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D)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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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9) 석호의 1차 모용황 공격 실패(AD338)
석호는 이번 단료토벌 때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고 변경에서 자신의 실리만 챙긴 모용황의 태도에 몹시 분개했다. 석호의 태사령 조람이 석호의 군사행동을 막고 나섰다.
“ 금년 별자리가 흉흉합니다.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결과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석호는 들고 있던 채찍을 조람에게 내리쳤다. 모용황은 석호의 그런 움직임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십만 후조의 대군이 걱정되었다. 모용황의 내사 고후가 모용황을 다독이며 말했다.
“ 저들은 강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염려할 것 까지는 없습니다.
굳게 지키면서 틈을 보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승산이 있습니다.“
석호는 사신들을 사방팔방으로 보내 연합전선을 구축하려했다. 그 주변 여러 성들도 초강대국 후조의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무려 36개성이 석호에게 호응해 왔다.
석호의 수십만 대군은 점차 모용황 전연의 수도 극성에 다가오고 있었다. 모용황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려하자 모여근이 막아서면서 말했다.
“ 조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대왕께서 도망가는 한 발만 들기만 하면
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고
조의 병사들이 우리 백성들을 약탈하는 신호가 되는 것입니다.
저들이 계획하는 것이 마로 그것인데
어찌 대왕은 그걸 모르시고
스스로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고자 하십니까?
지금 당장 성을 굳게 지키십시오.
그러면 우리 쪽 기세가 백배나 높아질 것이며
그들이 공격해 들어오더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형편의 변화나 기회를 보아 이로움을 찾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도망간다 하더라도 늦을 것이 무엇입니까?“
모용황이 마침내 도망가는 것을 그만 두었지만 얼굴빛은 어둡고 두려움이 가득했다. 현도태수 유패가 다시 모용황에게 말했다.
“ 지금 강한 도적이 바깥에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의 안위를 해결할 한 사람은 대왕 이십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강하게 마음을 먹으시고 약함을 보이지 마시고
장군들과 군사들을 격려하셔야 합니다.
제가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니 설사 큰 승리는 아니더라도
군사들의 사기를 안정시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유패는 군사 몇 백 명을 모아 직접 인솔하고 나아가서 후조의 대군과 맞붙었다. 몇 시간의 전투에서 적군과 적장의 목을 여럿 베어 들어오니 성안의 사기는 더없이 충천했다. 모용황이 안심이 되어 봉혁에게 전투의 전략을 물었다. 봉혁이 말했다.
“ 석호는 학정으로 민심을 크게 잃어왔습니다.
백성들과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지금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군사를 몰고 와 있으니
걱정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날짜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초초해 질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굳게 성문을 닫고 기다리다가 틈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모여근과 유패와 봉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모용황은 안심이 되었다.
“ 천하를 내가 차지할 것인데 어찌
석호 따위에게 내가 항복한단 말이요.“
후조의 군사들이 밤낮으로 성의 사면을 공격해 들어왔지만 모용황의 수비군들은 훌륭히 방어해 냈다. 10여일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성이 함락되지 않자 후조의 대군은 군사를 물려 되돌아갔다. 모용황은 아들 모용각을 보내 퇴각하는 후조의 후미를 습격했다. 후조가 대패하고 목을 잃은 병졸의 숫자가 3만을 넘었다.
석호가 후조의 수도 업으로 되돌아가자 모용황은 자신을 배반하고 석호에게 항복하거나 호응했던 그 지역 여러 성들을 공격했다. 더러는 업으로 달아났고 더러는 고구려로 도망갔다.
(20) 전연의 충신 이홍(AD338)
전연의 우사마 이홍에게는 이보라는 동생이 있었다. 이보는 이번 후조의 공격에서 전연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사력으로 보나 나라의 크기로 보나 후조는 전연이 막아내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역부족이었다. 이보가 형님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권했다. 이홍이 이렇게 말했다.
“ 하늘의 도는 그윽하고 멀어서
사람들이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오.
내가 가벼이 전연의 중책을 맡은 것이 아니니
가벼이 움직일 것은 아니요.“
그래도 불안을 느낀 동생 이보가 계속해서 망명하기를 요청하자 이홍이 다시 말했다.
“ 경의 생각이 맞는 것이라면 경은 그렇게 하시오.
나는 조정의 논과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으니
의리로 보아 갈 수가 없소. 죽는다면 여기서 죽을 것이요.“
동생 이보는 설득이 어렵다고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이보는 조에 항복한 뒤 조의 군사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모용각의 습격 때 길에서 죽었다. 이홍의 명성은 전연 조정에서 높이 드러났다. 단씨가 무너지고 후조가 물러나자 전연 모용황의 영토는 하북 북경지역과 요녕성 전역으로 크게 넓혀졌다.
(21) 밀운산에 숨어있던 단료의 투항(AD338)
밀운산 깊숙이 숨어있던 단료는 사람을 후조에 보내 투항하겠다고 말하면서 적당한 자리를 주어 영접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조 석호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하면서 장군 맞추를 3만 기병과 함께 보냈다. 후조의 영접군이 오고 있는 도중에 단료는 생각을 바꾸어 전연에 투항할 의사를 전했다. 아무래도 석호보다는 종족적으로 더 가까운 모용황에게 항복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용황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직접 단료를 영접했다. 단료는 모용황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 지금 후조의 대군들이 나를 영접하려고 오고 있소.
저들이 우리를 모르고 있으니 매복 작전으로 저들을 소탕합시다.“
모용황이 좋다고 생각하여 모용락에게 7천 기병을 주어 밀운산 자락에 매복시켰다가 삼장구(밀운산 북쪽자락)에서 마추의 대군을 섬멸했다. 마추는 걸어서 도망쳐 목숨을 건졌고 선우량이라는 장군은 말을 잃고 걷다가 길에서 포로로 잡혔다. 전연의 병사들이 선우량을 조롱하면서 모욕을 주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 내 자신이 귀한 사람이고
의로 보아도 소인배들에게 농락을 당할 처지가 전혀 아니다.
너희들이 죽이려면 당장 죽일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것이라면 빨리 꺼져 버려라.“
선우량의 태도와 기상이 너무 높고 매워서 병사들이 그를 감히 죽이지 못했다. 모용황이 그 소식을 듣고서 직접 선우량에게 말을 주면서 그를 영접했다. 모용황은 선우량의 용기와 학식과 지모의 깊이에 크게 감복하여 그를 좌상시로 삼고서 최비의 딸을 그에게 내려주었다.그리고 모용황은 단료를 상빈으로 대우하면서 단료의 신하들을 모두 얻었다. 그러나 다음해(AD339) 단료는 전연을 배반하기로 모의하였다. 모용황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전연 사람이 단료의 모의를 듣고 단료와 그의 무리 수십 명을 죽이고서 그 머리를 후조에 보냈다.
(22) 석호의 모용황 2차 공격 실패(AD339)
모용황의 휘하에 있던 장수가 단료무리의 목을 가지고 후조로 들어오자 석호는 다시 모용황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무군장군 이농을 사지절, 감요서북평제군사로 삼고 군대를 영지(하북성 천안)에 진수시켰다. 이농은 정북대장군 장거와 더불어 3만 군사를 이끌고 전연의 범성(하북성 편천)을 공격했다. 모용황은 군사 1천을 열관에게 부어 범성을 지키게 했다. 후조의 대군이 몰려오자 범성의 관리들은 다들 도망갈 생각이었다. 열관이 이렇게 외쳤다.
“ 명령을 받고서 도적을 치는 것은
죽음을 각오로 하는 것이다.
성에 의지하고 굳게 지킨다면
한 사람이 백 명을 대적할 수 있는 법이다.
감히 망령된 말을 떠들면서
항복할 생각을 하는 자는 당장 목을 벨 것이다.“
열관이 단호하게 말하자 성내 수비군들이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열관이 스스로 앞장서서 활을 쏘고 적군의 돌을 피하지 않고 분투하자 감동을 받은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방어에 나섰다. 열흘이 넘도록 후조의 대군이 이길 수가 없게 되자 퇴각했다. 그리고 성을 이기기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성 밖 주민들을 몰아서 남쪽 기주(하북성 중남부)로 옮겼다.
(23) 모용황의 영토 사방 확장(AD339)
후조의 공격을 잘 받아치고 또 요녕성 전지역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진 조정에서는 모용황에게 연왕 칭호를 내리지 않았다. 동진 조정 내부에 사도 왕도가 죽는 등 여러 곡절이 있어서 혼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용황은 동진 조정에 장수 유상과 국운을 보내 최근의승전을 보고하고 후조를 맞대응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칭왕하지 않을 수 없었음 알려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동진 조정에 함께 군사를 크게 일으켜 중원지역(즉 후조)를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후조가 버티고 있는 서쪽과 남쪽을 공략하는 대신 모용황은 적극적인 동진정책을 펴서 고구려 영토를 침략했다. 전연의군사가 신성(요녕성 신빈)에 이르자 고구려왕 고소(고국원왕)가 동맹을 맺기를 간청해 오므로 모용황은 군대를 돌려 돌아왔다. 대신 아들 모용낙과 모용패를 북쪽 우문씨 영토로 보내 그 지역을 경략했다.
(24) 미친 척한 모용한(翰)을 모셔 온 모용황(AD340)
AD338년 후조의 석호와 전연 모용황의 연합작전으로 단씨가 무너질 때 모용한(翰)은 우문씨에게로 달아났었다. 그러나 우문씨의 주군 우문일두귀는 모용한의 재주와 용기를 항상 꺼리며 시기했었다. 모용한은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는 우문일두귀를 우려하여 일부러 미친척하면서 술에 취하기도 하고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면서 길에서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작전이었다. 처음에는 모용한에게 의혹의 눈을 가지고 보았으나 계속되는 기행과 걸행을 보고 우문씨들은 더 이상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살펴보지도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모용한은 이 기회를 살려 적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지형적 특징과 지역 인물들에 대하여 꼼꼼히 기억에 남겨 두었다.
전연왕 모용황은 서형 모용한이 애초부터 반란을 획책한 것이 아니며 시기와 혐의를 받아 몸을 피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용황이 형의 그런 행각 소식을 듣자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 형님이 돌아오실 생각이 있으시구나.”
왕거를 보내 모용한을 모셔오게 했다. 모용한은 원래 3석이 넘는 큰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작은 활을 손수 만들어 왕거에게 주어 땅에 묻게 하고는 그 사실을 모용한에게 알려 주도록 했다. 큰 활을 사용하면 당장에 모용한인 것을 알아차릴 것이므로 신분을 속이기 위해 작은 활을 사용하라는 뜻이 숨어있었다.
모용한이 그 해 2월 우문일두귀의 명마를 훔쳐서 묻어 둔 활과 아들 두 명과 함께 전연의땅으로 도망갔다 우문일두귀가 기병 100명을 보내 추격했지만 모용한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오랫동안 손님이었을 뿐이라서
돌아갈 생각이 깊었었소.
이제 좋은 말을 얻었으니 돌아갈 이유가 없소.
내가 과거 어리석은 척하며 그대를 속였는데
내 활솜씨가 아직 살아있으니
죽지 않으려면 가까이 다가오지 마시오.“
추격하던 기병들이 모용한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가까이 다가오자 모용한이 다시 말했다.
“ 내가 너희 나라에 오래 살았으니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너희들이 나에게 100보 떨어져 칼을 세워놓으라.
내가 활 한 발로 칼을 맞추면 너희들이 돌아 갈 수 있을 것이고
못 맞추면 너희들이 와서 나를 잡아가라.“
쫓아오던 기병들이 칼을 모용한 백보 앞에 세워 놓았다. 모용한이 한 발의 화살로 그 칼의 고리를 정확히 맞추자 기병들이 혼비백산 도망쳤다. 서형 모용한이 돌아오자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다음에 계속>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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