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 성장은 성장 담론 아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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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보수·진보 토론회가 열렸다. 개혁적 보수를 표방하는 국가미래연구원, 합리적 진보를 내건 좋은정책포럼이 각각 나섰다. 멍석은 새정치민주연합이 깔았다. 올해 처음 개최한 ‘2015 정책엑스포’의 일환이었다. 주제는 문재인 대표가 주창한 소득 주도 성장론이었다. 이에 찬동하는 진보가 선공(先攻)에 나섰다. 핵심은 소비부진과 양극화의 심화였다. 이를 해결하려면 임금을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저소득층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가계소득을 늘려야만 민간소비를 늘릴 수 있고, 저성장을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설득력 있는 지적이다.
진보의 인식처럼 소비부진은 우리 경제의 만성적인 고질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잃어버린 소비 10년’이다. 2002년 이후 지난해까지 민간소비지출 증가율이 국내총생산(GDP)증가율보다 높았던 적은 2005년 딱 한 번뿐이었다. GDP 중 민간소비 비중(실질 기준)이 2002년 56.9%에서 지난해 48.6%로 급락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소비부진이 늘 이슈로 제기됐던 건 그래서였다. 당시의 일화다. 2005년에도 소비부진이 지속되자 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가라는 질타가 잇따랐다. 그러자 그해 8월 청와대가 해명에 나섰다. 소비부진은 맞지만 개혁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성매매 금지법 발효와 향락성 접대비 감축으로 눈 먼 돈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런 돈이 내수 경제를 살찌운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면서 “내수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눈 먼 돈’을 허용할 순 없지 않는가.”라고 주장했던 거다.
양극화 심화도 우리 경제의 문제점 중 하나다. 이날 진보는 10%의 상위 소득층이 국민소득 45%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 의견도 있었다. 토론회에서 보수는 노동소득분배율이 개선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0년 59.5%까지 떨어졌던 노동소득분배율이 지난해 62.6%로 올랐다는 한국은행 통계를 인용하면서. 하지만 진보의 의견은 달랐다. 자영업자의 영업잉여에 대한 해석의 문제였다. 진보는 한국은행과 달리 이중 일부를 노동소득으로 산입했다. 이렇게 계산하면 노동소득분배율은 오히려 악화됐다는 거다. 1996년 79.3%에서 2013년 69.5%로 급락했다는 설명이다. 나는 진보의 주장이 옳다고 본다. 자영업자의 영업잉여는 노동소득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니계수도 마찬가지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지니계수는 2008년이 피크였다. 그해 지니계수는 0.323(2인 이상 비농가 기준)이었다. 이 지표가 처음 나온 2003년의 0.292에 비하면 소득불평등은 심화됐다. 하지만 그 후로 불평등은 개선됐다. 2013년 0.308로 떨어졌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 수치를 믿을 만하냐는 점이다. 이런 의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신(新)지니 계수의 발표 때문이다. 표본 대상자가 1만 명 정도인 가계동향조사를 토대로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공식 지니계수는 2011년 0.311이다. 하지만 통계청이 실험적으로 표본대상자가 2만 명이나 되는 가계복지·금융조사를 토대로 산출한 신 지니계수는 0.357로 확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의 평균치 0.310(2010년 기준)보다 훨씬 높다. 우리나라의 양극화가 위험 수위에 와 있다는 증거다.
요컨대 진보의 문제의식은 틀리지 않았다. 소비부진과 양극화 심화가 우리 경제의 고질병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How-to)다. 다시 말해 소득주도 성장의 담론처럼 임금을 올려 가계소득을 늘리면 고질병을 해결할 수 있느냐다. 이 점에선 진보의 설득력은 떨어졌다. 백가지 처방이 무효니 이거라도 해보자는 차원이라면 모를까.
단적인 증거가 포드자동차의 창업자인 헨리포드가 100년 전에 시행했던 임금인상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포드는 1914년 종업원들의 시간당 임금을 2.4달러에서 5달러로 확 올렸다. 이건 역사적 팩트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다. 좋은정책포럼의 김형기 대표는 “임금을 올려 가계소득을 늘렸기 때문에 자동차를 많이 팔 수 있었다.”면서 “우리 기업들은 왜 이런 지혜가 없을까”라고 지적했다. 반면 국가미래연구원 김광두 원장은 “그때 만일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있었더라면 포드가 과연 임금을 올릴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했다.
나는 김 원장 의견에 동의한다. 당시 포드가 임금을 올린 건 그럴 만한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포드는 자동차 생산기술을 혁신했다. 이전까지는 수작업으로 제작한 고가의 자동차를 일부 부유층에게만 팔았다. 하지만 포드 생각은 달랐다. 대량생산을 하면 생산원가를 낮출 수 있다고 봤다. 중산층도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자동차 대중화 시대의 개막’이 그의 목적이었다.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해 조립라인시스템을 구축했다. T형 모델이라는 단일 자동차만 생산했기 때문에 부품 호환제도 실행할 수 있었다. 모두다 세계 최초였다. 경쟁업체들보다 생산원가가 월등하게 낮았기 때문에 포드는 종업원 임금을 두 배로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자동차회사는 사정이 달랐다.
임금 인상의 또 다른 목적은 독점화였다. 경쟁자를 밀어내 독점기업이 되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여력도 없으면서 기술자들을 뺏기기 싫어 임금인상에 동참한 경쟁업체 상당수가 파산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경쟁자들은 포드에 대항하기 위해 후일 GM으로 뭉쳤다. 하지만 GM이 경쟁력을 발휘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자동차는 포드의 독무대였다. 요약하면 임금을 올릴 여력이 없는 기업들이 임금을 올리면 도산할 수밖에 없다는 게 포드의 또 다른 교훈이다.
토론회에서 보수가 지적했던 점도 이 부분이지 싶다.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무한경쟁과 급속한 기술혁신 시대에 경쟁력이 우선돼야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옳은 지적이다. 지금은 누구라도 졸면 죽는 세상이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노키아, 모토롤라, 블랙베리가 순식간에 망하는 세태다. 이런 세상에서 임금만 강조하고 경쟁력은 고려하지 않는 소득주도 성장이 지속가능할 수가 있을까. 자칫 성장의 위기가 닥치는 건 아닐까. 2017년 대선의 화두가 무엇일지를 놓고 양측이 상반됐던 이유였다. 진보는 양극화의 심화를, 보수는 성장의 위기가 될 걸로 전망했으니 말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성장 담론으로 보기 힘든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누구의 임금을 얼마나 올려야 소비에 도움 될지에 대한 해법이 부족했다. 물론 진보가 얘기하는 임금은 저소득층의 임금이었을 게다. 평균소비성향이 낮은 고소득층의 임금 인상은 저소비 해결에 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임금 수준은 선진국과 비교해 낮지 않다는 점이다. 구매력 환산 기준으로 따진 1인당 실질임금은 오히려 일본보다 많다. 실질임금 증가율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가장 높다. 그런데도 임금인상 얘기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근로자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이 100원 받을 때 그들은 40원밖에 못 받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이들의 소비성향은 상대적으로 높다. 임금을 올려 소비를 늘리겠다는 구상이라면 이들의 임금 인상이 관건이란 얘기다. 문제는 임금 인상 여력이다. 저임금 근로자가 태반인 중소기업은 인상 여력이 별로 없다. 여력이 있는 건 대기업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임금 상승 압력이 먹혀들어 대기업 임금이 올라가면 양극화는 더 커진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인상된 대기업의 임금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에게 흘러들게 하는 방안에 대한 해답과 실행이 먼저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의 임금인상은 소비부진의 극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소득주도 성장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진보에선 이런 고민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보수 쪽이 명쾌한 설명을 내놓는다. 노동개혁과 경제민주화를 해답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근절해 중소기업을 강소기업으로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게다가 소득주도 성장론은 사실 소비주도 성장이다. 하지만 인구 5000만 명의 소규모 개방경제에서 소비 증대는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투자주도 성장이 더 바람직한 이유다. 질 좋은 일자리를 더욱 많이 창출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런 투자주도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가 소득주도 성장보다 성장담론에 더 가깝다고 보는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소득주도 성장론이 성장보다 양극화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도 문제다. 우리는 아직 덩치를 더 키워야할 처지기 때문이다. 경제규모가 세계 1~3위인 미국과 중국, 일본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여건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의 경제 덩치가 크다면 사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독도 등의 외교안보 문제가 지금보다는 수월하게 풀릴 게다. 국제경제 협상 경험이 풍부한 관료들은 한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GDP의 3%는 돼야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경험칙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1.7%(2012년 기준)에 불과하다. 요즘은 세계경제 성장률보다 성장률이 더 낮아 이 비중은 더 떨어졌을 게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성장에 더 무게를 둬야 하는 이유다. 소득주도 성장은 경쟁력과 성장 친화적인 담론이 돼야 하는 건 그래서다. 복지가 성장 친화적 복지가 돼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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