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60> 선배시인들 안계시니 스산한 마음 지울 수 없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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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경, 월간 현대문학에서 문단인 주소록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시, 소설, 평론, 등을 망라해서 120여명 정도가 수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3년 월간시지(誌) 심상(心象)이 창간되었을 무렵 300여 명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현대문학, 문학사상, 사상계, 현대시학, 시문학 등 몇 잡지가 시를 게재하고 있었다. 현재 시작품을 게재하는 문예지가 350종쯤 된다고 한다.
1970년대 초 매월 발표되는 창작시가 7, 80편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매달 발표되는 시는 전문 평론가 외에도 문단 등단을 앞둔 문학청년들에게 비평 대상이 되고 철저히 검증되었다. 시인, 소설가들의 작품이 검증을 거치면서, 문학인들은 상호 이해가 깊어지고 서로 더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호승심도 불타오르게 마련이었다.
서로 안면이 없더라도 발표작품들을 통해 돈독한 이해를 쌓고 있었다. "나 시 쓰는 아무개입니다" 이런 자기소개만으로라도 10년 지기와 같이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문우끼리의 우정도 그랬고, 선후배 문인 사이의 관계도 소상한 이해로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 문인을 자임하는 언필칭 문인이 4만여 명쯤 된다든가…. 검증되지 않고, 수련단계를 거치지 않은 인사들이 너도나도 시집을 찍어내고 협회를 만들어, 문학상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참 문학의 길을 용맹정진 걸어온 견고한 문학정신이 빛나고 있음도 알고 있다. 이제, 나 자신 육신나이 80을 넘어, 시인으로 살면서 혈육같은 지친(至親), 선후배들을 시단에서 만날 수 있었다. 행운이다.
생각하면 60여년 가까이 시인으로 살면서 훈훈한 시단 인연들이 나를 밀고 끌고 손잡아준 것도, 새삼 깨우쳐 알겠다.
황금찬 선생, 문덕수 선생의 타계, 김광림 선생(오래 와병중이다). 선배시인들 안계시니 스산한 마음 지울 수 없다.
시가 남아 읽히는 한, 시인의 생명은 살아 있는 것ㅡ 좋은 시가 오래 남아 읽혀지길 바란다.
<사진: 20년 전 술이 거나했던 어느 시단 모임에서 사진 한 장 남기자며 포우즈를 함께했었다. 오세영 황금찬 문덕수 김광림 뒤에 이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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