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근성의 일본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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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근성이란
노예근성이라 하니 비하발언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은 일본 ‘의회정치의 아버지’ 또는 ‘헌정(憲政)의 신’이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씨가 『민주정치독본』(1947년)에서 ‘일본병’을 지적하며 한 말입니다. 노예근성이라 함은, ‘누군가가 어떻게든 해 줄 것이라며 오로지 타인의 힘에 의존하여 구제받으려 하고, 스스로 자신을 찾아내려는(구제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근성’을 말합니다(p.62).
제가 노예근성이라는 말을 꺼내는 이유는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오자키 씨의 통찰에 공감이 가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인들의 노예근성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서 2015년 9월 국회(참의원)를 강행통과한 신 안전보장 관련법은 자위대의 활동범위 확대와 더불어 일본이 타국을 공격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습니다. 동법 마련 과정을 예로 들어가며 일본인의 노예근성을 살펴볼까 합니다.
미국 환심사기
메이지(明治)유신(1868년) 이후 일본의 의회정치 형성을 지켜봐 온 오자키는 일본인들의 마음가짐에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아무런 정치적인 힘도 주어지지 않았던 봉건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지금의 일본인은 그러한 무력한 노예가 아니다. 제대로 사용하면 어떠한 정치적 개혁이라도 이룰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다른 사람의 힘에 의존하려는 노예근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도 여차하여 막다른 골목에 처하면 미국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며 금방 매달린다”(위의 책, p.62)고 일침을 놓습니다.
최근 들썩거린 일련의 안보관련법은 이미 2015년 4월말 아베 수상의 미국 방문 때부터 예상되고 있었습니다. 일본 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라고 미국이 멍석을 깔아 주자, 들뜬 아베는 신 안보관련법을 성취시키겠다며 미국의 환심사기에 나섰습니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군사위협을 미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합세하여 견제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4월 29일의 미의회 연설에서, “이는(신 안보관련법 마련은) 전후 역사에서 처음 이루어지는 대개혁입니다. 이번(2015년) 여름까지 이를 이루겠습니다. (This reform is the first of its kind and a sweeping one in our post-war history. We will achieve this by this coming summer.)”라고 덜컥 약속하고 돌아왔습니다.
일본국민 다루기
국내에서 국회 심의도 하기 전에 안보관련법을 갖추어 놓겠다고 아베 수상이 선언한데는 능구렁이같은 정치 술수가 숨어 있습니다. 여당인 자민당 의원들은 공천권을 쥐고 있는 자신(총재)의 의도를 거역하지 못할 것이고, 여당이 다수이니 야당 반대는 밀어붙이면 될 거라는 속셈이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아베 정권은 어떻게든 안보관련법안을 통과시킨다는 ‘일단 채택’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중세 무사정권 때부터 규범따르기에 익숙한지라 정해진 규범은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수렴되는 성향을 갖습니다. 아베 수상도 ‘때가 지나는 가운데 안전보장 법제에 대한 국민적 이해가 넓어져갈 거라 확신하고 있다(9월 25일 기자회견)’는 자신을 보였습니다. 정해놓은 규율에 잘 복종하는 국민들임을 감각적으로 익히 알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삶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라 정권 중추를 향해 성내거나 대들지 못합니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대다수가 안보법안 ‘통과반대’라는 결과를 보였지만 성난 파도같은 대중의 물결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체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노예근성이 아직도 깊이 남아있다고 하겠습니다. 먹어보지 않은 어느 맛난 음식을 두고 ‘이거 맛있어! 맛있어!’ 해도 깊숙한 참맛이 와닿지 않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중요해! 중요해!’ 강조해도 겉으로 그러려니 할 뿐 피부속 깊이 느끼지는 못합니다. 앞으로 안보법의 행사는 고무줄 법률처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적용해 갈 것으로 보입니다.
국면 전환의 연출
70%의 국민이 안보관련 법안 강행통과를 반대하였던 터라 법안 성립 후엔 정권지지율도 많이 하락하였습니다. 정치가는 지지율 하락에 아주 민감한 직업입니다만, 아베 수상은 국면 전환에 능한 정치가입니다. 일본어에 ‘목구멍만 지나가면 뜨거움을 잊는다’라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떠들썩하던 일도 그때가 지나면 금방 잊혀짐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일본인들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아는 아베 수상입니다. 그가 2015년 9월 24일 무투표로 자민당 총재로 재선되고 나서 국면 전환용으로 바로 빼어든 카드가 ‘아베노믹스 제2막(stage)’입니다.
아베노믹스 제1막에서 들썩였던 ‘금융완화, 재정출동, 성장전략’이란 구호를 대신하여, 제2막에선 ‘희망을 자아내는 강한 경제’, ‘꿈을 엮는 자녀양육 지원’, ‘안심으로 이어지는 사회보장’을 내세웠습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니 ‘자위대 활동범위 확대’니 하는 딱딱한 안보관련법 언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씻고, 국민정서에 호소하는 형용사를 붙여 부드러운 이미지를 연출하려 합니다. ‘위’에서 자신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아 주고 있다는 ‘감싸안기 전략’이 일본인들한테는 잘 먹힙니다.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따돌림당하는 것을 엄청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열도를 벗어나면 위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점령하겠다고 나섰다가 미국한테 된통 당했습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지배를 받았던 미국한테는 오키나와(沖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는 멍텅구리같은 추종이 있습니다. 노예근성을 발휘하며 일본안에서 만족스럽게 사는 삶을 옆에서 무어라 간섭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보편성을 갖지 못하는 노예근성의 여파가 일본열도를 벗어날 때입니다. 그 노예근성의 자국논리를 상대방에 적용하거나 강요하려 할 때 갈등과 분쟁의 씨앗으로 자라날 위험성이 도사립니다.
일본에는 학식이나 양식이 출중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지 못하고, 개인이 전체나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일본만만세’ 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행여 일본이 전쟁에 가담하는 기회가 오면,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로 무장하여 국민 복종의 올가미를 더욱 조일 것입니다. 지난 전쟁에서도 일본 국민은 군부권력에 눌려 숨막혀 지냈습니다. ‘노예근성의 전체주의’가 일본의 잠재적 정체성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정체성은 그런가 보다 싶은데 한국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을 흉내낼 필요는 없고 지피지기(知彼知己)의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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