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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14 : 고비의 흉노바람, 북량(D)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3월21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3월18일 17시5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6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6) 북량 저거몽손의 역쿠테타(AD401) 

 

북량왕 단업은 용렬한 서생에 불과했다. 정치가 매끄럽지 못했고 군사는 형편없었다. 처음부터 단업을 도와 나라를 일으킨 공신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북량의 인심과 실세는 흉노족인 저거씨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그 핵심에 저거몽손(AD368-AD439)이 있었다. 자기에게서 민심이 차츰 멀어지는 것을 느낀 단업은 저거몽손을 제거할 생각이 굳어져 갔다. 평소 저거몽손을 멸시하고 모욕하던 문하시랑 마권을 수도 장액태수 저거몽손의 후임으로 갈아치우려고 했다. 저거몽손은 주군 단업에게 마권의 부적절함을 고해바쳤다.

 

 “ 천하에 근심해야 할 사람은 오직 마권 뿐 입니다.”   

 

용렬한 단업은 겁에 질려 저거몽손 그 한마디에 마권을 죽여 버렸다. 저거몽손이 사촌 형 저거남성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 단공은 분별력과 결단력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혼란을 다스릴 능력도 없고 통솔력도 없습니다.

   단업에게 충성하던 색사와 마권이 제거되었으니

   이제 제가 일어나 그를 제거하고 형님을 세우려 합니다.“

 

저거남성이 이렇게 대답했다.

 

 “ 원래 단업은 외로운 나그네에 불과했다.

   우리 집안이 추대하였으므로 

   우리 형제 믿기를 물 속 고기와 같이 했었다.  

   우리를 그렇게 믿는 사람을 도모하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

 

힘을 합쳐서 단업을 제거하려고 생각했던 저거몽손은 사촌 형 저거남성의 생각이 다른 것을 알고 내심 많이 놀랐다. 단업 만큼이나 순진하고 용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거몽손은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다. 일단 자진하여 서안(감숙성 산단현) 외지로 나가겠다고 자원했다. 단업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저거몽손은 사촌 형 저거남송과 같이 난문산에서 석별의 제사를 지내자고 제안했다. 저거남송은 순진하게 그렇게 하기로 액속했다. 저거몽손은 몰래 사마 허함을 시켜서 단업에게 알리도록 했다.

 

 “ 저거남성이 날을 잡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만약 난문산에서 제사를 지내겠다고 보고하면 

   그것이 반란의 시작인줄 아십시오.“

 

며칠 뒤 정말로 저거남성이 단업에게 난문산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알려왔다. 단업은 죽각 군사를 보내 저거남성을 잡아들였다. 억울한 저거남성이 단업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저거몽손이 전에 반란을 일으키자고 했지만 인륜을 들어서 제가 반대했습니다.

   다만 제 동생이 한 일이라서 감추어 두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있으므로 부하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한 저거몽손이

   저를 죽이고자 이런 계략을 세운 것이 분명합니다.

   왕께서는 제가 죽었다고 거짓으로 말한 다면

   저거몽손은 저의 죽음을 핑계로 대고 분명히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 때 저를 보내시면 분명히 반란은 실패할 것입니다.“

 

단업이 그 말을 믿지 않고 저거남성을 죽였다. 저거몽손이 울면서 무리들에게 말했다.

 

 “ 끝없는 충성심으로 단업을 보필하였으나

   형님 저거남성을 이유없이 죽였다. 

   제군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누가 갚겠는가? “

   처음에는 나라 위세가 미약하였지만 

   이제는 단업과 같은 용렬한 군주가 해결할 수 없으리만치 나라가 커졌다.“

 

저거남성은 평소 군사들의 민심을 깊이 얻고 있던 터라 만 명 이상이 몰려들어 복수를 외쳤다. 그 위세에 눌린 여러 장수들과 강족, 호족들이 저거몽손에게 귀순해 왔다. 단업은 우장군 전앙에게 저거몽손을 방어할 것을 요청했으나 전앙은 부대를 이끌고 저거몽손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단업의 거의 모든 수하 장수들이 저거몽손에 귀순하자 수도 장액은 그냥 허물어졌다. 단업이 저거몽손에게 당부했다.

 

 “ 나는 혈혈단신이요.

   그대 가문에서 추대 받아 이까지 왔으니 내 목숨을 구해주어 

   동쪽으로 가서 가족을 보게 해 주시오.“

 

저거몽손은 즉시 단업의 목을 베었다. 사마광은 단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 단업은 유학자로써 평소에 어른스럽고 의젓했다.

   그러나 권모와 책략이 없고 법에 위엄도 없어서

   부하들의 기강이 무너졌고 해이해 졌다.

   게다가 무당과 점(무격,巫覡)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에 패배에 이르렀다.

   (자치통감 권112)“

   

저거남성의 아들 저거부점과 친척 저거구뢰는 군사를 이끌고 남량의 독발이록고에게 항복했다. 양중용 등 저거몽손의 부장들은 저거몽손의 인물됨과 리더십을 인정하여 대도독으로 추대했다. 저거몽손은 대사면령을 내리고 중요 직책에 측근과 친척을 배치했다. 저거몽손이 북량을 완전히 장악한 셈이다.

 

(17) 후량 여륭의 공포정치와 실덕(AD401)

 

4대 후량왕 여륭은 호방하고 영리하며 명망있는 인재들을 많이 죽여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했다. 세상은 두려워 떨었고 틈만 있으면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고 했다. 초랑이라는 사람이 후진의 농서공 요석덕에게 사람을 보내 유세했다.

 

 “ 여씨는 무황제(여광)이 죽으면서 형제가 서로 헐뜯고 싸우고 있습니다.

   정치는 흐트러지고 강령은 세울 생각도 않고 있어서

   폭정으로 죽은 백성은 절반이 넘습니다.

   지금을 틈타면 나라를 빼앗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습니다.“

 

요석덕은 진왕 요흥에게 말하여 즉각 보병과 기병 6만을 동원하여 후량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후진에 망명 와있던 걸복건귀는 기병 7천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18) 후진의 후량 고장 포위(AD401)

 

6만 대군의 후진 요석덕이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했다. 광무(감숙성 영등)의 독발이록고는 후진 대군을 피해 물러났다. 고장에 있는 후량의 방어군은 여초와 여막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요석덕군에게 참패하였고 여막이 이 때 사로잡혔다. 여륭은 견고한 고장성을 지키며 버티고 있었다. 파서공 여타는 2만 5천 군사를 가지고 후진 요석덕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강력한 줄 알았던 후량이 후진의 공격에 어이없이 무너지자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후진에게 복속해 들어왔다. 이고의 서량, 독발이록고의 남량 그리고 저거몽손의 북량이 한결 같이 후진에 충성을 맹세했다.    

  

(19) 후량 여륭의 후진 항복(AD401)

 

후진의 요석덕이 고장(감숙성 무위)을 포위한 지 여러 달이 되자 고장 성 안에 있는 동쪽 사람, 즉 고향이 중원지역인 사람들이 성 내에서 반란을 일으킬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 중심에 위익다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모아서 주군 여륭과 여초를 죽인 다음에 후진에게 항복하자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이 드러나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 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요석덕은 성내에 있는 여러 이민족을 꾀어 소동을 부추겼으나 성내 결속력이 더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곡식을 아끼고 숨어있는 양식을 모아 끝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성내 여러 신하들은 후진과의 화의를 재촉했지만 여륭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안정공 여초가 나섰다.

 

 “ 지금 비축해 둔 양식이 거의 고갈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위아래가 불안해하며 시끄럽고 소란합니다.   

   장량과 진평이 다시 태아난다 한 들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계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임기응변하셔서 태도를 바꾸시고 굽히셔서

   모두의 안위를 생각하셔야합니다.

   어찌 한 장의 쪽지와 한 사람의 사신으로써 적을 물리치고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마다하십니까?

   적이 물러 간 이후에 덕치를 하셔서 백성을 편히 쉬시게 하시면

   예전의 대업이 어찌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무작정 웅크리고 있으면 장차 모두가 사라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륭이 마침내 여초의 말을 따라 후진 요흥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의 의사를 전달했다. 요석덕은 요흥에게 청하여 항복을 요청한 여륭에게 진서대장군, 양주자사, 건강공으로 삼게 하였다. 여륭은 아들, 아우 및 측근 신하 50여 가문을 인질로 삼아 장안으로 보냈다.

 

(20) 후량의 마지막 항거 투쟁(AD401)

 

여륭이 인질을 보내 후진에게 항복하자 후진 주력부대는 뒤로 물러났다. 후진의 장수 강기의 2천 군대가 무위를 지키고 있었다. 여초가 강기를 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여초가 다시 후진 장수 초랑을 공격하자 초랑은 조카 초숭을 독발이록고에게 인질로 보내고 남량에 항복의 뜻을 전달했다. 독발이록고는 독발녹단을 보냈는데 그 즈음에 이미 여초는 퇴각하였고 초랑 또한 변심하여 독발녹단을 영접하지 않았다. 화가 난 독발녹단이 초랑을 공격하려하자 측근 독발구연이 말렸다, 조금 있으면 양식이 떨어진 초랑이 저절로 성을 버리고 나올 것이니 서두를 것 없다는 것이었다. 독발녹단이 그의 예기에 수긍하고 겉으로 초랑과 연대하기로 했다.

 

여초가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짐작한 독발녹단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습격을 기다렸다가 반격하여 여초의 장수 왕집 군사를 격멸시켰다. 여륭은 여초가 곳곳에서 패하자 독발녹단에게 화평의 뜻을 전달해왔다. 독발녹단은 독발구연을 화평 맹약의 사자로 보냈다. 독발구연은 매복군사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여륭의 궁성으로 들어가자마자 담벼락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정말로 복병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복병의 습격을 받고 독발구연이 자신의 말과 수하들을 많이 잃었지만 심복부하 곽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독발녹단이 화가 나서 곳곳의 후량의 거점 현미(감숙성 영창현 동쪽)을 공격하여 태수 맹의를 체포했다. 독발녹단이 맹의를 심하게 꾸짖자 맹의가 이렇게 답했다.

 

 “ 저 맹의는 여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밝으신 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횃불을 들고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고 말았다면 돌아가서 죄를 얻을 것이 두려워 끝까지 싸웠습니다.“

 

독발녹단이 그의 충성심을 보고 예우하여 2천호를 붙여 주고 좌사마에 임명하려 하자 사양하며 말했다.

 

 “ 여씨가 장차 멸망하면 

   독발씨가 조정의 황하 우측(하서지역)을 점령할 것입니다.

   저같이 능력 없는 자가 현미성을 감당하지도 못했는데

   다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다면 마음히 편치 않을 것입니다.

   만약 밝으신 공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서 

   고장(감숙성 무위, 후량의 도읍)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거기서 주륙되더라도 깨끗한 명예는 썩지 않을 것입니다.“ 

 

독발녹단은 그의 충성심과 공명심에 크게 감동을 받아 그의 소망대로 고장으로 돌려보냈다.

 

(21) 저거몽손의 후량 수도 고장 공략 실패 (AD402)

 

비록 후진 군사들은 물러갔지만 고장의 형편은 극도로 나빴다. 큰 기근이 들어서 쌀 한말 가격이 5천전이었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으며 굶어 죽은 사람만도 10여만 명이나 되었다. 성문을 낮에도 닫았으므로 나무하는 길이 끊겼고 굶다 못해 몰래 성 밖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여륭은 그런 사람 도망자들을 잡아서는 파묻어 죽였는데 길에는 버려진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북량의 저거몽손은 이 때야 말로 고장을 빼앗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거몽손이 군사를 이끌고 고장을 급습하자 여륭은 급히 남량의 독발이록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독발이록고는 기병 1만 명을 동생 독발녹단에게 주어 파견했는데 여륭이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저거몽손의 군대를 이길 수가 있었다. 패전한 저거몽손이 여륭에게 쌀 1만 여곡을 주고 화해를 요청했으므로 여륭은 얼른 그 제의를 받고 화전했다. 여륭이 이미 전쟁을 끝냈다고 하자 독발녹단은 중산기상시 장융의 제안을 받아들여 위안을 점거하고서 후진과 내통하는 초랑을 토벌했다. 초랑은 독발녹단의 대군에 항거할 기력이 없자 면박하고 투항했다. 독발녹단은 그를 용서하고 수도 서녕으로 송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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