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80>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삼총사의 시대-이서영 (재미 시인, 산부인과 전문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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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문학소년 시절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글이 발견되어 옮겨 싣습니다. 이 글의 필자는 저와 중고등학교 6년을 함께 다니면서 문학소년 시절로부터 문학청년 시절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함께 겪었습니다. 따라서 이건청 시의 맹아기를 증언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우인중의 한분입니다. 이 글은 2007년에 간행된 『이건청 시선집』에서 옮겨왔습니다. 필자 이서영 (재미 시인. 산부인과 전문의, 학창시절 본명은 이서룡)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이건청 |
이건청 군의 정년 기념 문집 발간의 소식을 접하니 감회가 새롭고 인생무상을 느끼게 되는 터이다. 우리가 언제 어느 틈에 이렇게 나이를 먹어 버렸단 말인가? 허나 40년 시인의 생애를 아낌없이 불태워 왔고 문인으로써의 적지 않은 성취를 이룩하였으며 또한 교육자의 소임을 훌륭히 완수하였으니 한편으론 경하해 마지않을 일이다.
회고해 보면 건청 군과 나는 단순한 중고교 동기동창 이상의 인연을 가졌다. 내가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한지 한두 달 후에 미국에 와서 사느라 지금은 안부조차 알 수 없게 된, 권운성 선배가 찾아와서 강력하고 간곡히 권고하는 바람에 문예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 같이 요새 시쳇말로 스카우트되어 온 것이 이건청 군과 조종군 군 이였다. 그때 권운성 선배께서는 양정고교 문예반을 중흥시키기 위하여 고심하시다가 후배들을 면밀히 물색한 끝에 우리들 세 명을 선발하셨던 것으로 이야기 들었다
이때부터 우리 양정고등학교 문예반 삼총사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성적이 지지부진 하였으나 양정중학교 입학시험에서는 다른 동기동창들 두 명과 더불어 공동 최고득점을 했던 관계로 매사에 주목을 받고 있었고, 조종군 군은 법조인의 아들로 여간 두뇌가 명석하고 똑똑 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청 군 역시 공무원 간부로 봉직하시던 분의 자제로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총명한 문학소년이였으며 과묵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아주 실속파였다.
<사진 : 문학소년 시절 문예반 3 총사. 사진 앞줄 앉아있는 왼쪽부터 차례로 조종군, 이서영(이서룡), 권운성(선배) ,그리고 이건청>
하여튼 이때부터 우리는 문학청년의 악명(?)을 휘날리며 매사에 종횡무진하였다. 그때 우리는 매월 한 번씩 학교신문 <월계수>를 발행했으며, 1년에 한 번 학교 교지 <양정>을 펴내기도 했었다. 신문도 그렇고 교지도 그래서 원고 모집, 기사 작성, 편집, 인쇄 등 할 일이 태산 같았었다. 수업을 떡 먹듯이 빠져 가며 출판 인쇄소로 등교를 하곤 하였다. 그때, 신문과 교지의 제작은 소공동에 위치해 있던 경향신문사에서 했었는데, 우중충한 식자과, 문선과나 동판과 또는 조판과가 우리들의 교실이요 수업장이였다. 지금은 컴퓨터가 발달하여 모든 출판과정을 앉은 자리에서 컴퓨터 공정으로 처리하는 모양인데 그때는 신문 마감이 임박하여 동판이 잘못 떠진 것이 발견되기라도 하면 온통 난리가 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란을 겪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훨씬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그리워진다.
그즈음 얼마 후 조종군 군은 학생 대의원회 의장이 되어 바쁘게 되었고 나 역시 문학청년의 명성만을 드날렸지 학교신문이나 문예지의 편집은 사실상 건청 군이 다 알아서 하는 처지였다. 좌우지간 건청 군은 와리스께(?)(조판의 일본말)의 귀재였으니까. 그 시절 또 하나 잊혀 지지 않는 것은 학교 빠지고 신문사에서 뒹구는 덕분으로 얻어먹던 설렁탕 맛이다. 신문, 교지 등을 편집할 때면 편집 비용으로 식사를 하곤 했었는데, 이날 입때까지 아직도 그 시절 먹던 만리동 입구의 <복순옥 설렁탕>보다 더 맛있는 설렁탕은 만나 보지를 못 하였다. 또 그때부터 명동 입구 <뉴욕빵집>등도 드나들게 되였는데 그 방면으로는 종군 군이 사정이 밝았다.
얼마나 수업시간을 빼먹고 다녔는지 한번은 모처럼 수업시간에 참관(?)을 하게 되었는데 출석 부르시던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자 내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급우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질러댔다.
"걔 문예반입니다 문예반, 문학청년 이예요."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삼돌이 이야기로 명성이 높던 김상억 선생님의 추억이다. 선생님께서는 기상이 고고하시고 성품이 여러모로 독특한 점이 많았다. 국어교사로 봉직 하시던 선생님을 우리는 흠모하였다. 선생님은 그때 막 현대문학 추천을 완료하신 신진 시인이셨는데 우리는 선생님의 시 <군학도>(群鶴圖)같은 것에 심취되어 선생님을 신봉하며 쫓아 다녔다. 답십리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선생님의 서재도 구경하고 냉면도 대접 받으며 수줍게 우리들이 써간 시들을 보여드렸는데, 선생님은 유행가 가사 운운하시며 우리들의 습작품을 가차 없이 북북 줄을 그어 지워버리시는 것이였다. 200자 원고지 서너 장에 써간 시 한편이 그저 몇 줄밖에 안 남는 참사를 당하였다.
그야말로 몇 줄이나 더 남았는지로 우리들의 기량을 겨룰 지경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언어의 연금술을 통한 언어의 정제를 시의 지상목표로 가르치시며 군더더기 싯줄을 용납하지 않으셨으며 시인으로서의 엄격한 자세를 강조하시였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는 상당히 사고나 표현의 경직성을 드러내는 현상도 보였었다.
그 시절 권운성 형이 일본 작가 쿠라타 햐쿠조(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소개해 주었고, 김상억 선생님께서 니체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등을 추천하여 주셨다. 또 그 시절 대단히 풍미하던 실존주의 철학 때문에 장폴 싸르트르의 <구토>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는 것이 유행이였다. 그때 마침 독일어 교사로 새로 부임해 온 전광진 선생께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로댕>, 헬만 헷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번역 출판 하시어 우리에게도 소개 되었다. 그 밖에도 세계명작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이 소개 권고되었으나 릴케의 시집들과 <말테의 수기>, 보들레르의 <악의꽃>, T.S. 엘리엇의 <황무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폴 바레리의 시집 등이 우리들의 애독서들 이였다. 나는 건청 군이 소개해준 비교적 평이하고 간결하여 이해가 쉬웠던 C.D. 루이스의 <시론>을 독파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우리 세 사람은 명동의 YWCA에 개설된 서울 시내 고등학생 문학모임 <송화클럽>에 함께 나가기도 하였다. 서울 시내에서 내로라하는 문학 청소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독서토론을 하는 자리였다. 그때만 해도 남녀 고등학생들이 함께 자리를 하는 기회가 별로 없던 터여서 <송화클럽> 모임은 늘, 가슴 설레는 만남의 장이 되곤 했었다. 모임이 끝난 밤 시간 명동 거리를 걸으며, 장래 문인의 꿈을 키워가던 그때가 그립다.
그때 우리는 <문학의 밤> 같은 것도 열심히 하였는데 그런대로 다소의 언변을 자랑하던 나는 주로 사회를 맡아 하였고 기획이나 실질적 준비는 운성 형과 건청 군이 도맡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청록파 시인 박목월 선생님, 조지훈 선생님들을 초빙해 모셨는데 그때 벌써 건청 군은 박목월 선생과의 교분을 시작하였고, 그런 인연을 소중히 가꿔 오늘의 ‘이건청’으로 성장한 것이다.
문예반 생활 중 종군 군이 이승만 대통령 탄신 기념 전국 고교 백일장에서 장원을 해 오는 기염을 토 했다. 또 우리가 3학년이었을 때 4.19 학생 혁명이 발발하였는데 건청 군이 쓴 시 한 편이 한국시인협회에서 주최한 4. 19 학생 혁명 기념 시집 <뿌린 피는 영원히>에 등재되는 영광을 안았다. 또 그 때 사일구 혁명을 기리는 집회가 학교 대 강당에서 갑자기 열리게 되고 나는 문예반 지도교사로 엿장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순종 선생님의 긴급지시로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선생께서 건청 군의 시를 낭독하도록 지시하시였다. 나는 건청 군의 사전 양해를 받지 않은 터라 난색을 표명했는데 선생께서 책임을 지시겠다고 하시였다. 내가 건청 군 시임을 밝히고 낭독을 하겠다고 했더니 무슨 연유에선지 막무가내로 그냥 낭독하라고 지시하시어 결국은 그냥 낭독을 하고 말았는데 예상대로 집회 직후 건청 군이 격노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에 엿장수 이 선생님께서 약속대로 해명을 해주시어 일이 수습되고 건청 군과도 화해가 되었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어느 가을엔가는 휘문의 전정치, 배재의 김양일, 그리고 건청 군과 내가 캠핑을 간 일이 있다. 마석 마치고개 밑창 천마 산정이 바라다보이는 들녘에 텐트를 치고 어스름 황혼녘에 콩 서리를 해다가 불에 굽다가 콩밭 주인이 나타나서 혼줄이 나던 일이 한 폭의 풍경화 같이 머리에 남아 있다. 그때 철없는 우리들을 대표하여 수습에 나섰던 것이 건청 군이었지 싶다.
건청 군은 그 시절 오류동에서 기차 통학을 했었는데 늘, 문학에의 열정이 심각했었다. 사뭇 열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또한 순수했던 것으로도 기억이 난다. 졸업 후 얼마 있다 김상억 선생님께서는 청주대학으로 옮겨 가시고 건청 군과 나도 헤어져서 얼마간 나름대로 방황의 시절들을 보낸 듯싶다.
그래도 그때 더러 건청 군과 만나곤 했는데 잣절 마을 신흥 주택 문간방에서 뒹굴면서 살바돌 달리의 축 늘어진 그림 이야기나 그놈의 슈르레알리즘인가 뭔가를 강의 받기도 했었다. 건청 군은 그 즈음 위장병이 생기고 불면증이 생길 정도로 처절하게 문학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 드디어 <목선들의 뱃머리가>로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하고, <손금> 외 다른 두 작품으로 현대문학지를 통하여 박목월 선생의 추천을 완료하는 것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 시절 나도 덩달아 '잣절 마을 청이에게' 라는 편지를 자주 썼는데 건청 군은 한 번도 이 편지들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 편지들은 당선을 가정하고 내가, 미리 써 놓은 나의 당선소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얼마간 세월이 흐르고 내가 의과대학 저학년이였을 때 건청 군의 주선으로 학생들 과외를 지도한 적도 있다 그때 건청 군은 한양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임중이었고 날로 가세가 기울던 그 시절 나에게는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었다.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미국에 와서 오랫동안 소식 없이 살다가 10 여 년 전, 어느 해 겨우겨우 건청 군과 연락이 닿아 <해지는 날의 짐승에게>, <코뿔소를 찾아서>, 윤동주의 자서전 <윤동주>를 받아 읽고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다 보니 나도 L.A. 미주 한국일보 본사 문예공모를 통하여 <백무동 가는 길목>으로 등단을 하고, 또 미주 한국문인협회 신인상 시 부문에서 <벽과 벽 사이에서>로 당선 되어 재등단을 하였다.
그런데 이십대에 재벌회사 총무과장 삼십대에 재벌회사 이사직에 선임 되는 신화를 남겼던 조종군 군이 미국 서부 덴버 쪽에서 크게 사업을 벌이다 갑자기 타계하였다는 슬프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가을 팔순 노모를 뵙기 위하여 근 25 년여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을 때 몰라보게 늙어버린 동창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건청 군과도 감격의 재회를 하고 그의 시집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을 받아가지고 부랴부랴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시 <겨울 산>을 읽으며 민족정기 가득한 지리산 그늘의 궤적을 따라가 매천(梅泉) 선생을 만나 뵙고 또 그 연장선상에서 꼿꼿한 선비의 자세로 살아온 건청 군을 다시 한 번 만나보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 시인 카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갈파한대로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치열함으로 시인의 생애를 보내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내 친구 이건청 군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며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가 오랜 교직에서 정년을 한다고 한다. 정년이 시인의 경력까지를 마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산 윤선도나 송강 정철 같은 분들은 유배되어 재야에 묻혀서 그들의 문학을 완성시켰고 양평군 허준 같은 분도 어의의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서 민중들을 돌보며 <동의보감>을 완성하지 않았던가. 정년 후에도 더욱 더 넓고 깊은 문학세계를 완성해가는 내 친구 이건청 군을 어느 날 그가 낙향해 보금자리를 틀었다는 양촌리 햇살 바른 <모가헌>(慕嘉軒)에서 상봉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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