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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11: 바람처럼 사라진 혁련발발 하나라(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7월12일 17시45분
  • 최종수정 2018년07월12일 13시5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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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철불 흉노가 세운 하(夏)나라

 

하나라는 AD407년 고대 흉노족의 일파인 철불흉노(鐵弗匈奴)가 세운 나라다. 후한 시대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이래 북흉노는 몽고 사막일대에 남아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한 반면 남흉노인 철불부는 오르도스(鄂尔多斯), 지금의 내몽고 서남부지역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때로는 한 혹은 서진(西晉)과 같은 중국 조정에 복속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철불 흉노처럼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과 분리되기 보다는 중국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민족으로 보면 틀리지 않는다.

 

철불 흉노부의 선조는 한-위-오 삼국 시대 흉노의 지배자 즉 선우였던 어부라(於夫羅)의 조카뻘인 철불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다. 그는 조조(曹操)의 신임을 받아 남흉노를 관할하였으며 대략 이 때부터 한나라 유씨(劉氏) 성을 사용하였다. AD310년 거비의 손자 유호(劉虎)가 선비족(鮮卑族)이자 나중에 대(代)나라를 세운 탁발부(拓跋部)에게 본거지인 산서 일대를 빼앗기자 다시 본거지인 오르도스 지방으로 옮겨와 할거하면서 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진(前秦)에게 차례로 협력하였다. AD341년 유호가 죽고 그 아들 유무환이 자리를 계승했으나 AD356년 유무환이 죽자 그의 동생 유알(루)두가 유무환의 두 아들, 즉 조카 유실물기와 유위진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유알(루)두는 선비족 나라인 대의 탁발십익건에 굴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탁발십익건이 경고삼아 직접 순시오자 항복을 요청하였고 탁발십익건이 요청을 수용함으로써 철불흉노는 사실상 대의 복속국이 된 셈이다.(AD356)

 

 

(2) 유위진의 권력 찬탈(AD359)  

 

당시 북중국 최고 강자는 부건이 세운 전진이었다. 포학한 아들 부생이 집권했지만 강력한 군주 부견에 의해 밀려난 뒤 전진은 북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 있었다.전진 부견의 기세에 눌린 유알(루)두는 전진에게 반기를 들고 황하를 건너 대나라가 있는 동쪽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황하 강물이 녹아있어 건널 수 없자 따르던 무리의 대부분은 유무환의 아들 유실물기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유알(루)두 혼자 대의 수도 하북성 울현으로 도망갔다.  (AD359년)

 

남흉노의 실권을 장악한 유실물기는 그 해 곧바로 죽었다. 그리고 그 동생 유위진(劉衛眞)이 조카(유실물기의 아들)를 죽이고 자리 차지했다.(AD359) 유실물기가 자연사 했는지 타살 당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흉노족은 물론 선비족, 강족 혹은 여러 유목민족의 권력 승계에서는 형제승계가 매우 빈번히 일어났으므로 유위진이 조카를 죽이고 권력을 계승한 것은 스스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중국 유교전통처럼 아들에게 권력을 계승하려 했던 삼촌 유실물기를 죽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유위진이라는 사람의 으ᅟᅮᆷ험한고 교활한 향후 행적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3) 유위진이 전진 부견에 항복 요청(AD360)

 

정권을 장악한 흉노 유위진은 곧바로 장안에 있는 전진 부견에 사자를 보내 전진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당돌하게도 그 대가로 농지를 요구했다. 흉노족은 원래 유목민족이라서 한 곳에 머무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만큼 흉노족은 다루기가 어렵기도 하다. 그런 흉노족이 먼저 농지를 요구하고 봄에 와서 경작한 뒤 가을에 떠나겠다고 하니 부견은 쾌히 허락했다.(AD360) 유위진이 이끄는 남부 철불 흉노족은 이제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고 鄂尔多斯)지역을 기반으로 반쯤 정착하는 세력이 되었다. 

 

주군 부견이 경작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수비하는 운중호군 사마 가옹이 4월 유위진 군대를 습격하여 대대적으로 군사를 포획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진왕 부견은 사마 가옹에게 크게 화를 냈다.

 

   “ 은혜와 믿음으로 융적을 회유하고자 하는데

     어찌 네가 작은 이익을 탐내 이를 실패하게 하는가?“

 

가옹을 쫓아내 사졸로 강등시킨 뒤 백의종군을 시켰다.

 

 

(4) 유위진이 대왕 탁발십익건의 사위가 되다.(AD360)

 

AD360년 6월 대왕 탁발십익건의 비 모용씨가 죽었다. 유위진은 대나라 수도 화림각이에 직접 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유위진은 전진에게도 복속했지만 대나라 하고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었다. 대왕 탁발십익건은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하였다. 사실 대나라 선비족이나전진의 저족 모두 이민족계통이고 또 대와 전진의 사이는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민감하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유위진이 전진의 변방 사람 50인을 잡아 노비로 삼은 뒤 부견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부견은 그런 야만적인 행위를 한 유위진을 크게 꾸짖으며 보내 온 50인을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유위진은 전진의 그런 ‘점잖은 척’ 하는 부견에 대해 심히 반감을 품었다. 자신의 성의를 짓밟은 부견에 대해 앙심을 품은 유위진은 전진을 버리고 탁발십익건의 대나라에 복속하기로 마음먹었다.(AD361)

 

 

[그림1] 당시 유위진 근거지와 대나라와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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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위진의 탁발십익건 배반(AD365)

 

유위진은 대나라에서 탁발십익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AD365) 원래 유위진은 배반하는 것을 떡 먹듯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필요에 따라 배반과 복종을 번복해 온 사람이었다. 탁발십익건은 직접 유위진 토벌에 나섰다. 유위진은 황하를 건너 도망갔다. 다시 전진의 부하가 된 셈이다. 탁발십익건은 매우 통이 크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날아오는 화살에 눈을 맞았는데 누군가가 화살을 쏜 사람을 잡아 죽여서 젖을 담가야 한다고 하자 탁발십익건이 이렇게 말했다.

 

   “ 저 사람은 자신의 주인을 위해 죽기로 싸우다가

    그리 된 것이니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 해 가을 흉노 우현왕 조곡과 좌현왕 유위진이 전진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우현왕 조곡이 2만 병사로 행성(섬서성 황릉) 공격했다. 부견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AD365년8월) 버티지 못한 조곡은 항복을 요청했다. 전진의 명장 건절장군 등강은 유위진을 토벌하여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부견은 유위진을 죽이지 않고 하양공에 임명하여 그 지역 부락민을 통솔케 하였다.(AD366) 부견의 관용과 포용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부견은 사로잡은 적장을 거의 매번 죽이지 않았다. 요장도 그랬고 모용수도 그랬고 유위진도 살려줬다. 부견의 불심 깊은 자비심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 비록 나중에 살려 줬던 요장에게 죽임을 당했지만(AD385) 그의 관용은 충분히 높이 살만하다.

 

 

(6) 탁발십익건의 유위진 추격(AD367) 

 

대왕 탁발십익건은 반란을 일으킨 사위 흉노 좌현왕 유위진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유위진을 공격했다. 당시 황하는 얼음이 덜 얼은 상태였다. 탁발십익건은 굵은 끈과 풀을 엮어서 제방처럼 만들어 얼음을 흐르는 것을 막은 뒤 부교처럼 만들어서 강을 건넜다. 유위진은 남쪽 전진으로 도망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탁발십익건은 유위진의 부락민 60%를 포획한 뒤 철수했다. 유위진이 전진으로 도망해 오자 부견은 유위진을 삭방(하투)으로 유배 보내고 군사로 하여금 감시하도록 했다. 이 해(AD367) 부견의 동생 부쌍과 여러 친척 조카 부류, 부무, 부수 등이 부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부견은 이들을 진압하는데 온 힘을 다 쏟았다. 

 

 

(7) 부류 등 부생 형제들의 반란과 성공적인 진압(AD367)

 

3년 전인 AD364년에 부생의 친동생 여남공 부등(騰)이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적이 있었다. 왕맹은 예전부터 부생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견은 주모자 부등만 처리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살아남은 정북장군 회남공 부유는 다음해인 AD365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는데 이위가 잘 방어하여 부유를 체포하고 죽였다.(AD365년10월) 이 때 부건의 아끼는 아들 정동대장군 진공 부류(부생의 동생)와 부견의 친형 정서대장군 조공 부쌍도 가담을 했지만 부견은 부유만 처단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부견이 두 번이나 목숨을 살려 주었던 부류가 부생의 다른 동생 진동장군 위공 부수와 안서장군 연공 부무와 함께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AD367년) 진동장군부 주부 요조가 주군 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는 주공과 소공처럼 주군(부견)과 친한 사이인데      

    국가가 어려울 때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스스로 난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그림] 부생 동생들의 반란(AD3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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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는 요조의 조언을 듣지 않고 반란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이 그 소식을 듣고 즉각 난에 동참했던 부류 형제를 장안으로 긴급 소환했다. 부류 형제들은 소환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부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대를 물리고 소환에 응하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신표로 배를 깨물어 보이는 「설리의 신표(齧梨爲信,설리위신)」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부견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음해 정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보내 진주(秦州) 방향 반란군 부무를 토벌하게 하고 왕맹과 등강은 옹주 포판(산서성 영제)의 부류를 공격하였으며 양안과 장자를 보내 섬성(삼문협)의 부수를 토멸시켰다. 

 

섬성을 지키던 부수는 두려운 나머지 전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연의황제는 용렬한 모용위였고 훌륭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모용위의 삼촌 모용각은 지난해(AD367) 사망한 직후였다. 모용각은 죽기 직전 조카이자 황제인 모용위에게 친동생인 오왕 모용수를 등용하여 모든 정사를 자문할 것을 신신당부했었지만 모용위는 듣지 않았다. 모용위는 뛰어난 모용수(나중에 후연 창업) 대신 시기심이 많고 편벽한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을 태부 및 대사마로 등용시켰다. 사실 전연 조정에서는 부씨 형제간 내전으로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전진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옹졸하고 그릇이 형편없이 작았다.   

 

  “ 전진은 대국이라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닫아걸고 국경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진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나의 소관이란 말이냐!“

 

이런 전연 조정의 내막 형편을 알게 된 부수는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상의했다.

 

  “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빼앗지 않으면 

    과거 오의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음에 따라

    나중에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용동에서 방축되어 자살하게 만든 

    용동의 한(甬東之恨)이 될까 걱정됩니다.“

 

모용수가 측근 황보진에게 이렇게 걱정했다.

 

  “ 주군(모용위)이 어리고

    태부 모용평은 용렬하기만 하니

    어떻게 부견과 왕맹을 당해 내겠소?“ 

 

황보진이 이렇게 대꾸했다.

 

  “ 우리가 그것(이 기회에 부견을 공격하자는 것)을 말한 들

    듣지 않을 것이니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연의 모용위와 모용평 조정은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AD370년 전연은 부견의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했다.    

 

양성세와 모숭이 이끄는 부견의 진주토벌군은 전쟁 초기 부무에게 패배하여 쫓겨 왔다. 부견은 다시 왕감과 여광과 적녹에게 3만 대군을 붙여 진주(감숙성 경천)를 재차 공격했다. 이 때 흥분한 왕감이 전투를 서두르려 하자 여광은 적군 식량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러날 때 공격하자고 타일렀다. 여광의 생각은 적중했다. 먹을 것이 다한 부무의 군대가 뒤로 물러나려 할 때 3만 전진군대가 부무를 습격했다. 부무의 진주방면 반란군은 이 일격으로 격파되었다. 부무는 부쌍이 웅거하고 있는 서쪽 상규(감숙성 천수)로 도망갔다. 왕감은 군대를 이끌고 상규로 진격하여 부쌍과 부무를 체포하고 참수했다.(AD368년7월) 

 

진주방면 반란군을 토벌하는 사이 부류가 이끄는 옹주방면 반란군 2만이 장안을 공격했다. 등강은 7천의 군사로 이들을 격파했다. 장안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부류는 잔당을 이끌고 퇴각했는데 왕맹이 추격하여 그들의 근거지 포판(산서성 영제현)마저 함락시키고 말았다. 부류도 이 때 목이 날아갔다(AD368년9월).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섬성이다. 부견은 왕맹휘하 전군을 보내 섬성을 포위했다. 왕맹은 부수를 생포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부견이 물었다.

 

  “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부수가 대답했다.

  “ 신은 본래 반란의 의사가 없었습니다만

    형과 동생들이 여러 번 모의하고 종용하니

    죽을 것이 두려워 참여했을 뿐입니다.

 

부견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너는 평소에 어른다운 사람이었으니

    진실로 너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번 사안은 사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님을 네가 잘 알 것이다.

    다만 고조(부건. 부견의 큰 아버지이고 부수의 아버지)의

    후사가 끊어져서야 되겠느냐.“

 

부견은 마침내 부수에게 죽음을 내렸지만 그의 일곱 아들은 모두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 장자에게는 부수의 후사를 잇게 하였고 나머지 아들들은 후사가 없이 이번에 죽은 부씨들의 대통을 잇도록 배려해주었다. (AD367년) 

 

 

[그림] 하(夏:AD407-AD431)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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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7월12일 17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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