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10K: 3대 인재에도 멸망한 후진(後秦)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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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요흥의 무리한 독발녹단 공략(AD408)
유발발은 남량의 독발녹단에게 혼인관계를 맺자고 제안했다.(AD407년11월) 독발녹단이 거절하자 화가 난 유발발이 2만 기병으로 지양(감숙성 영등)을 공격하여 1만 명을 죽이고 약탈해 갔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의 군대를 추격하였으나 유발발의 작전에 말려들어 또 다시 크게 패하였다. 겁에 질린 독발녹단은 변경에 수도 주변 300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수도 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제로 수도로 이주당하여 불만이 쌓인 사람들을 규합하여 성칠아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실패하고 말았다.
요흥은 안팎으로 어려운 독발녹단의 남량을 흡수할 생각을 품고서 상서령 위종(韋宗)을 무위에 보내 염탐을 시켰다. 무위에서 독발녹단과 오랫동안 예기를 나누었던 위종이 나오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 기이한 영재와 영특한 인물이
화하(華夏,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밝은 지혜와 명석한 지식이
반드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구주(구주) 바깥과 오경 밖에도
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발녹단의 재주에 놀란 위종이 돌아와 요흥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보고했다.
“ 남량왕국이 비록 피폐하긴 했어도 아직 도모할 수 없겠습니다.”
요흥이 이렇게 되물었다.
“ 아니 유발발은 그 까마귀 떼 같은 무리들로도
독발녹단을 궁지에 몰수 있었는데
나와 같은 천하 대군을 가진 사람이 그를 처단하지 못한단 말인가?“
위종이 말했다.
“ 형세가 변하고 뒤집어지는 경우는
천만가지가 넘습니다.
남을 깔보는 자는 반드시 패하고
남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에게 패한 것은
그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독발녹단이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군의 천만대군을 가지고도 이기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요흥은 위종의 충간을 듣지 않았다. 아들 요필과 염성 걸복건귀 등의 장수와 함께 3만 군사를 보내 독발녹단을 공격하고 동시에 좌복야 제난을 시켜 2만 기병으로 유발발을 공격했다.
이부상서 윤소가 요흥을 막아섰다.
“ 차라리 북량의 저거몽손과 서량의 이고에게 명하여 남량의 배후를 공격함만 못합니다.”
요흥은 이 또한 듣지 않고 독발녹단에게 기만하는 편지를 썼다.
“ 제난을 보내 유발발을 토벌시켰다.
유발발이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요필에게 군사를 붙여서 하서회랑(난주-무위-장액-주천을 잇는 길)
그쪽으로 보내니 그대는 그렇게 알아라.“
독발녹단은 요흥의 편지를 곧이곧대로 믿고서 대비하지 않았다. 요필의 부하 강기가 군사 5천을 요구하면서 급습하자고 건의했지만 요필은 듣지 않고 정산 속도로 무위로 다가갔다. 요필의 군대가 무위로 들이닥치자 독발녹단은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전투가 지루하게 계속되자 무위 성안에서 내부반란의 기미가 있었으나 독발녹단은 반란무리 5천명을 전원 매몰시켜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독발녹단은 성안에 있는 양과 소를 모두 성밖으로 풀어 내 보냈다. 후진 장군 염성이 병사를 풀어 양소무리를 잡게 했는데 이 틈을 타고 독발녹단의 군사들이 뒤를 공격하여 요필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7천명의 후진 병사의 목이 이 때 달아났다. 요흥은 요현에게 2만 기병을 붙여서 패전한 요필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나 요현 또한 독발녹단에게 패했다. 요현은 패전의 책임을 염성에게 묻고 독발녹단에게 사과하고 철군했다. 독발녹단 또한 사자를 후진에 보내 사죄했다. 후진과 남량이 다시 화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 AD409년에 독발녹단은 독립을 선언한다.
(68) 요충의 반란 시도와 요흥의 하나라 유발발 공격실패(AD409-AD410)
서쪽으로 독발녹단, 그리고 남쪽으로 유유와 화친한 요흥은 이제 마음놓고 북쪽의 유발발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생 요충과 장수 적백지에게 4만 기병을 주어 유발발 공격을 지시했다. 하루 길을 가서 영북(섬서성 예천)에 도착한 요충은 거꾸로 장안을 공격할 생각을 부하 장수들과의 논했다. 적백지가 반대하자 그 자리에서 독을 먹여 죽였다. 요충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요흥은 요충에게 죽음을 내렸다.
하의 유발발이 기병 2만으로 후진의 평양(감숙성 화정)을 공격하고 주민 7천을 약탈한 뒤 의역천(감숙성 화정현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후진 요흥은 유발발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이성(섬서성 황릉)으로 나아갔다. 유발발은 기병을 거느리고 요흥을 먼저 공격했다. 요흥의 군사가 대패하여 장안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요흥이 유유의 공격을 받는 남연의 모용초를 돕기 위해 보낸 한범과 요소도 유유에게 패하였다. 요흥의 후진군은 북쪽, 서쪽 그리고 동쪽에서 모두 패한 셈이다. 끝까지 항전하던 모용초의 남연은 그 다음해(AD410)에 유유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요흥이 패퇴하자 유발발은 강력한 기병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후진의 북쪽 변경 평량(감숙성 화정)과 정양(섬서성 의천현)을 노략질해 들어왔다. 요흥은 군사를 이끌고 직접 유발발을 맞아 싸웠지만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유발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을 감당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69) 요흥의 인재 천거명령(AD411)
계속해서 쳐들어오는 유발발의 공격을 막지 못한 요흥은 자신의 통치가 부족해서 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국의 인재를 천거해 올리도록 명령했다. 우복야 양희가 말했다.
“ 신이 여러차례 주상의 명령을 받았습니다만
마땅히 천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인재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요흥이 말했다.
“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나서는
훌륭한 재상이나 장수를 앉아서 기다린 적이 없었소.
때에 따라 적절한 인재를 뽑아서
일을 맡긴 뒤에야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는 법이요.
경은 스스로 인재를 선발하는 식견이 높지도 않은데
어찌 사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재감이 안된다고 서둘러 말하는거요?“
요흥의 이러한 훌륭한 말을 들은 신하들은 모두 기뻐하고 찬탄해마지 않았다.
(70) 후진 양불숭의 패전(AD412)
구지(감숙성 서화)공 양성이 후진 요흥을 배반하여 후진의 땅을 침범하였다. 요흥은 조곤을 선봉으로 삼고 요백수가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전장군 요회는 감숙성 성현 북쪽, 요숭은 천수, 그리고 호익도는 견성(섬서성 농현)에서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요흥 스스로도 섬서성 봉상에서 출병하여 농구(감숙성 청수)에서 도착하였다.
천수태수 왕송충이 주군 요숭에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황제(요장)의 신묘한 전략은 예측할 수가 없었고
서락생이 뛰어난 무용으로 왕명을 보좌하여 다시 구지로 진입했으나
공로를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양씨의 지혜와 용맹이 아니라 험한 지세 때문에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조곤의 무리와 여러 장수들의 재주를 보면
지난 요장 황제에 비해 매우 뒤떨어지는데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어찌 표문을 올려서 그렇다고 보고를 하지 않으십니까?“
양성군과 조곤군이 싸웠으나 조곤이 크게 패하였다. 요흥은 패전한 요백수의 목을 베어버리고 돌아왔다.
요흥은 양불숭을 옹주(감숙성 진원)자사로 삼고 여러 주변 군사를 몰아서 유발발을 치도록 했다. 요흥이 이렇게 말했다.
“ 양불숭은 적을 볼 때마다
용맹함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흥분하므로
내가 군사를 조절하여 5천이 넘지 못하도록 하였소.
지금 그가 거느리는 너무 군사가 많은데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할 것을 어떡하면 좋겠소?“
요흥의 말대로 앵불숭은 유발발과 맞붙어 크게 패하였다. 유발발에게 사로잡히자 양불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1) 요흥 와병과 후진의 내분 : 요홍과 요필의 대립(AD414)
후진 요흥에게 병이 났다. 이 때 요흥(AD366-AD416)의 나이는 48세였다.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홍과 구상을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몰고 황릉까지 가서 역적구상의 목을 베고 이홍은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 때 태자 요홍은 좌장군 요문종을 총애하였는데 요홍의 동생 요필이 요문종을 싫어하여 요흥에게 요문종을 요망하다고 무고했다. 셋째 아들 요필을 매우 아낀 요흥은 요문종에게 죽음을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요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요흥은 요필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기밀을 취급하는 요흥의 핵심 측근은 모두 요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 요흥의 우복야 양희와 시중 임겸과 경조윤 윤소 등 조정 대신들은 요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 부자지간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군신지간의 일은
부자지간의 일에 비추어 가볍지 않으니
신들은 침묵하고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광평공 요필이 적자의 자리를 뺏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길거리에서는 폐하께서 조만간 태자 폐립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일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요흥은 깜짝 놀랐다.
“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양희 등이 다시 말씀을 올렸다.
“ 진실로 그런 일이 없으시다면
폐하께서 요필을 아끼시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의 주변 사람을 쫓아 내시고
그의 권세와 위엄을 조금 줄이는 것이
사직을 위해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흥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대사농 보온과 좌장사 왕필 등이 요필을 태자로 교체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요흥은 들은 척 하지도 않았다. 요필은 요흥의 병세도 그렇고 또한 요흥의 총애를 확신한 나머지 군사 수천을 모아 결사대를 꾸렸다.
요흥의 다른 아들 요유는 공공연한 요필의 반란 계획을 지방에 나가 있는 형님들에게 알렸다. 포판에 있던 요의(요흥의 둘째 아들), 낙양에 있는 요광(넷째), 봉상에 있는 요심(여섯째) 등이 군사를 훈련하며 장안의 요필 토벌계획을 세웠다. 요흥의 병문안을 온 정로장군 유강이 요흥에게 여러 황자들의 반란계획을 보고해 올렸다. 양희와 윤소는 거듭해서 요필을 죽여야 한다고 간청하면서 말했다.
“ 진정으로 죽이지 못하시겠다면
그의 지위와 권세만이라도 박탈하셔야 합니다.“
마지못한 요흥이 요필의 상서령 직을 뺏고 평장군과 공작의 직위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요흥의 지시를 들은 요의 등 요흥의 여러 아들들은 군사를 풀고 토벌계획을 접었다. 강규와 양희는 요필과 반역무리를 더 멀리 쫓아내자고 권했지만 요흥은 대꾸하지 않았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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