을 둘러싼 좋고 나쁨이 명확히 갈리기도 한다. 또 이런 인물들을 선택한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비판하며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의 지폐는 내국인들의 정서를 통합하고 자긍심을 가지게 하며, 국가의 대외적 위상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교하고 치밀한 자국의 정치,외교적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경직되지 않게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되게 국가의 위상과 품격을 홍보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폐에도 언젠가 좀 더 자유롭게 우리 시대의 정서에 맞는 인물을 선정할 날이 온다면 어떤 인물들이 좋을까? 지난 토요일(7월 20일)이 생일을 맞았던 백남준 같은 인물은 어떨까? 비디오 아트로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의 정신세계를 전 세계에 알린 우리 문화와 예술의 아이콘 아니던가? 한국인들끼리만 좋아하는 인물을 넘어서 국제적 인지도와 기여도를 가진 인물들이 우리의 지폐에 더 많이 등장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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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4년07월22일 18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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