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 그 무한 가능성의 세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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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 돌멩이의 생명
헬레니즘 시대 이후 인간을 두고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라고 불렀다. 곧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가능성은 생각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명작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는 이런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조르바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돌멩이는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그것을 조르바는 마치 놀라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가벼운 놀라움의 빛이 그의 얼굴을 채운다. 그는 말한다. “경사면에서 돌멩이는 생명을 얻습니다.” 이에 조르바의 관찰자는 이런 생각을 적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내심 놀라운 기쁨을 맛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도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작가는 같은 것을 다르게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약간의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혹은 약간의 행운을 바탕으로 더 많은 행운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경험 세계나 일어날 수 있는 가능 세계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발상하는 사람이 곧 작가다.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상상의 창의적 눈이다. 카잔차키스의 경우 그 상상의 눈은 이렇게 작동된다. 처음에는 ‘사람들과 새들, 물과 돌’을 보던 눈이 ‘생각과 꿈, 환상과 번쩍거리는 섬광’을 보고, 또 ‘죽음처럼 무서운 침묵의 밤’을 응시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어둠의 벽’을 뚫을 수 없다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 절망과 응시의 반복으로 상상의 눈은 더욱 빛나고 깊어진다.
돌멩이 하나에 지구의 무게중심이…
굴러가는 돌멩이를 보면서 생명의 약동을 볼 수 있는 은혜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만 허락된 것은 아니다. 시인 정현종도 비슷한 경험을 밝힌 적이 있다. 대학 시절 학교 뒷산을 거니는데 저쪽에서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자기 옆에서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아찔 현기증을 느꼈다. 쿵 하는 돌멩이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저쪽의 돌멩이가 이쪽으로 옮겨져 떨어졌으니 지구의 무게중심이 바뀌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지구가 움찔 했으므로 자신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조르바가 그랬듯이 정현종 역시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새롭게 보아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찰과 인식의 새로움이 시적 감수성의 새로움을 낳는 것은 물론이다. 가령 다음 시만 하더라도 그렇다.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좋은 풍경」 전문
부드러운 눈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축복 속에서 두 남녀가 숲속 밤나무에서 사랑을 나눈다. 엄격한 도덕률의 관점에서 보면 남녀상열지사쯤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 장면을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교감과 호응 속에서 ‘좋은 풍경’으로 포착하고 있다. 숲 속의 상황이 두 남녀로 하여금 뜨거운 사랑을 자연스럽게 나누도록 작용했고, 또 그들의 행위가 밤나무 꽃을 빨리 피우게 했다는 상상력은, 서로 순환하면서 상생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태초의 질서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서 나온다. 이 같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례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발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창의적 감각의 열린 힘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또 눈이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헬렌 켈러는 육안이 닫혀 있던 사람임에도 눈이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만일 내게 유일한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뜰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눈을 뜨는 첫 순간 나를 이만큼이나 가르쳐준 내 스승 에미 설리반을 찾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손끝으로 만져 익숙해진 그 인자한 얼굴,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몸매를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모습을, 내 마음 깊숙이 간직해둘 것이다. 그 다음엔 내 친구들을 찾아갈 것이며, 그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나가리라.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잎사귀들, 들에 핀 예쁜 꽃들과 저녁이 되면 석양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일어나면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광경을,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또 하루를 보낼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에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있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쇼윈도에 진열된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 사흘 동안이나마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리라.”(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가정 아래 쓴 글이지만, 이미 그녀는 보지 않아도 다 본 것처럼 쓴다. 창의적 감각의 열린 힘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상식에 대한 도전
눈을 뜬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보이는 것만 보면 정녕 다 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예전에 미켈란젤로는 자기 조각상을 극찬하면서 창작 동기를 묻는 질문에 시크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조각상은 내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대리석을 보니 그 안에 이 상이 들어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끌과 정을 가지고 필요 없는 부분만을 쪼아냈을 뿐이다. 그런 얘기였다고 기억된다. 또 프랑스의 어떤 작가는 켜켜이 싸인 먼지 속에 이야기 세계가 들어있어 자신은 단지 그 먼지만을 털어낸 것뿐이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정형의 돌멩이 속에서,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뭔가를 볼 수 있는 자, 보지 않고도 보는 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보는 자, 그런 이들이 새로운 창의적 발상의 세계를 안내한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랬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왜 그것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그럴 바엔 다른 것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일까. 세상의 많은 예술가들은 각각 특별한 감각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 예술사의 대가들도 창의성에 관한 한 비슷한 얘기를 한다. 가령 르네 마그리트처럼 말이다. “내게 있어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나는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한다.”
“나도 창의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창의적인 사고, 창의성의 발현, 그것이 똑 예술가나 발명가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눈,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동경하기,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우선 자신의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두고 나는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이런 생각을 지녔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고쳐야 한다. 누구나 공기를 마시고 물을 마시고 사랑을 하듯이, 누구나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발현하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유년 시절로 돌아가 보라. 자신이 얼마나 창의적인 예술가에 가까웠고, 천재적인 발명가에 가까웠는지를 오래된 유년의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증명해 줄 것이다. 나도 창의적인 사람이다, 라는 자기 신뢰와 감사, 이 지점에서 창의적 인간으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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