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55> 96세 사랑 시인, 김남조 선생을 보내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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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이 별세하였다. 향년 96세. 일반적 관점으로 장수하신 셈이지만, 오랫동안 선생 일상을 보아온 입장에선 선생 별세가 의외적이고 급작스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생은 늘 바쁘게 사셨고 해야 할 일은 해야하는 성품이었다. 가령, 작년 10월 6일 이건청 시전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 든든한 덕담 말씀을 건네주셨다. 논지가 분명하고 말씀 역시 수미일관 적확하였다. 뿐만 아니라 금년 6월 말, 그 시선집을 추천해야 하는 어느 모임에도 참석하셔서 지지 의사를 밝혀주셨다고 듣고 있다. 별세 3개월 전이었고, 나는 선생의 별세 소식이 뜻밖이었고,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시인협회 영결식
2023년 10월 14일 09시 30분 아산병원 장례식장
조사: 유자효(한국시협 회장)
조시: 신달자 시인
약력보고: 허형만(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장)
고인의 시 <겨울 바다> 낭독 :나태주(한국시협 평의원)
가톨릭문인회 주관 영결미사
집전: 박범식 필립보(주례) 조광호 시몬 신부(공동 집전)
9시 30분 장례식이 시작되었으며 11시경 영결 미사까지 끝낸 영구는 청파동 자택(예술의 기쁨)을 거쳐, 고인이 평생 후학을 길러낸 숙명여대를 들린 후, 영생의 터인 경기도 양주군 천주교 청파묘원에 안장되었다.
시집 『목숨』(1953)과 시집『사람아, 사람아 (2020)
김남조 선생….
한국시의 최고원로로 최근까지 열정을 다해 시업에 진력하였다. 한국현대시 120여 년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시인들이 등장하였고, 수많은 시편들을 발표해 왔지만 아마도, 김남조 시인만큼 너른 독자층에게 읽히고, 사랑을 받은 시인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생은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2020년 『사람아, 사람아』를 발표하였다. 2020년 『사람아, 사람아』가 선생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1953년 첫시집 『목숨』으로부터 시작된 김남조 시가 2020년 『사람아, 사람아』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전 생애에 걸친 김남조 시인의 시를 간명하게 요약해 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1953년의 첫 시집이 『목숨』이었다는 사실이 뜻깊게 다가선다. 1953년은 3년여에 걸친 전쟁이 휴전에 이른 해이고, 수많은 목숨들이 죽고, 다치고, 이산가족이 생겨난 한국사 최대의 비극을 겪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때, 26세 젊은 김남조가 노래해 보여주기 시작한 핵심 모티프가 ‘목숨’이었다.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 시집 『목숨』(1953) 에서
수 백만의 목숨이 사람이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있어도 죽지 않는 “목숨”을 잡고 싶다는 술회가 방점처럼 찍혀 있다. 목숨의 숭엄함은 김남조의 전 생애를 일관하는 핵심 모티프이다. 김남조의 목숨주의 생명주의 사상은 2013년의 시집 『심장이 아프다』 2020년의 시집 『사람아 사람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으로 추구된다.
김남조의 근원 탐구 - 사랑 시편들
시인 김남조의 생명시는 “사랑 시편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인간과 인간, 관계와 관계로 구현되는 일체감의 가장 구체적인 현상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김남조에게 있어서 사랑은 신과 인간관계로부터 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으로 변모되면서 다양하게 추구된다. 사랑의 근원에 닿으려는 시적 화자는 언제나 미약하고 흠집 많은 퍼스나의 모습이고, 순교까지를 감내하는 모습으로 노래된다, 좌절, 참회하면서 눈 멀고 귀먹은 채 기도하고 있다.”
- 참회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 쓰면 한 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雅歌.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 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나
네게로 가리
김남조 시의 본령이 전개되는 핵심 부분이다. 시적 자아인 나를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은 늘 절대자인데, 사랑을 간구하는 시적 자아는 부족하고 결핍 많은 ’나‘이다. 그런데, 부족하고 결핍뿐인 ’나‘가 힘센 근원에 닿기 위해 가열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의 시는 때로 백금처럼 타오르기도 하고 석탄덩이처럼 타오르고 재가 되어 남는다. 김남조의 시에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선생 부음을 접하고 나서 나는 내 계정의 페이스북에 김남조 선생 부음을 알리고 장례일정을 안내하는 포스팅을 연 적이 있었다. 이 포스팅을 연 지 불과 이틀만에 400여 개의 조의표시가 붙었고 250 여 개의 조문 문장이 전해졌다. 외로고 고독한 처지에 빠졌을 때 선생의 사랑 시편들을 소리내어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었다는 사람, 김남조 선생께서 일면식도 없는 자신의 시를 읽고 시집 발문을 써주셨다는 사람, 인사를 드리니 선생께서 손을 잡아주셨는데 그 손의 감촉이 오래 남아 있다는 사람, 평소 선생을 누님으로 불러보고 싶었다는 사람……. 선생과의 사별을 애도하며 선생과의 인연들을 상기해 내고 있었다. 이 모든 인연들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심혈을 기울여 씨를 썼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소중히 하여 따스함을 건네준 선생의 눈짓, 손짓, 목소리 등이 불러낸 것들일 것이다.
시인으로 살다 보면 육신의 나이도 들고 원로시인 대접도 받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들고 원로 소리를 듣게 되면 적당히 나태해지고 어른 자리에 안주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김남조 시인의 경우 이런 안일과는 상관없이 할 일은 하고, 해야 할 말은 하는 철저한 ‘시인’이었던 것, 나는 알고 있다. ‘시는 어휘로 쓰는 게 아니라 뿌리까지 사유하는 힘’으로 쓴다는 말은 김남조 선생이 어느 자리에서 한 말이다.
1984년부터 2년간 선생께서 한국시인협회 회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었다. 한국시인협회는 1958년 창립된 시인단체로 한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는 시인들의 모임이다. 유치환 조지훈 장만영 신석초 박목월 정한모 조병화 김남조 김춘수 김종길 홍윤숙 등으로 이어지는 역대 회장들의 면면을 보면 한국현대시사의 우뚝한 봉우리들을 개관할 수 있을 것이다. 김남조 선생이 회장을 맡은 것은 1984년으로부터 2년간이었고 이때 나는 협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선생을 보필하면서 각종 사무 행정을 책임지게 되었었다. 그리고 나 역시 2010년부터 2년간 이 협회의 회장을 맡아 일하게 되었었다. 나는 김 선생과 함께 시인협회 일을 이끌어 오면서 선생이 매우 치밀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수도 있었다.
심장이 아프다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 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2013년에 간행된 『심장이 아프다』에 수록된 시이다. 김남조 선생은 오랫동안 심장박동조율기를 부착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 심장에 전기 자극을 전달하는 장치를 부착하고 있었다. 심장 통증을 다스리면서 많은 시를 썼으며, 대외 행사에 참석해서 격려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셨던 것이었다.
2020년에 간행한 선생의 마지막 시집 표제가 『사람아, 사람아』였다. 마지막까지 사람을 긍정하고 희망의 비전으로서의 “사랑”을 전하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시인 김남조 선생은 '사람들의 세상'을 떠나 '영겁, 무량수의 세상'으로 처소를 옮겨갔다.
<사진1>장례식에서. 선생 앞 제단에 운구되어 계신다.
<사진2>어느 축하 모임에서 축사 말씀을 하시는 모습
<사진3>이건청‧서대선 시인 부부와 함께한 김남조 선생
※ 지난 8월26일 본란 (ifsPOST)에 연재하는 ‘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51회> 칼럼에서 ‘김남조 선생과 함께'(https://ifs.or.kr/bbs/board.php?bo_table=News&wr_id=53541)를 주제로 “오래도록 건강하셔서 한국 시단의 밝은 빛으로 빛나주시기를…….” 염원한 바 있습니다.<편집자>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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