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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2차 연평해전을 회상한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6월28일 16시0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7일 22시10분

작성자

  • 김태우
  • 前 통일연구원 원장, 前 국방선진화추진위원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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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다시 제2차 연평해전을 회상한다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월이 되면 다시 생각나는 이름들이다. 이들은 150톤급 참수리 고속정(PKM) 357정의 함장과 승조원들로서 13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꽃다운 젊음을 서해 바다에 바치고 산화한 여섯 명의 영웅들이다.

 

  2002년 6월 당시 한국은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다. 한국팀이 강호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연달아 격파하고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를 시샘하듯 6월 중순부터 서해에서 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북한 경비정들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은 6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13일에는 경비정이 북한어선 단속을 구실로 NLL을 7km나 침범했고, 20일에도 어선 1척과 전마선 2척에 어부로 가장한 정찰국 요원들을 태우고 NLL 남방 15km까지 내려 보내 한국해군의 대응을 떠보려 했다. 우리 해군의 고속정이 나포하려 하자 칼과 도끼로 극렬하게 저항했다. 북한은 27과 28일에도 NLL을 넘어 연평도 서쪽 측면으로 경비정을 내려 보냈다. 

 

  운명의 날인 6월 29일은 한국에서 한국과 터키 간의 월드컵 3,4위전이 열린 날이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북한 해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당시 연평도 근해에서는 우리 어선 60여 척이 해군 고속정들의 호위 하에 꽂게잡이 조업을 시작하고 있었지만, 9시 경에 북한의 130톤급 상하이급 초계정 388정과 215톤급 경비정 684정이 남쪽으로 기동하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자 해군은 어선들의 조업을 중단시키고 233편대와 232편대를 투입하여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연평도 주둔 한국군에게 K-9 자주포의 전투배치를 지시했다. 고속정 1개 편대는 2척의 참수리급 고속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57정과 358정은 232 편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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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근접 차단기동이 시작되고, 253편대도 가세했다. 차단기동이란 적의 선박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항로를 가로막는 것이며, 당시 해군은 먼저 발포를 하지 말라는 정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퇴각해주기를 기대했던 북한의 684정은 357정에 대해 갑판에 탑재된 대전차포와 함포로 일제사격을 가했다. 357정과 358정이 응사하여 교전이 시작되었다. 한국해군의 256편대와 253편대가 추가로 도착했고, 1200톤급 초계함(PCC)인 제천함과 진해함이 도착하여 북한의 684정에 대해 격파사격을 실시했다. 기습적 선제공격을 받은 357정은 선체에 파공이 생기고 화재가 발생했고, 358정의 예인을 받아 퇴각하던 중 침몰했다. 북한의 684정은 대파되어 화염에 휩싸인 채 388정의 예인을 받아 북쪽으로 퇴각했다.

 

  전투 종료 후 357정 승조원들의 영웅적인 투혼이 알려지면서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윤영하 소령은 최후의 순간까지 함교를 지키며 전투를 지휘하다 적의 포탄에 전사했고, 조천형 중사와 황도현 중사도 적의 포탄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발칸포의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한상국 중사는 끝까지 조타실을 지키며 키를 잡고 있다가 전사했다. 한 중사는 357정이 인양되면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서후원 중사는 방탄벽이 없는 갑판 위에서 응전하다가 전사했으며, 의무병 박동혁 병장은 무수히 많은 적탄을 맞고 후송되었으나 치료중 사망했다. 부상자도 속출했다. 부정장 이희완 중위는 윤 정장을 구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부상을 입었고, 권기형 상병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끝까지 응사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제2차 연평해전은 한국군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교훈을 되새겨 주었다. 

 첫째,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는 것은 합의문서가 아닌 강력한 힘과 의지라는 사실이다. 남북은 1991년 기본합의서를 통해 현재 관할하고 있는 해역을 경계선으로 존중한다고 합의했지만, 서해 북방한계선을 무력화시키려는 북한의 기도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특히, 도발의 주역을 담당한 북한의 684정은 1999년 제1차 연평해전때 한국 고속정을 향해 선제공격을 했다가 오히려 한국 고속정과 초계함의 정확한 응사를 받아 반파되고 함장이 전사했던 바로 그 경비정이었다. 북한은 3년전 패전을 앙갚음하기 위해 당시 갑판장을 새 선장에 임명하여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을 도발한 것이었다. 제2차 연평해전은 이런 북한에게 합의문서란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휴지조각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또 한번 보여준 사건이었다.

 

  둘째, 당시 해군에게 지시된 정부의 교전수칙이 너무나도 안일한 것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남북화해 분위기를 의식하여 먼저 사격하지 말 것과 확전시키지 말 것을 지시했는데, 이에 따라 해군은 경고신호-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라는 5단계 교전수칙을 지켜야 했다. 근접 시위기동이나 차단기동이라는 것은 적함의 함수에 우리 함정의 옆구리를 노출시키는 것이어서 적이 먼저 사격을 하면 영락없이 당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교전수칙이었다.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은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이후 해군의 교전수칙을 대응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라는 3단계로 바꾼 것은 매우 당연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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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은 호국의 달이다. 6월이 되면 온 국민은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그리고 각종 활동을 통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추모한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대한민국은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과 부상당한 19명의 호국 영웅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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