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9 : 우문태·우문옹의 업적을 탕진한 북주(北周)의 우문빈<G>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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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39> 동위와 서위의 전투 : 제2차 동서위 전쟁(AD537년 윤9-11월)
연초 서위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고환은 AD537년 겨울 20만 대군으로 호구(산서성 길현)로부터 포진(영제)로 직진 남하해 내려왔다. 당시 1만 군사로 항농(삼문협)에 있던 우문태는 일단 관중으로 군사를 물렸다. 고오조는 3만 군사로 하남(낙양 서쪽)을 출발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문태가 떠난 삼문협을 포위했다.
고환의 우장사 설숙은 서위가 가뭄으로 피폐해 있으니 가만 놔둬도 무너질 것이므로 서둘러 황하를 건널 필요가 없다고 했다. 후경 또한 군사를 앞뒤로 나누어 천천히 진군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지난 번 패배를 급히 설욕하고 싶은 고환은 황황히 포진(영제)을 건너 장안 동북쪽 풍익성까지 다가갔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낙수를 건너 허원(대려 남쪽)에 진을 쳤다. 서위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싸움을 걸기보다는 수비에 치중하자고 건의했다.
우문태는 장안까지 들어오면 민심이 크게 흔들릴 것이고, 그들이 먼 곳을 서둘러 왔으니 분명히 피로에 지쳤을 것이므로 선수를 칠만하다고 판단했다. 군사를 이끌고 사원(대려)부근까지 접근했다. 고환의 군대와는 60여리 거리였다. 다들 공포에 질려있었지만 우문태 조카 우문심은 경축하는 분위기였다. 우문태가 그 이유를 묻자, 출병을 별로 원하지 않는 적들이 너무 깊이 들어왔고, 고환이 지난번 패배에 대해 분개심으로 평정심을 잃고 있으니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우문태는 달해무를 몰래 적진 안으로 들여보내 상황을 염탐하게 했다.
고환은 우문태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앞으로 나갔다.(10월 2일) 우문태는 이필의 권고에 따라 싸우기가 편한 동쪽 10여리의 위곡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위수를 등지고 동서로 대열을 만든 다음 오른쪽은 이필, 왼쪽은 조귀에게 맡겼다. 이들은 강가 갈대숲에 매복하고 동위군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동위의 장수 곡률강거는 서위의 매복 작전을 알아차리고 우문태와 붙지 말고 정예군을 나누어 먼저 장안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고환은 듣지 않고 갈대숲을 태우는 작전을 펼치자고 했다. 곡률강거는 우문태를 사로잡아야 사람들이 믿을 것이므로 화공은 적절치 않다고 반대했다. 고환은 숫자상의 우위를 믿고 강공하기로 결정했다.
동위군이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밀려들자 숨어서 기다리던 서위군은 북소리에 때를 맞추어 분발하여 동위군대를 둘로 가른 다음에 서위 좌우군이 협공하여 대파했다. 이 전쟁을 하곡(河曲)의 전투라고 부른다. 곡률금이 고환에게 후퇴하자고 했지만 고환은 말안장에 앉아 꼼짝 않고 서있었다. 곡률금이 채찍을 들어 고환의 말을 후려치자 말이 움직였으며 밤을 타고 황하를 다시 건너 돌아갔다. 동위군은 8만을 잃었고 무기와 갑옷 18만 점을 버리고 도망갔다. 우문태는 주국대장군을 덧붙여 주었고 승리한 장수 12명에게 작위와 식읍을 늘려주었다.
동위의 장수 후경이 고환에게 2만을 요구하여 승리에 도취된 우문태를 치겠다고 했으나 고환은 우문태를 잡았다 하더라도 후경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부인 누비의 말을 듣고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고오조도 포위했던 항농을 풀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하곡의 전투를 승리한 서위는 독고신에게 2만을 주어 낙양을 점령하게 하고 낙주자사 이현으로 하여금 형주(하남 등주)와 동형주(하남 필양) 방면을 확보하게 했으며 하발승과 이필은 황하를 지키는 보루인 포판을 확보하게 했다. 동진주(포판) 자사 설숭례는 도망가고 그 집안동생 설선주도하여 서위에 항복하였고 영주(하남성 장갈)자사 전흘은 부하 하약통에게 붙잡혀 서위에 인계되었다. 고환이 요웅 등을 보내 영주를 찾고자 했지만 우문태는 대도독 우문귀를 보내 요웅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서위의 영토는 낙양과 남양을 잇는 황하 이남지역을 모두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40> 제3차 동서위 전쟁 : 낙양대전 (AD538년 8월)
AD538년 7월 동위의 고환은 후경과 고오조에게 대군을 붙여서 독고신이 지키고 있는 낙양을 포위 공격하였다. 급보를 전해들은 우문태는 황제 원보거와 함께 이필을 선봉에 세워 동쪽으로 향했다. 장안은 태자 원흠을 보좌하는 상서좌복야 주혜달에게 맡겼다. 후경이 지휘하는 동위군은 성질이 급한 막다루대문의 어설픈 선공으로 서위의 이필과 달해무에게 크게 패했다. 후경이 달아나던 중에 황하대교에서 우문태와 교전이 일어났다. 우문태의 말이 화살에 맞아 놀라서 도망가는 바람에 우문태가 낙마했다. 동위 군사들이 몰려들자 도독 이목은 우문태를 회초리로 때리면서 두목이 어느 것에 숨었냐고 소리쳤다. 동위군사들은 회초리를 맞는 사람이 우문태라고 생각도 못하고 지나쳤는데 이 때문에 우문태가 살아났다. 도독 이목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우문태에게 주어 빠져나왔다. 서위군사가 다시 공세를 펼치자 동위군사들은 황하 북쪽으로 도망갔다. 동위의 장수 고오조는 우문태를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왔다가 크게 패하여 도망가던 중 남성(하남성 맹현)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평소 고오조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장수 고영락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서위군사에게 고오조의 목이 날아갔다.
몇 몇 전투에서는 서위군이 이겼지만 다른 전투에서는 밀리기도 하면서 전투가 끝이 나지 않았다. 특히 동위의 묵기수락간이 용감하게 황하를 지켰다. 우문태는 군사를 돌려서 서쪽으로 향했다. 항농(삼문협)을 왕사정에 맡기고 장안으로 향했다. 장안에서는 서위군이 패배했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포로로 잡혀있던 동위 도독 조청작과 우복덕이 사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서위 주군과 우문태는 문향(하남성 영보)까지 왔지만 장안의 반란 무리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통직 산기상시 육통이 장안의 반란 상황을 가볍게 보면 안 되니 서둘러 전진해서 진압하라고 재촉했다. 우문태는 육통의 말을 듣고 곧바로 진군하여 장안으로 나아갔다. 화주자사 우문도가 군사를 이끌고 함양(섬서 경양)으로 들어가 반란괴수 모용사경의 목을 베고 우복덕을 사로잡았다. 우문태는 우문도와 함께 위수를 건너 조청작 무리를 깨뜨렸다. 장안에서 반란 무리와 내통한 태보 양경예도 조청작과 함께 죽였다.
고환은 7천 기병을 이끌고 금용성(낙양 궁성) 으로 들어왔다. 성을 지키던 동위의 장손자언은 도망가고 없었다. 고환은 낙양성을 완전히 불 지르고 폐허로 만들었다.(AD538년 8월) 서위에서는 동위 장수 고오조와 두태와 막다루대문의 목을 싸서 업으로 돌려보냈다.(AD538년10월) 그 해 12월 서위에서는 시운보를 보내 낙양을 차지하고 도독 조강은 광주(하남성 노산현)을 뽑았다. 이로써 광주와 양주(하남성 방성현)의 서쪽은 서위의 영토가 되었다.
<41> 고환의 낙양의 서위공격 : 제4차 동서위 대전(망산 전투, AD543년)
AD543년 2월 동위의 북예주자사 고중밀이 호뢰(하남성 형양)을 가지고 서위에게로 항복해 왔다. 그가 동위를 배반한 것은 최섬 때문이었다. 고중밀은 최섬의 누이동생을 처로 삼았다가 버리고 이씨라는 첩을 들였었다. 그 일로 최섬과 사이가 틀어졌는데 이번에는 고중밀의 첩 이씨를 고징이 희롱하면서 겁탈하려다가 이씨가 강하게 저항하면서 불발되었다. 첩 이씨가 고중밀에게 그 사실을 밝혔으므로 고중밀은 고징에게 원한이 있었다. 고징은 어사중위 고중밀을 인사비리가 많다는 이유로 북예주자사로 내쫓았다. 고중밀은 내심 반역을 일으킬 생각을 품게 되었는데 고환이 그것을 알고 해수흥이라는 사람을 북예주의 군사업무를 대행하도록 조치했다. 고중밀은 군권이 없이 일반 업무만 관장하는 반쪽자리 자사가 된 것이다. 고중밀은 연회를 열어 해수흥을 부른 다음에 매복군사를 시켜 체포하고는 AD543년 2월 12일 서위에 항복한 것이다. 우문태는 북예주를 가지고 항복해 온 고중밀에게 시중 사도로 임명하고 이원을 선봉으로 군사를 일으켜 하남성 백곡을 뽑고 우근을 보내 황하대교 남단을 포위하였다.
고환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태원에서 남하했다. 우문태는 황하대교를 불을 지르려 했는데 고환이 미리 조치하는 바람에 다리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고환은 망산에 진을 쳤고 우문태는 낙양을 점거하고 있었다. 우문태가 먼저 망산 기슭을 치고 올라갔지만 동위의 맹장 팽락에 의해 철저히 격파당했다. 목을 자른 것이 3만이고 서위장수가 48명을 포로로 잡는 동위의 대승이었다. 팽락이 추격해오자 우문태가 말했다.
” 나를 지금 잡아버리면 나중에 자네는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빨리 돌아가서 승전의 상금을 거두도록 하시게.“
팽락은 우문태에게 금 한 자루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고환은 우문태를 놓친 것을 분하게 여겨 팽락을 땅에 눕히고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팽락이 다시 군사 5천을 주면 잡아오겠다고 하자 고환이 말했다.
” 놓아 준 것은 무엇이고 또 다시 잡아오겠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다음날 다시 전투가 벌어졌는데 우문태는 중군이 되고 조귀는 좌군, 약우혜는 우군으로 삼아 동위군대를 대파시켰다. 고환이 말을 잃어버렸는데 혁련양순의 말을 얻어 타고 도망쳐갔다. 고환을 호위하는 무사는 보병과 기병 7명뿐이었다.
동위에서 넘어 온 병사들이 고환이 숨은 장소를 알려주자 우문태는 용병 3천을 하발승에게 붙여서 짧은 무기를 들려 고환을 추격하게 했다. 고환이 하발승에게 거의 잡힐 찰나에 동위의 유홍휘가 쏜 화살로 하발승의 기병이 쓰러지고 단소가 쏜 화살에 하발승의 말이 명중하자 고환은 그 틈을 타고 도망갈 수 있었다. 서위의 조귀등이 동위를 이기지 못하여 군사들이 밀려 도망갔다. 우문태가 지원을 갔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가 없었다. 독고신과 우근이 도주하던 군졸들을 다시 모아 대오를 갖추어 겨우 안전할 수 있었다. 우문태도 군사를 물려서 동관으로 왔다.
고환은 승기를 타고 더 추격하여 위나라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장수들은 멈추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 진원강만이 강력하게 추격하자고 했지만 고환은 유풍생에게 수천의 기병을 붙여서 우문태를 쫓다가 다시 돌아왔다. 고환이 물러나자 우문태는 동관에서 나와 왕사정이 지키고 있는 항농(하남성 영보)으로 들어갔다. 우문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직위를 깎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42> 다시 동위에게 넘어 간 호뢰(AD543)
동위를 배반하고 서위로 투항한 북예주자사 고중밀은 호뢰(하남성 형양, 낙양 동쪽 100KM)를 지키고 있었다. 우문태가 간첩을 호리로 들여보내 계속 지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동위의 후경이 도중에 첩자를 잡고는 빨리 도망가라고 편지를 고쳐썼다. 호뢰를 지키던 위광이 밤중에 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호뢰는 다시 동위로 떨어졌다. 후경은 고중밀의 첩 이씨를 업으로 압송하고 고중밀을 제외한 모든 죄인을 사면했다. 고중밀과 인척관계에 있는 고건, 고계식, 고앙 등은 이전의 서훈과 공로로 연좌되지 않게 되었다. 고중밀의 처는 사형에 처해졌으나 고징이 성대히 차려입고 유혹하자 마침내 이씨가 고징을 받아들였다.
<43> 동위 고징과 최섬의 공포정치(AD544)
당시 동위는 기강이 무너지고 관리들은 탐오에 빠져있었다. 고환은 국기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송유도를 어사중위로 임명하고자 했는데 고징이 강권하는 바람에 최섬과 송유도가 같은 자리를 나누어 임명했다. 상서령 사마자여는 고환의 오랜 친구였으므로 함양왕 원탄과 함께 권세와 부귀를 한껏 누렸는데 어사중위 최섬과 송유도가 사마자여, 원탄, 가조혼도원, 손등 고륭지 등 훈구대신의 비리를 적발하고 탄핵을 강행했다. 사마자여는 옥에 갇힌 며칠 사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다.
” 저 사마자여는 상왕(고환)에 의존하여
왕께서 수레 하나와 암소 및 송아지 한 마리를 주셨는데
송아지는 죽었고 암소만 살아남았으니
그 외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뺏은 것이 맞습니다.“
고환이 사마자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고징에게 편지를 써서 명령했다.
” 사마령은 내 옛 친구니 너는 마땅히 그를 용서하라.“
고징이 즉시 사마자여를 풀어주었다. 사마자여가 풀려나면서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설마 다른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사마자여의 직책은 모두 삭탈되었다. 함양왕 원탄도 집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죽은 사람도 많았다. 한참 지나서 고환이 초췌한 사마자여를 만났는데 그의 머리를 무릎에 누이고 이를 잡아주면서 술 100병과 양 500마리와 쌀 5백석으로 위로했다. 고환은 업에 있는 여러 고관들에게 말했다.
” 이제 최섬이 헌대에 있소.
함양왕이나 사마령은 모두 더 이상 친할 수 없는 친구고 또 높은 직책까지 올라갔지만
동시에 죄를 얻으면 나도 구원할 수가 없으니
여러분들도 신중히 행동하셔야 하오.“
송유도 또한 관리들의 비리를 낱낱이 적발하여 채찍질을 치거나 관리들을 제척하였다. 고륭지가 송유도의 신하답지 못한 말을 하였다고 고발하니 송유도의 죄는 사형이었다. 급사황문시랑이 이렇게 송유도를 변호했다.
” 개를 기르는 것은 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개가 자꾸 짖는다고 죽여 버리면
나중에는 짖을 개가 없어질 것입니다.“
송유도를 제명시키는데 그쳤다. 고징은 송유도를 이끌어주어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44> 제5차 동위의 서위공격 실패(AD546)
고환이 동위 수도 업에서 태원에 있는 모든 군사를 긁어모아 서위의 옥벽(산서성 직산)를 포위했다. 옥벽을 지키던 서위의 위효관은 밤낮으로 계속된 동위의 공격을 잘 받아냈다. 성안에는 물이 없어서 성 밖 분수에서 물을 끌어다 썼는데 고환은 그 물길을 돌려 물을 끊어버렸다. 고환은 성 남쪽에 토산을 쌓고 성을 공격했지만 위효관은 성벽위에 나무 탑을 항상 토산보다 높게 쌓아서 막아냈다. 고환이 토굴을 10개를 뚫어 공격해오자 위효관은 성 안에 해자를 뚫고 병사를 배치해 막았다. 또 토굴에 풀무로 불을 지펴 불어넣어 막기도 하였다. 고환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사신을 보내 위효관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위효관의 대답은 당당했다.
” 나의 성과 해자는 대단히 튼튼하고 병사와 식량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공격하는 사람들이야 힘이 들지만
막는 사람들은 편안하니 바깥에서 구원군이 없어도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대들이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된다.
나는 관서의 남자로 항복하는 장군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환이 위효관을 죽이는 사람에게 태위 벼슬을 주겠다는 편지를 화살로 성 안으로 쏘아 보내자 위효관도 응수했다.
”고환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도 같은 상을 내릴 것이다.“
동위가 무려 50여 일을 공격했으나 전사자만 7만 명 발생하자 실패하자 고환은 병이 나서 11월 1일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태원으로 돌아온 고환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도독중외제군사의 직책을 내놓았다. 동시에 아들 고양을 업에 보냈고 고징은 태원으로 불렀다. 서위에서는 옥벽을 훌륭히 막아 낸 위효관을 표기대장군, 건충공으로 올렸다.
<45> 고환의 죽음(AD547)
동위의 사도이면서 하남대장군 대행대인 후경은 한 쪽 다리가 짧아서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것이 불편했지만 지략이 매우 뛰어났다. 후경은 고오조나 팽락과 같은 용맹한 장수들을 가볍게 여기면서 돼지들이 돌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비하했다. 후경은 3만 명만 있으면 강남 양나라 소연을 묶어서 태평사 주지스님으로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는데 고환은 후경을 자신의 반쪽처럼 믿고 10만의 군사를 주었다.
후경은 평소에 고징을 매우 가볍게 생각해서 사마자여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왕(고환)이 계시는 경우에는 내가 다른 뜻을 가질 수가 없지만
왕이 죽으면 나는 선비족 어린 아이(고징)와 더불어 같이 일을 할 수는 없다.”
사마자여는 황급히 후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고환이 병이 들자 고징은 고환의 거짓 편지를 써서 후경을 업으로 불렀다. 예전에 고환은 후경과 약속하기를 편지에는 항상 작은 점을 덧찍기로 했었는데 이 번 편지에는 그 덧붙인 점이 없었다. 후경은 가짜 편지인줄 알아채고 업으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고환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스스로 방어를 튼튼히 했다. 고환은 고징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알고 그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
“ 후경의 반란을 걱정하는 것이냐?”
고징이 그렇다고 하자 고환이 말했다.
“ 후경은 하남(낙양부근)을 다스린지 14년이나 되었다.
항상 펄펄 나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를 잡아 키울 수가 있었지만 너는 그것이 어려울 것이다.
지금 사방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으니
내가 죽더라도 상을 발표하지 말거라.
선비족 노인 고적간과 곡률금칙륵은 절대로 너를 져버리지 않을 것이고
가주혼도원과 유풍생은 동위로 도망온 사람들이어서
다른 뜻이 없을 것이다.
반상낙은 마음이 고르고 두터워 믿을 만하고
한궤는 조금 어리석으나 너그럽게 용서할 만하다.
팽락은 뱃속을 알기 어려우니 조심해라.
후경을 대적할 사람은 모용소종 밖에 없어서
일부러 그를 후하게 대접하지 않은 것은 너를 위해 남겨둔 것이다.
네가 그를 융성하게 대접하여 귀하게 대접하여 너의 사람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단효선은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으며
마음이 어질고 두터우면서도 지혜와 용기를 모두 다 갖추었으니
친척 가운데 이 사람만 있을 뿐이다.
군사의 큰일은 그와 함께 의논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난 번 망산의 패배(4차 동서위 전쟁, AD543년)
내가 진원강(그 때 우문태를 끝까지 추격하자고 했으나 고환이 듣지 않았음)의
말을 듣지 않아서
너에게 근심을 남겨주는 꼴이 되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구나.”
고환은 해를 넘겨 AD547년 1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였다.
<46> 고환의 됨됨이
자치통감에 기록된 고환의 됨됨이는 성격이 매우 깊고 치밀하였으며 하루 종일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어서 그 깊이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국가기밀을 다룰 때에는 마치 신과 같았으며 군사를 부리는 일에는 법과 명령이 엄숙했다. 듣고 판단하는 것이 명석해서속이거나 기만할 수가 없었다. 재능을 가지고 사람을 뽑았으며 하인이라도 담당할 능력이 거리낌이 없었고 헛된 명성을 좇는 알맹이 없는 사람은 임용하지 않았다.
평소 항상 검소했으며 금이나 은으로 칼과 무기를 장식하지 않았다. 젊어서는 폭주를 사양하지 않았으나 큰 직책을 맡고부터는 세 잔을 넘기지 않았다. 사람을 잘 알아봤으며 선비를 좋아해서 문무관원들이 등용되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훈구대신을 끝까지 믿고 의지했다. 관대해서 적국의 충신을 붙잡으면 대부분 죄를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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