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와 열린 창의성·1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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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세한도>는 세로 23㎝, 가로 61.2㎝ 크기로 종이 바탕에 그려진 수묵화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작품이다. 추사는 조선 헌종 시절 중앙에서의 권력을 박탈당한 채 남쪽의 섬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과 서예와 학문을 존경하는 제자 이상적은 역관(譯官)이었는데, 스승을 위해 옌칭을 오가며 구한 귀한 책들을 제주도로 보낸다. 이 제자의 의리에 감사한 마음을 지녔던 스승은,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떠올리며 네그루의 겨울나무를 그려 답례로 준다. 그 그림을 받고 감격한 제자는 그것을 가지고 다시 옌칭으로 가서 추사와 교유했거나 그의 문인화를 존중하던 현지 명사 장악진(章岳鎭)·조진조(趙振祚) 등 16명에게 보여주고 제영을 받는다. 그리고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 20편의 글이 함께 붙어서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화폭에는 나지막한 집 한 채와 그 양쪽으로 소나무 두 그루와 잣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집도 나무도 모두 간략한 붓질로 처리되었고, 나머지 여백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여백의 미학의 절정을 이룬다.
김정희, <세한도>(1844), 종이에 수묵, 23-61.2cm, 개인 소장(송창근)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이 되던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그린 작품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제주도라는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는데, 가족을 동반할 수 없고 출입이 부자유스런 상태에서 늘 감시당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벌이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자연스럽게 김정희는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상적은 한결같이 스승을 찾고 그를 위해 청나라에서 구한 새로운 서책들을 선물했다. 이런 제자 이상적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려 선물한 것이 <세한도>이다. <세한도>를 그릴 때 추사의 생각은 제사(題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사에서 추사는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는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본문을 거론하면서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나 이권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세나 이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단 말인가?”라며 이상적의 선비정신을 칭찬한다. 이어서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논어(論語))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상적의 변함없음을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서한(西漢)시대처럼 순박한 시절에 살았던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권세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사기)는데, 어려운 세한(歲寒)의 시대를 사는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 도와준 제자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요컨대 추사는 <세한도> 제사의 논점은 이렇다. 첫째, 세상의 권세에 따라 사람들이 달라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것은 철마다 형상을 바꾸는 낙엽수의 모습과 같다. 둘째, 그럼에도 변함없이 올곧은 선비가 있다. 이는 늘 푸른 송백의 기상과 같으니, 송백 그림으로 그 선비정신을 기리고 싶다. 셋째, 세상의 권세를 멀리 하고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에게 감사하며, 자신 또한 그런 선비정신을 견지하며 살고 싶다고 다짐한다.
이와 같은 추사의 선비정신은 동아시아의 공통 이념에 해당한다. <세한도>의 원본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세한도>는 이상적 이후 여러 사람들을 거쳐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대 교수를 지냈던 일본인 후지츠카(藤塚隣)가 소장하고 있었다. 김정희 작품 최고 수집가였던 후지츠카는 1943년에 자신을 방문하여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달라는 한국인 손재형을 청을 거절한 채 일본으로 간다. 1944년 여름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노환을 앓고 있는 후지츠카를 만나 다시 양도를 청한다. 거의 매일 자신을 찾아와 성의를 보이는 손재형의 정성을 본 후지츠카는 그의 맏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러나 손재형은 그 말에도 만족하지 않고 다시 청한다. 그러자 후지츠카는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잘 보존만 해 달라.”는 말과 함께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준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받아 귀국하고 석 달 후인 1945년 3월 10일, 후지츠카의 가족이 태평양전쟁의 공습을 피해 거처를 옮긴 사이에 폭격으로 그의 서재의 모든 책과 서화 자료들이 불타버렸다. 후지츠카의 그 많은 서화 자료 중에 오직 <세한도>만이 세상에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유홍준, 완당평전 1, 학고재, 2002, pp. 405~406.) 이 에피소드에서 후지츠카와 손재형이 <세한도>를 가운데 두고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공통 이념이 바로 선비정신이었던 것이다.
지조와 절개를 강조하는 유교적 동일성의 세계는 청조(淸朝) 문사들의 제영(題詠)들을 통해 재확인된다. 스승으로부터 <세한도>를 선물받은 이상적은 그것을 들고 청나라로 간다. 1845년 1월 13일 옌칭의 오찬(吳贊)의 집에서 장악진(章岳鎭)·조진조(趙振祚)·요복증(姚福增) 등 17명의 청조문사(淸朝文士)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상적은 <세한도>를 보여주며 추사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자리에 모인 문사들은 한결같이 <세한도>의 화풍에 감동하고, 한편으로 추사의 외로운 처지에 연민을 보이면서 제영들을 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굳은 절개를 지니고 있지만 눈서리를 맞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홀히 여기므로 그 절개를 알아보기 어렵고 등용하는 경우도 적다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비록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겨울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고자 한다면, 겨울이 닥치기 이전의 절개를 먼저 배워야 한다. 그들은 절개를 늘 지니고 있으므로 사시사철 바꾸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저 보통 화초들이라고 해서 겨울이 되면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되기를 어찌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평소 그 절개가 견고하지 않아서이다. 평소에 절개가 견고하다가도 다급한 순간에 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소에도 절개가 견고하지 않은데 다급한 순간에 변하지 않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장악진(章岳鎭))
절개는 숲속의 나무와 같아 오랜 시간 지나야만 완성되지만
소나무와 잣나무의 본성 속에는 바로 그 절개가 들어 있다네.
군자는 힘들수록 단단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고 무얼 탓하리?(오찬(吳贊))
저 나무는 기특한 절개가 높고
이 사람은 올곧게 절개 품었네
그 신세 그리움 속 맡겨두고서
이렇게 한겨울의 모습 그렸네.
해외에도 계절 식물 똑같은지라
조물주는 그 절개를 존중하였고……(요복증(姚福增))
인용한 세 편에서 화자들은 공히 절개를 강조한다. 장악진은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씀을 전거삼아 송백의 절개를 중심으로 <세한도>를 수용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고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옳은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절개를 송백에서 이끌어낸다. 사철 푸른 송백을 제재로 한 절개의 담론은 <세한도>를 그린 추사나 그것을 받은 이상적의 덕성을 유추케 한다. 즉 자연물인 송백의 이야기로 사람살이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다. 한문을 매개로 한 공동어문화권이었던 동아시아의 유교적 맥락에서 <세한도>를 수용한 장악진은 주체의 개성적 경험보다는 집단적 경험이나 이념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송백의 절개론을 제시했다. 이 점 오찬과 요복증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송백의 절개와 군자의 덕의 상징적 일치를 강조한다. 특히 요복증의 경우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송백에 대한 동일한 감각을 환기했다. 이와 같이 유교적 맥락에서 지조와 절개를 중심으로 한 <세한도> 수용 현상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것은 근대 이후 한국의 문인들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의 생태학적 동일성을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새로운 창의성의 지평을 열게 했다. <세한도> 미학의 핵심 중의 하나는 이와 같은 열린 창의성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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