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10> 대통령은 밥 사지 말라는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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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형! 내가 계산할게!”
“고마운 분이네요. 누굽니까?”
“○○○ 몰라?”
2006년 가을, 하늘빛이 아주 파랗고 맑아서 좋았던 어느 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음식점에서 청와대 출입 기자 선배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중년 남자가 우리 앞을 지나가면서 “내가 계산할게!”라고 했다. 내가 “누구냐?”고 묻자 선배는 “몰라? ○○○ 비서관인데?”라고 했다. 그 순간 밥 먹다 말고 욕이 나왔다. (나는 웬만하면 욕을 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 개혁을 내세우며 임기 내내 언론, 정확하게는 보수 언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그 선봉에 선 게 청와대 공보라인과 국정홍보처였는데, 그는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핵심 인력이었다.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 내내 벌어진 기자실 폐쇄, 정부 부처에 언론중재위 제소 독려 및 평가 등 언론과의 싸움(그들은 언론 개혁이라고 불렀다)을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거다.
가재는 게 편이라서 욕한 게 아니다. 나도 언론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참여정부의 언론개혁은 진정성보다는 자신들이 보기에 아니라고 생각하는 기사와 언론사를 견제하기 위한 측면이 더 강했다고 생각한다. 늘 “언론의 건전한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다”라고 했지만, 그 기사가 건전한지 아닌지는 자신들 기준으로 판단했으니까. 그리고 이게 정말 나쁜 행태인데, 상대를 매도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내가 왜 밥값을 대신 내주는 ○○○ 비서관에게 고마움 대신 화가 났냐면, 정작 노무현 대통령은 공직자들에게 “기자들에게 술·밥을 사지 말라”면서 기자들을 대놓고 쓰레기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2003년 8월 2일 장차관급과 대통령비서실 고위 참모들이 참석한 2차 국정토론회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언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공직자들이 ‘자리를 걸고’ 언론에 맞설 것을 독려했다. 다음은 발언 요지다.
“공무원 기자접촉, 권장할 것 못 된다. (정부가) 사전배경 설명 잘하고 기자를 적극적으로 접촉한다고 해도 이런저런 질문을 유도하고, 꼬투리 달린 질문을 통해 거꾸로 이야기되고 보도된다. 1시간 동안 열나게 강의했는데 인용한 게 더 크게 보도된다. 적극적인 접촉이 뭔가. 기자들에게 술, 밥 사는 것인가. 득 될 게 없다. 적극 권장할 것 못 된다.”
이 말은 말을 바꾸면 기자와 언론사의 역할은 뉴스 공급자가 하는 말과 자료를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이상하게 비틀고 왜곡하는 것은 안 되지만, 뉴스 공급자의 말 중에서 무엇을 기사화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기자와 언론사의 자유다. 그게 민주주의다. 권력자가 하는 말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본령이라면 대한민국에도 조선중앙방송이나 로동신문 같은 곳 한두 개만 있으면 된다.
노 대통령의 이 말은 굉장히 파장이 컸고, 졸지에 기자들은 술, 밥 얻어먹으며 부탁받은 기사나 쓰는 사람으로 치부됐다. 오죽하면 당시 토론회에 풀 기자로 들어갔던 기자가 심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을까. 이 발언은 노 대통령 취임 반년도 안 돼 나왔고, 앞으로 벌어질 언론과의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임기 내내 언론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작 전쟁을 일으킨 주역이 자기는 인간관계와 기자 관리를 위해 함께 먹은 것도 아니고, 옆자리에서 먹은 것도 아니고, 식사 마치고 나가다가 마주친 청와대 출입 기자와 일면식도 없는 나의 밥값을 대신 내준 것이다. 내 한쪽 팔을 걸고 맹세하는데, 청와대 법인 카드로 샀을 거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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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옮겨 실은 것이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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