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을 보내며 ‘갑오혁명’의 기억을 더듬다 - -갑오혁명 120주년을 기린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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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이 다가도록 갑오혁명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는 분명 비정상이다.
갑오혁명, 잊혀진 기억
갑오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갑오년을 보내며 올해가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과문한 탓 일가 그러고 보니 지난 한 해 동안 갑오동학농민혁명(이하‘갑오혁명’이라 부름)을 기념하는 국가적 기념식은 고사하고 ‘갑오혁명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변변한 토론회가 열렸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없다. 갑오혁명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조차 잊혀진 역사적 사건의 하나일 뿐인가. 아니면 아직도 입에 담기 어려운 주제인가. 갑오년을 맞이하여 갑오혁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조금은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120년 전 갑오혁명군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고부, 무장, 황토현, 삼례 등지를 걸었던 일이 있었다. 그 때의 소감을 두서없이 적어두었던 수첩을 다시 꺼내보았다. 조선왕조와 조선반도와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던 갑오혁명 120주년을 이렇게 소리 없이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쉽고 죄송스러워 그 때의 기억을 다시한번 더듬어 본다.
전봉준대장의 꿈
1894년 1월 10일(음력) 고부봉기로 시작된 갑오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대장은 1894년 12월 12일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336일간의 전봉준대장의 꿈은 거기까지였다. 1895년 3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사법기관인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역사상 처음 열린 재판에서 전봉준대장은 사형을 선고 받았고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재판관은 전봉준대장의 죄상을 이렇게 말했다. *
“동학당은 조가(朝家)의 금하는 바라. 네 감히 도당을 모아 난을 일으켜 영읍을 함락하고 군기와 군량을 빼앗았으며 대소명관을 임의로 죽이고 나라 정사를 참람히 처단하였으며 나라의 세금을 사사로이 거두어들이고 영반과 부호를 모조리 짓밟았으며 노비문서를 불질러 강상을 무너뜨렸으며 대군을 몰아 왕성을 핍박하고 정부를 부수어 새 나라를 도모코자 하였나니, 이는 곧 대역불궤에 관한 것이라 어찌 죄인이 아니라 이르느뇨?”
그러자 전봉준대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고자 하는 자니 탐학한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악행을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단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해하는 자들이다. 그 죄 가장 중대하거늘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하느냐....너는 나의 적이오,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라를 바로 잡으려다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당시 판결문과 사건기록들을 중심으로 전봉준대장의 혁명일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전봉준(당시 41세)은 동학당이라 칭하고 비도의 거괴로 접주가 되어” 1차로 고부군수의 학정에 항거하여 1894년 1월 10일 고부에서 기병한 후 해산했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로 내려와 동학교도를 살육하자 2차로 3월 20일 무장에서 기병하여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장성에서 다시 관군을 격파했다. 4월 27일 전라감영(전주성)을 함락하고 27조목의 폐정개혁안을 요구하고 조정을 대신한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 53개주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5월 5, 6일경 동학군을 자신들의 고향을 돌려보내고 자신은 7월 하순경까지 집강소별 폐정개혁을 독려하기 위해 최경선 등 20여명과 같이 전주로부터 금구, 태인, 장성, 담양, 순창, 옥과, 창평, 순천, 남원, 운봉, 등 각처를 순회하고 고향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이어 8월 17일 평양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한 후 관군을 앞세워 혁명군 토벌에 나서자 일본군 구축(척왜)를 위해 9월 1일 삼례에서 3차로 기병하였고 10월 26일 공주에 이르렀으며 11월 11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동학군은 무너졌다.
갑오혁명의 백미는 무어라 해도 전봉준대장이 이끈 혁명군이 1894년 4월 27일 성공적으로 전주성을 함락한 것이 할 수 있다. 혁명군에게 패하고 혼란에 빠진 당시 조정은 혁명군의 한양진격을 막기 위해 혁명군과 27개 조목의 폐정개혁안을 합의 수용하고 6월 11일 전주화약을 체했다. 그 결과 혁명군은 전라 53개주에 혁명군의 자치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체적인 폐정개혁에 나섰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갑오혁명이 실패로 끝난 ‘비도의 난’이 아니라 절반의 성공으로 몰락하는 조선봉건왕조의 뿌리를 흔들어 해체를 촉진하고 ‘백성의 나라시대’을 연 최초의 ‘백성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가. 한반도 전체는 아니었지만 전라도 일대는 적어도 전주성 함락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패할 때까지 거의 5-6개월가량 사실상 혁명군이 통치하는 일종의 ‘해방구’가 되었던 것은 아닐 가. 그래서 전라도 백성(농민)들은 조선백성들 가운데서 역사상 처음으로 신분사회의 두꺼운 벽을 뚫고 나와 해방을 맛보았고, 자유평등과 민주의 달콤한 맛을 보았던 것은 아닐 가. 그러나 갑오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혁명군에 대한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유생들의 조직인 민보단의 무자비한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감추었던 혁명군과 그 가족과 친척들의 처절한 삶은 그 들이 한 순간 맛보았던 제2의 해방과 자유와 민주와 평등한 세상을 더욱 갈구하게 하지 않았을 가. 120년 전 전라도 백성들의 마음에 각인된 꿀맛 같은 해방과 자유와 민주와 평등과 혹독한 탄압과 학살의 한 맺힌 기억들은 결국 전라도로 하여금 독립투쟁과 독재와 반민주에 저항하며 대한민국을 오늘과 같은 백성의 나라로 만들게 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자유와 민주와 평등의 샘물이 되게 한 것은 아닐 가.
세계의 모든 근현대사가 권력을 장악한 왕권과 신권의 야합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봉건왕조시대를 타파하고 백성들이 주인이고 모든 권리는 국민(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을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시대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봉준대장은 바로 우리 역사에서 그러한 새 시대를 여는 첫 번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갑오혁명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규모로 백성권(민권)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신분제의 고리를 끊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시대를 여는 위대한 백성혁명이요 시민혁명, 국민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국가적으로 갑오혁명의 통일된 이름 하나 정하지 못하고, 통일된 기념일하나 정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아니지 않는가.
갑오혁명에 대한 분명한 역사적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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