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제민추(官製民追)의 일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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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엽서의 뜻도 몰라
제가 고등학생 때까지 제대로 뜻도 모르며 사용하던 말 하나가 떠오릅니다. ‘관제엽서’라는 말입니다. 라디오에서 청취자 퀴즈를 내고 그 답을 ‘관제엽서’에 적어 보내라는 방송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는 관제엽서하고 그냥 엽서가 어떻게 다른지 몰랐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던 저는 한가지 꾀를 냈습니다. 학교에 가면서,“할머니! 우체국에서 관제엽서 좀 사다 주세요.” 그날 저녁 할머니가 사다 주신 엽서는 제가 써오던 ‘그냥’ 엽서와 똑같았습니다. 엽서를 받아 들고 “으음, 우체국에서 파는 엽서가 관제엽서구나” 하는 쪽으로 이해했었습니다. ‘정부가 만드는 규격엽서’가 관제(官製)엽서라는 것을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랬습니다.
‘땡전’뉴스
대학생 때는 데모한다고 남들 따라 전경들을 향해 돌멩이도 던지고 주먹을 위아래로 휘두르며, ‘♪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의 ‘늙은 군인의 노래’나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라는 ‘상록수’도 목 터지게 불렀었습니다. 누군가가 “독재정권 물러가라!” 하고 선창하면,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하며 복창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 사람의 존엄을 짓밟는 독재는 못된 것이구나’ 하는 의식도 다가왔었습니다. 10.26 사건 이후 정권을 잡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때였습니다. 그 당시 밤 9시뉴스를 ‘땡전’뉴스라고도 했습니다. ‘땡’하고 뉴스가 시작되면 첫마디가 ‘전두환 대통령은……’ 하고 시작되었음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습니다.
관제민추의 일본사회
지금 일본이 ‘땡아’ 일본으로 역행하는 듯합니다.‘땡’ 하면 ‘아베총리대신(수상)은……’ 또는 ‘아베노믹스는……’하고 내세우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미국으로부터 주어진 민주주의를 관(官)에서 시키는대로 따라만 하다 보니 관이 폭주를 하여도 민(民)의 저항의식은 무뎌졌습니다. 일본 백성들은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극히 꺼려합니다. 지금 일본에서 돌아가는 뉴스거리 앞에,‘관제’라는 말을 붙이면 해석이 잘됩니다. 예컨대, 주가상승은 ‘관제주가’, 엔저현상은 ‘관제환율’, 노사협상은 ‘관제춘투(春闘)’, 역사교과서 문제는 ‘관제역사’, 도덕교육 필수화는 ‘관제교육’으로 보면 대개가 들어맞습니다. 관(官)이 만들고(製) 민(民)이 그에 따라가는(追) ‘관제민추(官製民追)’ 사회입니다.
관제주가
‘아베노믹스’로 경제가 잘 나간다고 선전하기에 딱 좋은 척도가 주가지수입니다. 아베정권 출범 당시(2012년 12월 26일) 닛케이(日經) 평균 주가지수는 10,000정도였는데, 2014년 4월 10일 20,000을 찍기도 했으니 두 배나 올랐습니다.주식가격은 기업가치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아베정권 출범 이후 2년 3개월 새에 일본기업가치가 두 배나 올라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일본은행 돈이나GPIF(연금적립금관리운용 독립행정법인) 등의 수십조 엔에 이르는 공적자금이,주식이나 주식연동 투자신탁을 매입하고 있습니다. 이를 눈치챈 외국자금이나 큰손 투자가들은‘정부가 주식시장을 받치고 있는한 주가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경험칙으로 편승투자를 하였고 주가도 따라 올랐습니다. 일본은행 및 정부 연출에 따른 ‘관제주가’입니다.
관제환율, 관제춘투
아베노믹스가 자동차나 기계장비업 등 수출 제조업의 업적개선을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 배후에는 엄청난 돈을 풀어대는 금융완화로 엔저를 유도한 ‘관제환율’이 자리합니다. 경기가 살아나기 위해선 임금이 올라야 한다니까 아베수상이 기업들한테 임금인상을 하라고 흘깃거립니다. 토요타자동차와 같은 일부 대기업은 봄철 노사간 임금협상(춘투, 春闘)에서 그런 정부의 요구에 잘 따랐습니다. 정부(官邸)가 임금인상에 관여한‘ 관제춘투(官製春闘)’입니다. 관제주가나 관제춘투는 제가 처음 꺼낸 말도 아니며 일본 대중매체에서도 곧잘 사용합니다.
관제역사, 관제교육
‘역사문제는 이미 해결된 일’,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정부견해를 교과서에 집어넣으라며 학습지도요령에 관이 적극개입하고 있습니다. 도덕과목도 곧 필수로 지정하게 됩니다. 앞으로 국립대학의 입학∙졸업식에서는 일본국가(기미가요)를 부르도록 통달한다고 합니다. 아베수상은 ‘국립대학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이니 국가를 사랑하는 태도를 기른다는 교육기본법 방침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관제역사’이고 ‘관제교육’입니다. 관과 민이 다툴 경우 개인의 존엄성보다는 국가질서를 중시하여, 사법에서도 관의 손을 들어 줄 때가 많습니다. 총체적으로 ‘관제일본’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 아베정권의 현주소입니다. 어설프게나마 민주화 데모 해본 저로서는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아베정권 이후에 위험신호?
아베정권은 서민들의 귀와 입을 막으며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갑니다. 특정비밀보호법 제정으로 관이 비밀로 정하면 공개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민주화 척도로 보면 아베수상은 사회성숙도를 많이 갉아먹은 수장이 될 것입니다. 경제가 잘 나가는 듯 보이지만 가구당 월평균 실질소득은 2000년대 들어 17%나 줄었습니다(2000년 61만 5천 엔에서 2011년 51만 엔으로). 아베정권에서도 가계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당장은 불거져 나오지 않을 테지만 아베정권 이후 동경발 위험신호가 새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연금적립금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일본은행이 마냥 돈을 찍어 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제일본의 허와 실
꽉 짜여진 일본사회에선 새로운 제언이나 비판적인 견해에 많이도 당황합니다. 주어진 일을 매뉴얼에 따라 처리하면 되므로 개개인의 판단능력이 높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러한 판국에 관제일본을 따라 관제한국을 만들라고 역설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시시비비를 판단하여 담담하게 임할 능력을 저하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관제일본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한 우물 파는 질서유지가 잘 된다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성깔 사나운 사람이 나타나 못 먹는 감 찔러보기나 남의 호박에 말뚝 박기를 하다가는 몰매 당합니다. 판이 깨지지 않도록 엄청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제풀에 넘어지지 않아야
우리는 목소리는 크지만 서로 급하게 앞으로 가려다 보니 차곡차곡 일을 다져가기 어려우며 상대방의 유혹에 빠져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는 데 주효했던 방법도 한국인을 앞세운 분열작전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한류 붐이 가고 혐한론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데, 한국인 이름의 저자를 내세워 비하하려 합니다. 거기에 올라타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일본을 좋은 쪽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거꾸로 일본에 나쁜 쪽으로 이용당하는 꼴입니다. “우리나라가 제풀에 넘어져서는 안 되는데……” 하는 염려가 다가서기도 합니다. 진득함을 다잡고자 자신부터 책망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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