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과 잊혀진 남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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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은 늘 성탄절과 함께 다가오곤 한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성탄절을 축하하고 새해를 새롭게 맞이하라고 인사한다.
성탄절이 되면 등장하는 모습들이 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 또는 아기 예수를 강보에 안은 성모 마리아, 그리고 별을 따라 찾아온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것이 성탄절의 대표적 이미지이다. 여기에 썰매 타고 오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우리는 이런 모습들을 그리며 성탄절을 맞이하고 서로 성탄절을 축하한다.
그런데 성탄절 맞이하면서 예수탄생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정혼자 요셉이다. 이 요셉이 잊혀지고 있다.
좀 더 찬찬히 예수 탄생을 들여다보면 아기 예수 탄생에는 요셉의 등장과 역할이 또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여자가 아기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하게 된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의인(義人)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관례로 본다면 부정한 여인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 당시의 의인이라면 요셉이 정혼한 여인이 혼전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임신한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의인이라면 부정을 눈 감아서는 안될 일이다. 그것이 사회정의일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이것을 덮고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한다.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고 결혼은 조용히 없었던 일로 하고자 했던 것이다. 임신 사실을 알리면 마리아는 죽게 된다. 요셉은 사람을 죽이기보다 살리고자 했다. 의를 내세워 죽이기보다 사랑으로 관용하고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의로움의 역설이다.
요셉이 이같이 고민을 하자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은 외간 남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임신한 것이니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얘기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예수는 사랑과 관용으로 세상을 섬기었다.
예수는 처형당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발을 씻겨 주었다. 수제자 베드로가 어찌 선생님 한테 발을 씻으라고 할 수 있냐고 거절하자 예수는 내가 네발을 씻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나는 섬기러 온 것이니 나의 섬김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섬김을 몸소 보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섬기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세상을 구원할 자가 세상을 섬기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섬기고도 세상 죄를 다 뒤집어쓰고 말없이 인간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다.
과연 진정한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성탄절을 맞아 스스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사회를 섬기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한번 깊게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다.
의로운 척하며 상대방의 죄를 낱낱이 까발려야 되고 심지어는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꾸미며 의혹이 있다고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죄는 문제 될 것이 없는데 남들이 부풀려서 말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오히려 자기를 징치(懲治)하는 자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호통친다.
성탄절이 지나면 우리 사회는 정치판 얘기로 뒤덮일 것으로 보인다. 모두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고 사회을 섬기려 한다고 말할 것이다. 과연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우리가 예수 탄생을 기리며 예수 생애는 물론 예수 탄생 막후에 있는 요셉의 관용하고 포용하며 사람을 살리는 의(義)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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