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10H: 3대 인재에도 멸망한 후진(後秦)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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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후진 요장의 귀신 : 부견 모습의 목을 보냄(AD389)
당시 부등은 조나(영하 팽양 서쪽)에 주둔하고 있었고 요장은 천수 남쪽에 있었다. 서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후진의 군대가 번번이 전진의 부등에게 패하자 요장은 부견의 귀신이 전진군사를 돕는다고 믿었다. 전진에 있을 때 부견이 베푼 환대를 생각하면, 그리고 반란하지 말라는 아버지 요익중의 유언을 생각하면 부견의 목을 졸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에 깊이 시달렸다. 요장은 나무로 부견의 형상을 만든 다음 부견의 목조각 상에다 대고 절을 올리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 형님 요양께서 제게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신평(섬서성 빈현:여기서 부견을 목졸라 죽임)의 재앙이 일어난 것이지
제가 폐하께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부등은 폐하의 먼 친척(조카)인데도 저렇게도 복수심에 불타 있는데
하물며 친동생인 저야 어떻겠습니까?
또 신에게 용양장군으로 대업을 이루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페하를 위해 형상을 세웠으니
노함을 푸시고 신을 책망하지 마시옵소서.“
이런 사과에도 불구하고 전과가 나지 않자 화가 난 요장은 나무형상의 목을 자른 다음 부등에게로 보냈다. 부등은 두충과 양정 등 제장들에게 명하여 후진총공격을 명하고 장안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AD389년10월) 부비의 잔존 세력들을 부등이 모두 규합했다.
(49) 부등의 안정공격 패배와 요장의 겸양(AD391)
AD391년 12월 전진의 부등이 안정(감숙성 진원 동남)에서 후진을 습격했다. 요장은 직접 음밀(감숙성 영대)로 가서 부등을 막으면서 장안을 지키는 태자 요흥에게 지시했다.
“ 구요가 반드시 장안을 엿보고 알현 들어 올 것이니
기다렸다가 그를 잡아 죽이라.“
안정에서 요장은 부등을 격파했다. 부등은 군사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부하들이 요장을 칭찬하자 요장은 죽은 형님 요양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형님보다 못한 것이 네 가지다.
키가 8척5촌이 형님의 키를 못 따라감이 첫째고,
10만 대군을 휘몰아치면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을 못 따라감이 둘째요,
배워서 익힘과 도와 예를 행함과 영재를 거두고 모으는 것에 못 따라감이 셋째요,
통솔함에 있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하게 하는 것을 못 따라감이 넷째다.
모든 것에 부족하기 때문에 늘 많은 인재를 모으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계산하고 책략을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는지
항상 반성하며 살아 온 것이 오늘의 내가 있게 된 이유이다.“
(50) 부등의 관중세력 회복(AD392)
후진 창업자 요장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태자 요흥을 곁으로 불렀다. 정남대장군 요방성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부곡, 즉 휘하의 여러 무장 세력을 모두 제거해야 위협이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 말에 따라 태자 요흥이 왕통, 왕광, 부윤, 서성, 모성 등 강력한 부곡을 모두 제거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병상의 요장이 외쳤다.
“ 왕통 형제는 고향 사람이다.
실로 다른 뜻이 없고
또 서성과 모성과 부윤도 전진의 유능한 장군인데
그들을 죽이면 장차 어떻게 전쟁을 치를 셈이냐!“
요장의 와병 소식을 들은 부등은 크게 기뻐했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군사를 모아 지난 번 뺏긴 안정을 향해 진격했다. 요장이 건강에 차도가 있어서 요희융을 파견하고 부등의 공격을 막았다. 부등이 탄식했다.
“ 도대체 저 요장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나오면서도 모르게 나오고 느끼지도 못하게 다가오는가.
그가 죽었다 하더라도 다시 나타날 것 같으니
짐은 이 무서운 강족과 같은 하늘에서 산다는 쟁앙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요장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관중 전역으로 번지자 후진에게 복속했던 많은 무리들은 다시 전진의 부등에게로 투항했다. 이로써 부등은 손쉽게 관중 전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51) 전진 두충의 무모한 요구와 부등의 공격(AD393)
부견이 사망하고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전진이 부등에 의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해 나갈 때 우승상 두충이 무리한 요구를 해 왔다. 자신을 천수왕으로 책봉해 달라는 것이다. 아직 전진의 강토를 다 회복한 것도 아니고 요장의 후진과 치열하게 각축하는 형편에 사실상 나라를 떼어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요구였다. 부등은 거절했다. 두충은 자신의 세력을 몰아서 부등과 결별하였다.
부등은 곧바로 야인보(섬서성 포성)에 주둔한 두충을 공격했다. 두충은 후진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요장의 측근 윤위는 태자의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요흥을 파병하라고 독촉했다. 요장은 그의 말대로 따랐다. 요흥이 군대를 이끌고 부등의 배후를 공격했다.부등은 두충에 대한 포위를 풀고 요흥에 맞대응하기 위해 돌아섰다. 요장은 요흥에게 즉시 돌아와 장안을 수비하라고 명했다.
(52) 요장의 유언(AD393년 )
병이 다시 심해지자 요장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태위 요민, 복야 윤위, 요황, 요대목 및 상서 적백지 등 조정 중신을 불러 유조를 남겼다. 그리고 태자 요흥에게 당부했다.
“ 여기 있는 여러 공들을 헐뜯는 사람이 바깥에 있거든
신중히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말아라.
너는 은혜로 골육을 어루만지고,
예의로써 대신들을 존경하며,
믿음으로써 모든 일을 대하고,
어짊으로써 백성들을 만나라.
이 네 가지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걱정거리가 없을 것이다.“
복야 요황이 울면서 부등을 깨뜨릴 계책을 묻자 요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 지금 대업은 다음 대에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요흥의 재주와 지혜가 충분한 데 어찌해서 다시 묻는가?“
요장이 죽었다. 64세 였다. 요흥은 아버지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숙부 요서에게 안정(감숙성 진안), 요석덕에게 음밀(감숙성 영대), 아우 요숭에게 장안을 지키도록 맡겼다. 어떤 사람이 요석덕에게 권하기를 요흥이 장차 죽일지도 모르니 군대를 이끌고 진주(감숙성 천수)로 피했다가 사태 추이를 살피라고 하자 요석덕이 이렇게 말했다.
“ 태자 요흥은 뜻이 밝고 도량이 넓으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또 부등이 살아있는데 서로 다툰다면 스스로 망하는 길일 뿐 입니다.
죽기로 작정한다고 치더라도 그런 못난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
(53) 부등의 웃음과 교만한 남진(AD394)
부등은 요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날아갈 듯 기뻤다.
“ 요장의 아들 요흥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장차 나뭇가지로 그의 볼기를 칠 것이다.“
이 때 요흥의 나이는 스물일곱, 부등은 쉰이었다. 부등은 부광에게 수도 옹(섬서성 봉상)을 맡기고 군사를 몰아 동쪽으로 내려왔다.(AD394년1월) 부등의 군사가 폐교(섬서성 흥평)에 도달하자 후진의 요상이 전진군대를 막았다. 요흥은 윤위를 보내 요상을 지원했다. 위수를 두고 전진군대와 후진군대가 크게 전투를 벌였으나 전진이 크게 참패했다. 부등은 홀로 옹(섬서성 봉상)으로 달아났는데 봉상에 있던 태자 부숭 또한 패전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봉상에 아무도 없자 부등은 잔당을 이끌고 북쪽 평량쪽으로 갔다가 영하자치구 고원의 마모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부등은 아들 부종을 하남왕 걸복건귀(나중에 西秦의 2대 제왕)에게 인질로 보내고 구원을 빌었다. 걸복건귀는 걸복익주에게 1만 군사를 주어 부등을 도왔다. 전진과 서진 연합군은 후진 요흥과 안정(감숙성 진원)에서 결전을 펼쳤다. 부등이 이 전투에서 사로잡혀 죽었다.(AD394년7월) 아들 부숭이 황중(청해성 서녕)으로 달아나 황위를 이었지만 석 달 뒤 서진의 걸복건귀 군사에게 전사했다. 이로써 전진은 완전히 소멸되었다.(AD394년 10월)
(54) 후진과 후연의 우호연대(AD394)와 참합피 전투(AD395)
요흥의 사람됨이 범상하지 않은 것은 요석덕의 평가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후연하고 연대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당시 후진은 북쪽으로 북위와 영토를 다투고 있었는데 북위가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으므로 북위의 배후에 있는 후연과 연대를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후연 또한 북위와 국경을 접하는 상황에서 후진과 연합하면 방위에 훨씬 유리한 면이 있었다. 후진과 후연 모두 원교근공의 전략이 서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남하하는 북위와 지난 해 서연을 병합하면서 팽창하려는 후연의 싸움은 불가피했다. 선공은 북위가 먼저 일으켰지만 후연의 모용수는 국력을 동원해 북위 반격에 나섰다. 8만 대군 후연의 선봉에는 모용수의 아들 태자 모용보가 나섰다. 전투는 내몽고 포두에서 일어났다. 후연의 모용보 군사는 북위 탁발규 군사에게 연전연패했다. 부하 장수들은 주군 모용수가 와병 중이니 퇴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지만 모용보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일단 군사를 추슬러 포두 동쪽 참합피(산서성 양고)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AD395년11월) 겨울 폭풍이 불고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황하까지 얼어버리자 퇴각하는 후연군대는 전투한번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동상으로 죽어나갔다. 탁발규가 직접 인솔하는 10만의 대군은 배나 빠른 속도로 후연의 배후를 공격해 들어갔다. 태자 모용보는 단기로 도망쳐 나왔고 10만 대군은 전멸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내년에 더 큰 대군을 가지고 북위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모용수는 다음해(AD396년) 출병 중에 71세로 병사한다. 태자 모용보가 즉위하지만 이때부터 후연은 수세에 몰리고 북위가 세력을 뻗어나가게 된다.
(55) 후진 요흥의 동진과 선정(AD397)
AD396년 후연을 계승한 모용보의 무능력이 드러나면서 후연 조정은 후계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심각한 반란과 반역의 혼란에 휩싸인다. 그 틈을 타고 북위는 무서운 기세로 동진과 남하해왔다. 후연의 핵심 근거지인 중산(산서성 정주)가 함락되고 후연의 황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갔다. 후연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후진 차례다.
이런 와중에 요장과 요흥의 어머니 사(蛇)씨가 죽었다. 요흥은 충격에 빠지고 슬퍼하는 것이 예를 넘어서 모든 정치를 내팽개쳤다. 여러 신하들이 한나라와 위나라의 예에 따라 장례를 후히 치르고 즉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정사를 제대로 돌 볼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상서랑 이숭이 상소를 올렸다.
“ 천하를 효를 기초로 다스림은 지극히 훌륭하신 일입니다.
이미 장례가 끝났으니
평복으로 갈아 입으시고 조회를 받으십시오“
윤위가 이숭을 논박하면서 말했다.
“ 이숭은 고례를 어기고 예를 무시했으니
엄하게 벌을 내려야 합니다.“
요흥이 이렇게 답했다.
“ 이숭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효자고 충신이다.
그가 내게 조회를 권한 것은
그만큼 국사가 중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충언이다.
내 그의 말을 듣고 곧바로 조회에 임할 것이니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요흥은 곧바로 군사를 몰아 동쪽 호성(하남성 영보)으로 진군했다. 요흥의 대군이 몰려오자 홍농(영보 동쪽)과 화산(하난성 화현)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왔다.(AD397) 요흥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려고 매우 노력했고 신하들의 간언을 흉금열고 받아 들였다. 이 대 등용한 인재가 뛰어난 행정가이자 전략가인 두군과 높은 유학자 강감과 강직하고 덕행으로 유명한 고성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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