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관 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마흔 두 번째 이야기 수념처와 심념처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사마디는 좋은 것이여~”
명상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사띠’를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명상으로 안다. 이를테면 촛불을 켜고 정신을 그 한 곳에 집중시키면 마음의 힘이 커지고 ‘스트레스도 사라진다’ 정도의 선입견을 갖고 있다.
‘사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잘 납득하려 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마음을 비우는 걸 명상의 원리로 아는데 ‘사띠’로 마음이 비워지는 거냐”고 묻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또 사람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야 힘이 생길 텐데, ‘사띠’로 집중이 되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 정도 나오면 ‘사띠’를 이해시키는 일은 일단 접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맞다.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하면 마음에 힘이 생기는 거 맞다. 그걸 사마디, 삼매라고 한다. 그거 참 좋은 거다. 사마디가 생기면 많은 것이 달라짐을 스스로 느낀다. 명상하는 보람이 생긴다.” 그러면 되는 게 아니냐, 그러기 위해 명상하는 게 아니냐고, 그렇게 끝까지 강변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인연은 대략 여기서 끝이다. ‘사마타’ 명상을 권하는 선에서 그냥 마무리한다.
앞서 설명했듯, 사마타 명상과 위빠사나 명상은 목적이 같지 않다. 사마타는 사마디를 얻기 위함이요, 위빠사나는 지혜 얻음을 목적으로 한다. 사마타는 빤냣띠(관념)를 대상으로 선택해서 그 한 대상에 집중하는 방식의 수행이요, 위빠사나는 빠라맛따(법, 실제로 일어나는 것)를 대상으로 통찰하는 방식의 수행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촛불이어도 좋고, 둥그런 접시, 흐르는 물, 바람, 들숨날숨... 그 어느 것이든.
그 대상과 ‘닮은 표상’(니밋따)이 마음에 떠올라 앉든, 눕든, 밥을 먹든, 길을 걷든 사라지지 않을 때까지 그 하나에 집중한다. 바로 이 ‘닮은 표상’은 순전히 관념적인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마음에 사마디를 얻는다. 사마디를 얻으면 세상이 사뭇 달라 보인다. 네 가지 단계의 마음상태가 오죽하면 천상세계에 사는 중생들의 마음상태와 같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니까, 사마타 수행자들의 “사마디는 좋은 것이여~”라는 선언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논서들은 말한다. “사마타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을 잘 하기 위한 선행 수행일 뿐,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결국 위빠사나의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 까닭은 통찰을 통해 얻는 ‘지혜’ 만이 사견, 어리석음, 무명을 거두고 해탈의 길로 갈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곧 ‘어리석음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빛과 어둠이 배타적 상대 개념인 것처럼.
‘느낌에서 느낌으로’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편안히 앉아 보자. 눈을 감고 마음을 활짝 열어보자. 열린 마음에 들어오는 것들을 거부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수동적으로 알아차리기만 하자. 어떤 것들이 들어오는가? 가려움, 통증, 결림 등 몸과 연관된 감각내용, 기쁨 또는 슬픔, 아늑함, 편안함 등 감각과 연관 없는 느낌들, 떠오르는 생각,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계획, 뭔가 하려는 의도 등 무수한 것들이 일어났다 머무르고 사라지지 않는가?
그 모든 것들이 주체인 마음의 대상들이다. 마음이 하는 일은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 가운데 느낌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법이 사념처 중 수념처가 된다. 느낌은 마음이 일어났을 때 반드시 따라오는 7가지 마음부수 중 하나이다. (7대신에 둘러싸인 왕의 비유를 상기하시라.) 그러하니 이론상, 대상인 느낌은 주체인 마음이 찾아다닐 필요 없이 늘 함께 있는 셈이 된다. 특정 느낌은 세 가지(혹은 다섯 가지) 부류 중 하나에 속한다. 좋은 느낌, 나쁜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 (좋거나 나쁜 느낌이 몸과 연관되느냐, 마음과 관련되느냐에 따라 나누면 느낌의 부류는 다섯 가지가 된다.)
마음이 일어남과 늘 함께 있는 이 느낌을 사띠의 대상으로 삼는 수행이 곧 수념처가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낌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12연기의 설명에 따르면, 느낌은 촉에서 발생한다. (... 觸–受–愛...) 논서는 ‘촉(觸 phassa)’을 ‘나타난 대상을 마음이 정신적으로 만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根(indriya 기능)과 境(visana 대상), 그리고 識(vinnna 알음알이), 이 세 가지가 맞부딪치는 것이 촉이다.(三事和合爲觸) 쉽게 말해 ‘감각접촉’이다.
12연기에서 촉부터 정신적 영역에 속한다. 청정도론은 ‘닿는다’ 해서 ‘촉’이며, 닿는 특징, 부딪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형상이 눈에 부딪치고 소리가 귀에 부딪치듯 촉은 마음과 대상을 부딪치게 한다.” 그래서 느낌의 근원이 된다. 사띠가 없을 때 느낌은 곧바로 상카라(行)로 옮겨간다.
12연기의 ‘촉-수-애의 고리’를 다시 상기해보자. 受는 愛로 이행한다. 애는 애착이다. 한자의 생김새로 이 이행을 설명하는 이도 있다. ‘受’안에 마음 ‘心’을 보태면 ‘愛’가 되듯, 느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애착이 된다는 것이다. 12연기에서 느낌이 애착이 되면 바로 取-有-生-老死로 이어져 윤회의 고리는 계속 돌게 된다.
일상의 경험은 말해준다. 느낌이 좋으면 애착이 생기고 느낌이 나쁘면 짜증이 나고 화가 치미는 것을. 애착은 탐욕(로바)에, 짜증은 화(도사)에 속한다. 느낌은 로바, 도사, 즉 번뇌를 일으킨다. 수념처는 이런 고리를 끊기 위한 수행이다. 마음과 함께 일어난 느낌을 그저 알아차리고 바라보라. 느낌이 애착이나 화로 옮겨가지 않도록. ‘느낌에서 느낌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온한 느낌(우뻬까) 그대로.
마음이라는 대상
사념처 수행을 요약하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사띠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다. 그 대상들을 크게 분류하면 네 가지가 되는 데, 그 네 가지를 대상으로 하는 수행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 몸을 대상으로 하는 신념처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위빠사나 수행처들이 호흡과 걸음걸이 등 몸의 움직임과 몸에서 느끼는 감각 등을 직접 관찰하는 데서부터 수행을 시작하도록 가르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수행을 시작하면 신념처와 수념처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심념처와 법념처를 이해하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법념처는 5온이나 4성제 등 교리 상 설명되는 다섯 가지 세부대상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법이라고 두루뭉수리 이해하면 될 듯해 보인다. 하지만 심념처의 대상인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대상으로 삼는단 말인가? 쉐우민 수행법을 익히면 얼마간 이에 대한 답이 나온다.
쉐우민 수행법은 그래서 위빠사나 진영에서 제 나름대로 독특한 진영을 형성하고 있다. 다른 수행처에 비해 가르침이 톡톡 튄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부터 점검하라’,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로바(탐욕)가 아닌지를 살펴라’는 지침에서부터. ‘몸의 움직임, 느낌, 그 무엇이든 하나의 대상만을 집중해서 관찰하지 말라’는 지침은 그야말로 파격이다.
물론 쉐우민 수행법도 좌선하면서 호흡을 보고, 느낌을 보고, 경행하면서 몸의 움직임을 본다. 그렇게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띠의 힘을 키우기 위한 방편이다. 사띠의 힘이 커지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보지 말고, 여러 개의 대상을 한꺼번에 보라, 그래야 힘이 있다,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고는 급기야 대상을 보는 마음을 보라고 가르친다. 또는 아는 것을 다시 알아라, 또는 대상과 마음을 함께 보라, 이렇게도 가르친다.
물론 이런 가르침들 사이에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마음을 사띠의 대상으로 둘 수 있게 되는 데서부터 비로소 수행은 시작된다. 쉐우민 수행법이 심념처인 까닭은 바로 이런 가르침 때문이다. 이해가 쉽지 않겠지만 한 발 더 나가보자.
아는 것을 다시 알 때는 대상과 마음이 함께 있다. 대상이 빠지고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사띠를 두면 대상들은 희미해지고 그 대상들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보든, 듣든, 냄새를 맡든 상관없이 마음을 대상으로 사띠는 지속된다. 떼자니아 사야도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땐 먼저 대상을 보고, 그 다음 대상을 보는 마음을 보고, 대상과 마음을 함께 보고, 그런 다음 마음에 직접 사띠를 두면 됩니까?” 사야도의 답이 이랬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다양하게 해보는 것도 좋겠다.” 길을 찾으면 길은 있지만, 왕도는 없다. 답변을 듣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이 마음을 알다’
“눈이 눈을 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무척 넌센스 해 보인다. 당연히 눈이 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은 눈을 통해 대상을 보는 것이라는 거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다는 등의 답변 따위는 이 물음의 의도를 읽지 못한 것일 터. 볼 수 없는 것을 봐야만 한다는 ‘넌센스의 센스’를 잡아내야 한다.
논서는 앞서 언급한 아나빠나 사띠의 16가지 호흡 가운데 9번째에서 12번째까지의 호흡이 심념처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그 4가지 호흡을 참고해보자.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경험하고, 기쁘게 하고, 집중하고, 해탈케 한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마음이 하는 일이 아는 일인데, 아는 일을 하는 마음 자체를 마음이 알 수 있는가? 집합론의 파라독스를 해결한 버트란드 러셀의 방식처럼 마음의 레벨을 나눌까? 아무튼 사념처 중 심념처는 마음을 사띠의 대상으로 삼는 수행이다.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법이다. 경론에서는 이 문제를 그다지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사띠의 대상이 되는 마음을 16가지 세부적 주제로 나눈다. 이들 세부주제들은 탐욕(성냄, 미혹)이 있는(없는) 마음, 위축된(산란한, 고귀한) 마음 등으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함축이 들어있는 것 같다. 마음에 탐욕이나 성냄, 미혹 등이 있는 지 없는 지, 마음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그 의미라는 해석은 어딘지 좀 단순해 보인다.
오히려 ‘마음이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핀다’고 보면 좀 더 역동적인 해석이 되지 않을까? 이 정도의 역동적 해석으로 심념처가 이해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수행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설명만으로 수행을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다.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사띠할 수 있는 지 없는 지는 실제로 수행해보면 그 여부를 알 수 있다. 수행이 깊어지면 수행에 대한 이해도 더불어 깊어지리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