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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업(pro-business) vs. 친시장(pro-market)
친기업과 친시장은 다른 것이다. 친기업은 이미 시장에서 자리 잡은 기성 기업들(established firms)의 기득권과 이익을 중시하고 지켜주는 것이다. 반면, 친시장은 잘 작동하는 시장을 조성해서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와 최상의 사업환경이 제공되게 하는 것이다. 친기업은 기성 기업들의 이윤과 성장을 위하는 것인 반면, 친시장은 시장기능을 강화해 국민 전체의 복리후생을 높이고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때로 친기업과 친시장은 일치한다. 재산권 보호가 그렇다. 재산권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사업활동을 할 수 있고, 시장에서도 자원이 효율적으로 거래되고 활용될 수 있다. 불필요하거나 불합리한 행정규제를 개선하는 것도 친기업이자 친시장이다.
그런데 친기업과 친시장은 일치하지 않거나 충돌하는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법적 진입장벽, 사업영역 제한, 무제한의 계약의 자유 등은 기성 대기업에게는 좋지만, 시장에게는 진입희망자들의 경제적 기회와 자유를 박탈하고 경쟁을 억압함으로써 시장이 효율적이고 역동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담합, 기업인수에 의한 독점화 등은 친기업적이지만, 국부를 파괴하는 가장 반시장적인 행위들이다.
흔히 친시장 정책은 반기업적이다.
친시장 정책은 시장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역동적으로 진화해 가는데 필요한 법·제도와 환경을 갖추는 것이다. 이런 정책은 빈번히 기존 기업들의 이익에 반한다.
공정거래법과 같은 반독점법을 생각해보자. 이 법은 기업의 투자, 생산, 유통, 판매, 거래, 연구개발 등 사업활동 전반에 대해 공권력이 개입할 수 있게 한다. 담합, 독점화 등 경쟁제한행위를 금지하고, 재벌들에게 특별한 제한도 가하고 있으며, 법 위반행위자에 대해 시정명령과 과징금 부과 외에 형사벌도 규정하고 있다. 공정거래법은 반기업적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산업국가가 반독점법을 운용하고 있다. 이는 이 법제가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을 규율해 시장이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려는 친시장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법제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국의 반독점법은 ‘반트러스트법’(antitrust law)이라 불린다. 19세기 후반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트러스트’(trust)라는 거대 독점기업들을 ‘반대’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반재벌법이다.
미국은 견제와 균형의 경쟁적 시장경제를 위해 반독점법에 의거해 기업분할이라는 극히 반기업적인 조치도 불사하는 나라다. 미국 정부는 1912년 록펠러의 Standard Oil Trust를 34개 회사로 쪼갰고, 1984년에는 독점 전화사업자 AT&T를 분할했으며, 1999년에는 Microsoft를 분할하려 했었다. 이런 친시장 노력이 미국의 지속적 번영을 뒷받침해왔다.
집단소송제도도 반기업적이지만 친시장적이다. 시장이 잘 작동하려면 시장만이 아니라 정치, 법률, 문화, 언론, 학문 등의 영역에서도 경쟁이 활발해야 한다. 경쟁이 없다면, 즉 이들 영역이 경제적 강자들의 견해와 이해관계에 지배된다면, 기득권 보호만이 있을 뿐이다. 집단소송제는 법률 영역에서 힘의 불균형을 시정해 경쟁을 유발하는 친시장 제도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부당행위로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에, 소비자가 혼자 힘으로 가해자에게 책임을 부과하기는 매우 어렵다. 경제력, 이해관계의 크기 등에서 개별 소비자는 기업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능한 변호사들과 전문가들은 거의 모두 대기업 편이다. 법조계는 대기업과 부자들의 돈에 포획되어 이들의 견해와 이익을 옹호하게 된다. 결국 부당행위에 대해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힘의 남용으로 시장이 왜곡되고, 약자들의 권리와 기회는 제약된다. 법 앞의 평등, 불법행위 책임 등은 법전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집단소송제는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장치다. 이 제도는 유능한 변호사와 전문가들에게 약자들의 이익을 옹호할 유인을 부여한다. 이로써 경제적 강자와 약자 간의 경쟁이 가능해지고 견제가 이뤄질 수 있다. 그래서 시카고대학의 징갈레스(L. Zingales) 교수는 집단소송제가 ‘국민을 위한 자본주의’의 한 초석이라고 말한다.
친기업 정책과 친시장 정책을 구별해야 한다.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근절, 공정거래법 강화, 집단소송제 도입 등의 경제민주화 공약들은 친시장 정책들이다. 이 조치들은 대기업과 경영자들의 국부파괴행위와 반시장적 행위를 올바로 규율하기 위한 것이나, 재벌들의 반대로 대부분 무산되었다. 전경련과 소위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시장주의를 내세우지만, 기실 친재벌을 친시장으로 포장하면서 친시장 정책을 반대해왔다.
친기업이 곧 친시장이라고 믿는 정치인과 언론인도 많다. 이들은 친시장 제도들이 기업부담을 늘려 경영을 위축시킬 것을 걱정한다. 이들은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s), 즉 대기업들이 잘 나가야 수출과 투자가 늘고 일자리가 많아져 여타 부문도 좋아진다는 관념에 포획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 경제는 과거와 같은 낙수효과가 생기지 않는 구조로 변했다. 내수 진작이 민생경제의 핵심 과제가 되어 있다. 좋은 일자리는 새로운 기업이 새로운 성장사업을 찾아내 고속 성장할 때 많이 만들어진다. 친시장 정책을 통해 시장이 공정하고 효율적이며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해야 이런 일이 가능하다.
친시장과 친기업의 혼동은 좌파도 마찬가지다. 좌파 논객들은 흔히 경쟁제한적 규제 철폐와 같은 친시장 주장을 친재벌 논리로 치부하며, 시장의 힘과 경제적 효율성을 경시한다. 이들은 시장의 왜곡을 시정할 친시장 정책을 찾기보다 반시장적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다.
비즈니스 프렌드리 정책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정책, 법인세 인하 등에서 보듯이, 친기업 정책은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 경제 전반을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친기업 사고에서 벗어나 포용적 성장을 향한 친시장 정책을 추구해야 양극화를 완화하고 경제의 활력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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