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I)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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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6) 모용준의 천도와 남진 (AD351) 및 칭제(AD352)
모용준은 후조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남쪽 영역을 확대하자 수도를 용성(요녕성 조양)에서 계(북경)로 옮겼다. 그리고 세 갈래로 나누어 대대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모용각에게 중산(하북선 정현)을 공격하게 하고 모용낙에게 상산(하북 정정)을 내침하도록 했으며 모용평은 노구(하북 요양)의 왕오를 침범하도로 했다.
양국을 무난히 방어한 조왕 석지는 장수 유현과 7만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염민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지의 군대가 업성 부근까지 도달하자 겁이 난 염민은 위장군 왕태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왕태는 병을 핑계로 의논하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염민은 홀로 전쟁에 나섰고 유현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참살했다. 유현이 염민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이 돌아가서 석지를 암살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염민은 그렇게 믿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그리고는 반란음모죄로 도와주지 않은 왕태와 그 삼족을 처치했다.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석지와 승상 석병, 그리고 태재 조서 등 10여명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후조의 뿌리가 완전히 절멸된 셈이다. AD319년 석륵이 후조를 세운지 꼭 32년 만에 망한 것이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사거리에서 태워버리고 유현에게 상대장군 및 대선우 기주목의 직책을 내렸다.(AD351년3-4월) 그러나 몇 달 뒤 유현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업을 공격했으나 패해서 돌아온 뒤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
(47) 염위 주군 염민의 사망과 모용준의 칭제(AD352)
양국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던 유현은 그 다음해(AD352년) 염민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죽었다. 염민은 전연 모용준의 장수 모용각의 공격을 받고 정현(하북 정주)에서 사로잡혀 계
성(북경)으로 압송된 뒤 다음 해인 AD352년 5월 처형되었다. 염민의 군대는 보병 중심이라서 산에 숨었으므로 기병 중심의 모용준 군대가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모용준은 염민의 군대를 평지로 유인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척했다. 산 속에 고립되어있던 염민의 군대가 모용준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산을 내려오다가 모두 포획되었다.
[그림] 모용준의 남진정책(AD351년경)
모용평은 군대를 몰아서 진군해 업성을 포위했다. 다른 지역을 모두 평정한 모용준이 모용군, 모여근, 황보군과 2만 기보병을 보내 업성 포위를 강화했다. 염민의 아들 염지가 업성에서 버티었으나 7월 염위의 장수 마원이 성문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염위는 건국 2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준은 염민의 아들 염지를 죽이지 않고 해빈후라는 작위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였으나 2년 뒤 반역죄의 무고를 덮어씌워 죽였다. 전연이 막강한 세력으로 남쪽으로 밀려들자 예전에 후조의 장수였던 사람들은 속속 전연에 항복했다. 모용준은 이들을 후대하면서 예전의 직책을 그대로 수여했다. 왕탁은 익주자사, 기일은 진주자사, 장평은 병주자사, 이력은 연주자사, 고창은 안서장군 그리고 유녕에게 거기장군의 칭호를 내렸다. 모용각은 군사를 안평에 주둔시키고 왕오가 지키고 있는 안국을 공략했다. 왕오의 부장 진흥이 왕오를 살해하고 여호라는 사람은 그런 진흥을 죽이고 스스로 안국왕이라고 칭했다. 소림이라는 자도 무극(하북성 무극)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자 모용각기 나서서 소림을 토벌했다. 모용각은 노구(하북성 요양)를 포위하고 공략했는데 2년 뒤인 AD354년 마침내 노구를 함락시켰다. 자칭 안국왕이라고 떠던 여호는 남쪽으로 도망갔다가 결국에는 전연에 항복하고 말았다.
수도를 옮기고 하북 지역의 후조 영토를 거의 장악한 모용준은 부하들의 지극한 요청으로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면서 신하들의 직책을 걸맞게 올려 주었다. 국상 봉혁을 태위로 삼고 좌장사 양무는 상서령, 우사마 황보진은 상서좌복야 그리고 전서령 장희를 우복야로 임명했다. (AD352년 10월) 다음 해 AD353년 모용준은 모용엽을 황태자로 삼았다.
(48) 동진의 전진 북벌계획 (AD351-)
동진의 정서대장군 환온과 중군대장군 은호는 모두 북벌에 강한 의욕을 보여 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하지역은 석민과 석지의 싸움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고 장안의 부건 또한 전진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군사력이 강하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환온과 은호의 북벌계획의 무모함은 AD352년 허창에서 사상과 요양이 부건에게 참패한 다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은호의 휘하에 있던 왕희지(동진의 필체로 유명한 서예가)가 상사인 은호에게 이런 편지를 올렸다.
“ 근래에 국정을 담당하는 자들이
깊은 꾀를 내고 멀리 염려하지를 못하여
나라의 근본을 피곤하고 고갈되게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였으나
한 번도 공이라 할 만한 것을 세우지도 못하고
천하 사람들에게 드디어 흙이 무너지는 형국을 초래하고 말았으니
어찌 그 책임자들에게 책임이 없다 하겠소.
지금 군대는 밖에서 깨지고 안으로 밑천은 고갈되어
회수를 지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
장강으로 돌아와서 지키면서 장수와 군사를 독려하고
옛 성곽을 지키면서 장강 밖은 그저 간접적으로 관할하는 것만 못하다고 봅니다.
허물을 끌어다가 자기의 책임으로 돌리고
다시 좋은 정치를 개시하면서
부역과 세금을 줄여 주면서 백성들을 보살피면
대체로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위급함을 면할 수 있겠습니다.
사군께서는 포의로 시작하셔서 천하 중임을 떠 맡으셨지만
실패하고 잃어버린 것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아마도 조정안에서 그 대 보다 더 큰 책임을 질 사람도 따로 없을 겁니다.
이전의 북벌이 꼼꼼하게 챙기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면서
또 다시 분수 넘치는 북벌을 시도한다면
비록 우주가 넓다 한 들 어디서 받아 주겠습니까?
이것이 어리석든 현명하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왕희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환온의 지지를 받은 은호는 사상과 함께 다시 허창을 공격하여 전진 군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동진을 반격하고 싶었지만 부건은 그럴 수가 없었다. 국경 북서쪽에서 전량(前凉)의 장중화가 끊임없이 내침해 왔기 때문이다.
(49) 은호와 요양의 갈등(AD353)
안휘성 수춘으로 물러 나 있던 은호는 안휘성 화현에 주둔해 있는 평북장군 요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출신 자체가 저족인 데다가 투항해 온 사람으로서 동진에서 자신과 겨누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거슬렸다. 요양으로서도 동진의 분위기나 군사력이 탐탁하지 않았다. 은호는 요양의 동생을 가두고 요양을 죽일 자객을 여러 명 화현으로 보냈다. 그러나 자객마다 모두 요양에게 자신을 보낸 은호를 자수하고 말았다. 은호는 끊임없이 요양을 죽이려고 군사를 몰래 보냈지만 번번이 성공하지 못했다. 요양은 심복 권익을 은호에게 보내 자신의 진심을 설득시키려고도 했다. 겉으로는 권익의 중재가 성공했다.
은호는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밀사를 부건의 중신 양안과 뇌약아에게 보내 부건을 죽이면 그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포섭했다. 마침 장우가 부건을 죽이려는 암살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계획도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0월 은호는 7만 군사를 이끌고 수춘을 출발하여 낙양을 목표로 북정에 나섰다. 그 선봉에 요양을 세웠다. 요양은 은호의 군사가 자신의 뒤를 쫓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군사를 산상(안휘성 몽성현)에 매복시켰다가 역습했다. 은호군대는 참패하여 초성(안휘성 박현)으로 물러났다. 요양은 빼앗은 산상을 형 요익에게 맡기고 다시 회남으로 돌아갔다.
(50) 은호의 전진 북벌실패와 사망과 환온 전권 장악(AD354)
중군장군 은호는 북벌에 여러 번 실패하였을 뿐 만 아니라 번번이 일으킨 요양 습격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요양은 안휘성과 강소성 회남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군사력을 키우고 또 주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은호의 질시 때문에 군사를 일으킨 것이어서 진심은 아버지 요익중의 유언대로 끝까지 동진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동진의 정서장군 환온은 은호의 계속되는 실패와 조야의 원성을 지적하면서 은호를 파면할 것을 주청했다. 조정은 부득이 은호를 폐서인하고 신안(절강성 구현)으로 귀양 보냈다. 이제 동진의 군사대권은 환온에게로 옮겨졌다.(AD354) 은호는 혼자 이렇게 투덜거렸다.
“ 참으로 괴이한 일이구나 !(咄咄怪事)”
환온과 은호는 젊어서부터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다. 환온은 출신이 낮은 은호를 업신여겼다. 그리고 은호는 무재보다는 문재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었다. 환온은 은호를 상서령으로 임명할 생각으로 재소환하는 편지를 은호에게 보냈다. 은호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편지 답장을 쓰다가 혹이나 잘못 썼을까 두려워 고쳐 쓰기를 여러 번 하다가 결국은 빈 봉투를 잘못보내고야 말았다. 아마도 고의는 아니었고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환온은 모욕감을 느꼈다. 다시 더 은호를 부르지 않았다. 은호는 귀양지에서 그렇게 죽었다(AD354년1월). 동진 내부에서 은호와 요양, 환온과 은호의 갈등이 전개되는 동안 여러 방면에서 압박을 받던 장안의 부건은 다소 간 숨을 쉴 여유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동진에 몸을 맡기고 북벌작전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회남에 웅거하던 요양은 전연으로 귀순했다.
(51) 남전(藍田)전투 : 동진(東晉)과 전진(前秦)의 전투(AD354)
은호가 죽고 나자 환온은 곧바로 군사를 모아 북벌에 나섰다. AD354년 3월이었다. 4만여 보병과 기병으로 근거지 강릉을 출발하여 보병은 육로로, 수군은 양번(호북성 양양)에서 한수를 따라 석천(하남성 석천)을 지나 상락(섬서성 상락)을 거쳐 장안으로 향했다. 시작은 환온에게 유리했다. 환온의 별장이 상락을 공격하여 전진의 형주자사 곽경을 생포했고 이어서 청니(섬서성 남전 동남)를 함락시켰다. 동진의 사마훈은 뒤로 돌아 전진의 서쪽 변경을 침략했고 또 동진과 연합한 전량(前凉)의 왕탁도 진창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진 부건은 태자 부장과 함께 장안을 지키고 동생 승상 부웅, 부생, 부청, 부석 등은 함께 5만 군사로 요유(섬서 남전현 남쪽)에서 총력을 쏟아 환온군을 막았다. 환온의 동생 환충은 부웅의 군대를 격파했고 여세를 몰아 동진군대는 장안 동쪽까지 진출했다. 장안에서는 부건과 태자 부장과 대사마 뇌약아가 3만 군대로 방어하고 있었다. 장안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환온의 동진에 투항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대세는 동진으로 기울 것이 틀림없었다. 이 때 거짓말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부웅의 7천 기병결사대가 장안 남쪽 자오곡에서 동진의 사마훈 대군을 습격하여 대파한 것이다. 자오곡은 장안 남쪽 진령 산길을 빠져 나오는 남북으로 긴 협곡으로써 촉한 120여 년 전 제갈량의 북벌(AD228)에서 위연이 제안했던 습격루트였지만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패전하면서 마속을 읍참할 때 등장했던 길이다. 사마훈은 일단 군대를 몰아서 주지(섬서성 주지)로 퇴각했다.
(52) 전연의 착실한 영토 확장 : 모용수의 동진(AD354)
남쪽의 강대국 동진이 오로지 전진에 대해 북벌정책을 벌인 것은 모용준의 전연을 일단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전연이 배후를 치고 들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환온은 장안의 전진을 공격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비록 지난 해(AD352년 10월) 칭제를 하기는 했지만 회수를 건너 동진 땅을 넘보기에는 전연의 그동안의 행적이 너무 고분고분했고 복종적이었다.
그러나 모용준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동진이 전진을 제어하려고 국력을 쏟는 동안 전연은 화북지역 일대를 넘어 황하 이동의 회하지역을 넘보기 시작했는데 그 전략의 핵심에는 모용패가 있었다. 모용패는 모용준의 동생으로써 용기가 넘치고 씩씩하여 이름을 ‘패’라고 붙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모용황이 세자로 삼으려고 했을 만큼 매력이 넘치는 아이였다.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로 장자 모용준이 세자자리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모용패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모용패가 말을 타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결혼 후 이름을 모용수로 바꾸었는데 이 사람이 나중에 후연의 시조가 된다. 모용수는 동쪽으로 나아가 지금의 산동성 일대를 전연의 영토로 편입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곳에 뿌리를 내려 모용준에게 대항할 우려가 있어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53) 전연과 동진의 접촉마찰(AD356)
AD350년대 중엽 동진과 전진이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용맹한 모용패(수)가 산동성 서부 일대를 장악한데다 요양이 회남 땅을 가지고 전연에 귀속하자 갑자기 전연은 당시 어느 나라 못지않게 영토가 넓고 강대해 졌다. 전연의 영토는 황하를 경계로 동진과 맞붙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지역 동진군대의 수장이 광고(산동성 익도, 지금의 청주북쪽)성에 주둔하던 진북장군 단감이었다. 단감은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를 칭한 것의 참람한 것을 지적하였다.단감은 모용준 어머니가 단씨였으므로 외사촌 이었다. 모용준은 화가 나서 모용각을 대도독 무군장군으로 삼고 양무를 부이관으로 삼아서 단감을 치도록 했다. (AD355)
모용준은 모용각을 보내 황하를 건너게 했다. 단감의 동생 단비가 자신이 전연의 모용각 군사를 먼저 막겠다고 간청했으나 단감이 허용하지 않았다. 전연의 군사를 들여보낸 다음 공격하겠다는 것이 단감의 전략이었다. 단비가 계속해서 우겨대자 단감은 동생 단비를 죽였다.
전연의 군사가 무방비 상태의 황하를 건넜다. 단감은 곧바로 3만 대군을 보내 전투에 들어갔다. 치수에서 양 쪽 군대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모용각의 대승이었다. 단감의 동생 단흠이 포로로 잡히고 모용각은 군대를 몰아서 광고성(산동성 익도현)을 포위했다.(AD356) 단감은 부하 단온을 동진 조정으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동진은 서주자사 순선을 보내 낭야(산동성 임기)에 주둔시켰다. 전연에서도 모용각을 후원하기 위해 견성(산동성 견성)에 있던 왕등을 보냈으나 왕등은 양도(산동성 기남 북쪽)에서 순선에게 붙잡혀 죽었다.
모용각이 단감이 장악하고 있는 광고(청주)를 포위한지 오래되자 제장들이 서둘러 공격하자고 졸랐다. 모용각이 이렇게 말했다.
“ 군사 사용에는 천천히 할 때와 서둘러 할 때가 따로 있는 법이다.
옛 말에 열 배면 포위하고 다섯 배면 공격한다고 했는데
아직 단감의 군사가 많고 또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굳건한 성채에 의지하여 위아래가 힘을 합하고 있으니
아직은 쉽지 않다.
필사적으로 공격한다면 못 뽑을 것은 없겠으나
우리 병사가 많이 다치게 된다.
잠시도 쉬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나도 잠을 자지 못했고
또 요점은 함락하는 데 있는 것이지
급하게 공을 세우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포위상태가 오래 지나자 단감의 식량이 부족해졌다. 단감은 속전속결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전투를 도발했다. 기다리고 있던 모용각의 병사들은 재빨리 성문으로 들어가는 퇴각로를 차단했다. 결국 안팎으로 곤궁해진 단감이 그 해 11월 면박하고 투항해왔다. 모용각은 단감과 2년 전 전연을 배반하고 동진으로 도망갔던 주독을 계로 압송했다. 모용준은 단감에게는 복순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지만 다음 해에 3천여 동진 무리들과 함께 죽여서 묻었다. 주독은 5형(묵형,주형,태형,절형,참형)을 다 갖추어 죽였다. 왜냐하면 주독이 배반하면서 황족 모용수를 죽였기 때문이다. 모용준은 모용진을 광고성에 주둔시켰다. 이 해 여름에 태자 모용엽이 일찍 죽었는데 모용준은 다음해에 일곱 살 된 모용위를 태자로 책봉했다 임기에 주둔하던 동진의 순선은 단감이 패하자 군사를 물려 기남에서 서주자사의 본영이 있는 하비로 돌아왔다. <ifsPOST>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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