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부패, 2016 선거로 심판하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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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단면을 해부하거나 확대하는 역할을 영화가 한다. 사회 문제나 부조리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은 방송의 시사특집이나 기획탐사용 프로그램에서 주로 한다. 방송이기에 항상 입장이 다른 양자의 이야기를 모두 담는다. 보도의 객관성과 형평성을 내세운다. 그런데 영화는 다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때로는 여기에 예술적 감성을 입히기도 한다. 방송과 영화 다큐멘터리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영자’와 구로공단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계급적 인물의 대표성과 전형성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작 원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70년대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월남 전쟁에서 돌아와 목욕탕 때밀이를 하던 창수, 경찰서 보호실에서 우연히 만난 영자를 사랑하게 된다. 영자는 봉제공, 빠걸, 버스 안내양을 거쳐 창녀가 되어 있다. 김호선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의 ‘영자’와 ‘창수’는 70년대 우리 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대중적 인물의 전형이었다.
1975년 <영자의 전성시대> 이후 40년이 지나 공단의 여공을 다룬 영화가 나왔다. <위로공단>이라는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은사자상 수상작품이다. 감독 임흥순은 봉제공장 ‘시다’ 생활을 했던 어머니와 백화점 의류매장과 냉동식품 매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해 온 여동생, 보험설계사인 형수의 삶을 보면서 구로공단의 그 많았던 여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영화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여의 준비 끝에 완성했다고 한다.
<위로공단>
<위로공단>은 한국 노동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기보다 70년대 구로공단 여공에서부터 지금의 콜센터 상담원, 항공사 승무원, 대형마트 근로자 등 서비스 산업 여성 근로자들이 직업 전선에서 겪은 인권 침해나 해고, 복직 투쟁 과정 등을 그들의 육성 인터뷰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간간이 그들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듯한 미려(美麗)한 풍경이 삽입된다. 다큐 영화에 조형적 예술성을 약간 가미한 것이다.
영화는 구로공단 여공, 기륭전자, 갑을방직,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를 다룬다. 삼성반도체, 대우어패럴, 이마트, 까르푸, 베트남, 캄보디아 한국공장의 현지 근로자들의 노동 시위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40년의 세월 속에 노동의 힘듦과 해고의 아픈 기억을 더듬는 과거 회상형 감성 다큐다. 스토리텔링의 방식에 있어서도 기승전결이 아닌 전통연희인 마당극 형식의 장(場)중심으로 구성된다.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효시이기도 했던 작곡가 겸 가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의 영화적 재현이라고나 할까.
영화의 큰 기능 중 하나가 프로파간다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일정부분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모두 근로자들이기 때문이다. 고용주의 목소리나 사업주의 입장은 담겨있지 않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주목한 이유는 한국과 아시아의 여성노동자들이 아직도 인권과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엔날레의 수상이 작품이 주장하는 가치까지 담보하지는 않지만 예술이 사회를 향해 발언한 점에 후한 점수를 준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영화가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이 영화는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왜냐하면 불편한 사실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사실이자 현재의 사실이기에 더욱 불편하다. 힘들고 가난하고 병든 이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도와주고 싶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애써 외면하고 싶다. 외면하는 편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외면하지 않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일정부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을 쉽게 내놓지 않는다. 물론 양심의 가책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 중 많은 이는 정의보다는 편한 쪽을 택한다. 아니 택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아픔을 이해해야한다는 의무감과 피하고 싶다는 이기심 사이에 갈등하곤 한다. 고용과 피고용, 노동과 해고, 근로조건의 향상. 이해 집단은 서로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토론이고 합의이며 정치의 몫이리라.
<내부자들>
<위로공단>이 노동자 계급을 다룬 다큐 영화라면 또 하나의 상업 영화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내부자들>. 영화의 제목 자체가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은데 관객이 몰리고 있다. 이 영화는 검찰, 언론, 정치권력의 유착 관계를 그린 영화다. 우리가 어렴풋이 ‘그럴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바를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 영화를 두고 인터넷 댓글에서는 정치, 언론, 검찰 수뇌부의 성(性)파티는 ‘장자연 사건’을 연상시키고 검찰의 비리는 ‘김학의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글도 보인다. 사실이든 아니든 영화는 현실에서 모티프를 빌려와 시나리오를 구성한다. 영화의 말미에 이 영화가 허구임을 분명히 자막으로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영화가 그런 사실에서 모티프를 빌어 왔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는 것 같다. 혹은 그런 오해를 염두에 둔 사전 방어 조치라고도 보인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대통령 후보를 꿈꾸는 정치인(이경영)과 대한민국의 여론을 주도하는 유명 언론사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돈과 권력에 기생하는 깡패 안상구(이병헌), 그리고 지방대 출신 검사(조승우) 이들이 벌이는 물고 물리는 한 판 승부를 그리고 있다. 빽 없고 족보가 없어 늘 승진에서 밀리는 검사 우장훈(조승우). 마침내 대선을 앞둔 대대적인 비자금 수사의 중수부 검사로 선발된다. 그가 수사에 결정적 단서로 잡으려던 비자금 파일은 안상구가 가로채는 바람에 손에 넣지 못한다. 대선 비자금 수사는 종결되고 우장훈은 다시 좌천된다. 비자금 파일로 큰 몫을 노리던 안상구는 오히려 손목이 절단되는 보복을 당한다.
“넌 복수를 원하고, 난 정의를 원한다. 그림 좋잖아?” 이것이 영화를 밀고나가는 키워드이다. 자신을 병신으로 만든 그들에게 복수를 꾀하는 깡패 안상구, 그를 이용해 비자금 파일을 손에 넣어 성공하려는 검사 우장훈, 비자금 스캔들을 덮으려는 대통령 후보와 이를 배후 조종하는 막후 언론인 이강희.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숨은 실세들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한다. 영화는 ‘이들이 그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연희(演戱)에서 꼭두각시 뒤에는 항상 그들을 움직이는 조종자가 있다. 어찌 보면 대통령도 장관도 검찰총장도 언론사 실국장도 모두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캐스팅되고 조종되는 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조직과 사회,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연출자, 권력자는 누구인가? 욕망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가? 아니면 타락한 현실의 세도가들인가? 그도 아니면 바라건대 진정한 국민들의 힘이 권력인가?
영화는 허구를 토대로 진실을 말한다
영화는 허구의 진실이다. 영화가 허구인 것은 사실이지만 허구를 토대로 세상의 진실을 보여준다. 세상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보여준다. 어느 조직에서나 존재하는 출세지향형 인물 검사 우장훈(검찰),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교묘히 여론을 조작하는 신문사 논설주간 이강희(언론), 대표적인 권력의 상징인 대선 후보 국회의원 장필우(정치). 이들 세 집단의 전형성이 영화의 중심 캐릭터로 표현된다.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모습이 우리 시대의 권력형 인간들의 진면목이라고 대중들은 믿을 수도 있다. 허구를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무서운 마력이다.
<위로공단>이 노동자 문제를 사실에 입각해서 다루고 <내부자들>이 권력형 비리를 허구에 기초해 박진감 있게 풀어내고 있다. 앞의 작품이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사실적 진술을 한 반면 뒤의 작품은 지배계급들이 욕망의 충족을 위해 속이고 뒤통수치는 권모술수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내부자들>은 관객 동원 7백 만 명을 넘어섰으며, <위로공단>은 관객 수가 1만4천여 명 선이다. 두 영화는 관객 동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전하는 메시지가 관객동원의 숫자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위로공단> 역시 기억해야 할 작품이다.
투표로 심판하자
민노총 한상균 노조위원장이 주도한 불법 시위, 과격시위는 40년 전 노동자의 외침을 빛바래게 한다. 70~8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의 시위에서는 공권력의 폭력적 강제 진압이 비난을 받았다. 지난 해 민노총의 시위는 노동자 그들의 과격한 폭력성이 비난을 받는다. 지금 민노총의 죽창과 쇠파이프와 복면은 구로공단 여성들의 맨주먹 투쟁과 구호의 순수성을 훼손시키고 있다. 폭력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내부자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영화 속 허구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권력자들에게 분노한다. 대중은 과격 노동자 집단에게도 등을 돌리지만 탐욕에 눈이 어두운 권력자들에게도 침을 뱉는다. 다가오는 2016년 4월 총선, 건전한 상식의 시민들은 투표를 통해 부패와 부정과 폭력을 심판할 것이다.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 함께 잘 사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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