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의 제왕 - EBS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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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의 정책보고서 <시대변화에 따른 대입제도 개선방안>은 수능시험과 EBS교재를 연계하는 정책이 학교교육에 ‘파행’을 초래하고 수능의 ‘타락’을 불러왔으며 수능을 퇴보한 학력고사로 ‘별질’시켰다고 비판한다.
나로서는 참으로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없는 보고서다. 수능-EBS 연계정책으로 인해 올해 내가 겪어야 하는 곤란함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올해 나는 학교에서 고3 담임을 맡아 고3 수업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수능-EBS 연계정책(이하 EBS연계정책)의 영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EBS교재를 수업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고3 교실에서의 수업이 대부분 수능 문제풀이수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EBS연계정책이 낳은 최근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수능시험이 생긴 이래 내내 계속 된 일이다. 당연히 그 이전의 학력고사 시대, 또 그 이전의 예비고사와 본고사 시대에도 고3 수업은 항상 그 당시의 입시에 대비한 문제풀이수업이었다.
물론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각 교과가 추구하는 학습의 본질을 크게 훼손한다. 교과마다 훼손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 국어와 수학 두 교과를 비교하자면 문제풀이수업이 학습의 본질을 훼손하는 정도는 국어 쪽이 훨씬 더 심각하다 - 그것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고3 교실에서 문제풀이 위주 수업을 벗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문제풀이수업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좀 더 나은 수업을 모색해 보는 것도 나름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이쯤에서 극단적인 질문을 한 번 던져보자.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은 무조건적인 악인가? 문제풀이수업으로부터는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전혀 없는가? 문제풀이수업을 하면 학생들이 바보가 되는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질문을 던져놓고 보니 무작정 그렇다고만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풀이수업은 무조건적인 악이 아니다.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을 통해서도 학생들은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는 창의력과 사고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우리의 기대에 현저히 미치지 못할 뿐이다. 이것을 대학의 학점에 비유해 말하자면 문제풀이수업이라고 해서 F학점은 아니라는 얘기다. A학점이나 B학점은 아니더라도 C학점은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같은 C학점에 불과하더라도 그 안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C플라스(+), C제로(0), C마이너스(-) 등으로 말이다. 문제풀이수업이 비록 C학점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수업이 가능하면 C마이너스 수업이 아니라 C플라스 수업이 되도록 해야 한다. 문제풀이수업일지언정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수업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문제의 질이다. 동일한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이라 할지라도 어떤 문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수업은 C플라스가 될 수도 있고 C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수능시험 패러다임 문제 중 최고의 문제는 어느 것인가? 사람마다 그 판단이 다를 수 있지만 입시수업을 해 본 사람들의 의견은 대략 일치한다. 그것은 수능시험에 실제로 출제되었던 문제, 즉 수능시험 기출문제다.
수능시험 기출문제와 EBS 교재에 실린 문제들과의 절적 격차는 매우 크다. 모든 교과의 문제가 다 그러하지만 국어 문제는 특히 그러하다. 그것은 실제 수업을 해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기출문제를 설명할 때는 논리적으로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진다.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상당히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EBS 문제를 설명할 때는 사정이 확연히 다르다. 기출문제를 설명할 때의 논리적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EBS연계정책 이전에는 기출문제를 위주로 입시수업을 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함께 수업을 담당하는 동료교사의 동의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EBS연계정책으로 인해 고3 입시수업은 EBS 교재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EBS연계정책 이전에도 EBS 교재로 고3 입시수업을 한 적이 있다. 수업이 아주 괴롭고 힘들었다. 문제풀이수업이 대체적으로 괴롭고 힘들기는 하지만 기출문제로 수업할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이후 나는 고3 수업을 담당해도 EBS 교재를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EBS연계정책이 실행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EBS연계정책 이후 EBS 교재의 질이 많이 좋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기출문제와의 수준 차이는 그래도 상당히 크다. 이제 본말이 전도되어 수능시험 문제가 EBS 교재를 모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기출문제의 질적 수준은 EBS 교재에 있는 문제의 질적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다.
EBS 교재의 질 향상을 대안으로 내놓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언뜻 그럴싸해 보이지만 내막을 모르는 바보 같은 주장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EBS 교재의 문제 질은 수능시험 기출문제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수능시험 문제에는 정부의 엄청난 예산이 투여되고 수능시험에 통달한 전문가들이 대량 동원된다. 출제에 완벽한 몰입이 보장되는 환경 또한 수능시험 출제 때가 아니고는 갖춰지기 어렵다. 설사 EBS라 할지라도 수능시험 문제의 수십 배나 되는 EBS 교재의 그 많은 문제를 실제 수능시험처럼 높은 수준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국가가 만들어 놓은 최고의 문제를 두고 그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지는 EBS 교재를 제왕처럼 모셔야 하는가?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EBS연계정책으로 인한 사교육 감소 효과가 얼마나 될까? 효과 자체가 의심스럽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약간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그 약간을 중요하게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EBS 교재를 억지로 사용하는 데서 비롯되는 수업과 학습의 질 저하를 감수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일까?
나의 둘째 아들은 EBS연계정책이 시퍼렇게 시행 중이던 작년에 수능시험을 치렀다. 나는 아들에게 수능시험 문제풀이 훈련은 기출문제를 위주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BS교재를 풀어보지 않을 수는 없지만, EBS교재에만 얽매이면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했다. 다행히 내 아들은 나의 조언을 잘 따라 주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강하게 할 수가 없다. EBS연계정책이 강하게 시행되는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너무 곤란하다. EBS연계정책은 EBS교재를 제왕으로 만들었다. 고3 수업을 담당한 나는 어쩔 수 없이 EBS교재를 제왕처럼 모셔야 한다. 그로 인한 답답함은 페이스북에서 사적으로 이런 한탄이나 내뱉으며 풀 수밖에 없다.
“ EBS 수능특강 <국어영역> ~ 문제풀이 책이라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누가 만들어도 다 마찬가지인 측면도 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단 소리가 절로 나온다.
수업준비 하는 한 시간 동안 육두문자를 수십 번 내 뱉을 뻔 했다.
내가 이렇게 죽도록 재미가 없는데,
도대체 애들은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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