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20 : 북제 창업자 고환의 업적을 다 까먹은 아들 고담과 손자 고위 <O>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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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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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고연 낙마사와 고담의 즉위(AD561)
북제 고연이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토끼 때문에 놀란 말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 누태후는 고연의 상처를 살펴보고는 제남왕이 어디에 있는지를 세 번이나 물었는데 고연이 대답하지 않았다. 태후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 네가 죽였느냐?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나의 말을 듣지 않다니
네가 죽어도 마땅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고연은 태자 고백년이 너무 어리므로 동생 고담에게 황위를 내린다는 조서를 보내면서 당부했다.
‘ 고백년은 죄가 없는 어린아이다.
그가 즐거워 할 만 한 곳에 그를 풀어 놓아주고
앞 사람을 본받지 말거라.”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고예가 고담에게 급히 달려갔으나 고담은 그것을 믿지 못했다. 사람을 장지로 보내 진짜 형이 죽었는지 살펴보게 한 다음에야 조서를 받들고 황위에 올랐다.
팽성왕 고유가 태사 및 녹상서사가 되고 고귀언은 태부가 되었으며 평양왕 고엄은 태재, 박릉왕 고제는 태위, 단소는 대사마, 누예는 사공, 고예는 상서령, 임성왕 고개는 상서좌복야,병주자사 곡률광은 우복야가 되었다. 고원해는 시중의 자리를 맡았다.
<98> 고귀언 축출(AD562)
태부 고귀언은 쿠테타의 주역이었으므로 고연 때 후한 대우를 입고서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황족을 능멸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주군이 바뀌자 고귀언에 대한 비판이 물 끓듯 제기되었다. 시중 고원해, 어사중승 필의운, 황문랑 고건화가 그의 단점을 지적하며 말했다.
“고귀언의 위세와 권력이 주군을 놀라게 하고도 남습니다.
반드시 재앙과 난리가 따를 것입니다.”
고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귀언을 태부 자리에서 내려 기주자사로 내보냈다. 술자리를 돌아다니던 고귀언은 기주자사 임명장을 하루가 지나도록 몰랐다. 다음 날 예전처럼 조회에 참석하려고 궐문에 이르렀다가 더 이상 태부가 이닌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이 놀라고 당황했지만 고담이 특별히 돈과 재물을 후하게 많이 내렸으므로 아무 불평 없이 절하고 돌아섰다. (AD562)
<99> 고원해 삼인방과 고담이 총애한 화사개의 등장(AD562)
고담의 곁에는 시중 고원해와 어사중승 필의운과 황문랑 고건화라는 삼인방 총신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의지하며 돕고 도움을 받는 조직이 되었다. 그런데 고담에게는 평소 아끼는 악사 화사개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비파연주를 아주 잘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오락과 유희에도 재능이 있어서 고담이 총애하던 사람이었다. 승진도 빨라서 행참군에서 급사황문시랑으로 올라갔다. 고원해 삼인방은 당연히 화사개를 질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했다. 화사개 또한 고원해가 자신을 밀어내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화사개는 고담에게 고원해 무리들이 당을 짜고 위세와 복록과 인사를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조용히 일러바쳤다. 고담은 점차 삼인방을 멀리했다. 다만 필의운은 화사개의 능력을 재빨리 파악하고는 뇌물을 주고 아부하여 화사개의 마음을 사는데 성공했다.
<100> 누태후 사망과 고귀언 반발(AD562)
고환의 부인이자 고징과 고양과 고연과 고담의 생모인 누태황태후가 62세 고령으로 죽었다.고담은 옷을 상복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붉은 도포를 그대로 입고 다녔다. 얼마 안 되어 삼대에서 풍악을 올리고 술을 예전처럼 마셨다. 궁녀가 하얀 상복을 올렸는데 땅바닥에 팽개치고 말았다. 산기상시 화사개는 풍악을 멈춰야 한다고 지적하자 고담은 취기에 화를 내며 화사개를 내리쳤다.
고귀언이 기주자사가 되어 기주에 이르렀는데 속으로 편치 못했다. 고담 황제가 진양(태원)으로 들어가면 그 때 업을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귀언의 부하 여사례가 그런 그의 생각을 몰래 조정에 고해바쳤다. 대사마 단소와 사공 누예는 즉시 조서를 발동하여 고귀언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만 군사를 지니고 있던 고귀언은 기주 성문을 닫고 버티었다.
고담은 기주출신 봉자회를 보내 기주 사람을 설득하면서 항복을 권유했다. 성 안 사람들은 서둘러 성 밖으로 도망쳐 나와 항복했다. 고귀언은 소리 높여 울부짖었다.
“ 지난날 고연황제가 붕어하셨을 때 나의 군사는 백만을 헤아렸는데
그 때에도 달려가 고담 폐하를 받들고 맞이하였다.
그때에도 반역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어찌 반역을 하겠는가.
못된 측근 고원해 필의운 고건화 무리가 주상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여서
충신을 역적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이 세 사람만 제거된다면 곧바로 성 밖으로 나가서 스스로 목을 자르리라!”
고귀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고귀언이 단기로 달아났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붙들려 업성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자손 15명과 함께 기시되었다.(AD563년 7월) 고귀언이 전에 고악을 참소한 적이 있으므로 고귀언 집에 있던 노복 100여명은 모두 청하왕 고악의 후손에게 주었다.(AD562)
<101> 고담의 이조아(고양 부인) 간통과 포악함(AD562)
고담이 형 고양의 부인 이씨(이조아)를 간통하려고 했다.
“ 만약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네 아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이후는 두려움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씨가 임신을 했다. 이씨의 둘째아들 태원왕 고소덕이 궁궐에 이르렀으나 어머니를 만날 수가 없었다.
“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어머니가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닙니까!”
이씨는 여자이이를 낳았는데 부끄러워서 기르지를 않고 버렸다. 고담이 화가 나서 이씨를 꾸짖었다.
“ 네가 내 아이를 기르지 않겠다면
내가 어찌 너의 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고담은 이씨를 세워놓고 고소덕을 칼로 찢어 죽였다(刀環筑殺). 이씨가 통곡하자 고담은 이씨를 발가 벗기고 매질을 그치지 않았다. 이씨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고담은 이씨를 비단에 싸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 참 지난 뒤에도 이씨가 죽지 않자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태워 묘승사 벌로 보내 비구니로 만들었다. 호삼성 같은 후대 사가들은 고담의 잔학함이 형 고양의 행동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고담과 화사개 사이의 관계를 보면 고담의 성적 취향에 비정상적인 부분이 많다고 여겨 진다.
<102> 고담의 공신 고원해가 무능으로 쫒겨남(AD563)
고원해는 필의운과 황문랑 고건화와 함께 고담의 삼인방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책인 시중으로서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고담은 매일 술을 즐기면서 향락에 빠져있었고 국사는 오로지 고원해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원해는 능력도 달리고 비속하였으므로 위수를 상서우복야로 임명했는데 이 사람 또한 재주는 있었으나 겁이 많고 옹졸하여 업무를 회피하다가 며칠 만에 직에서 쫓겨났다.
이를 보다 못해 연주자사로 외지에 나가있던 필의운이 해야 할 일의 순서와 방법을 써서 고원해에게 보냈는데 고원해가 궁궐로 서두르며 들어가다가 그 편지를 떨어뜨려 잃어버렸다. 급사중 이효정이 그 편지를 습득하여 고담에게 올렸는데 이로부터 고담은 칠칠치 못한 고원해를 멀리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이효정을 중서사인으로 임명하여 황명의 수납을 온전히 담당하게 하고 필의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 대 고담의 총애를 받고 있던 화사개가 고원해를 비판하자 고담이 고원해에게 말채찍 60번을 직접 때리면서 말했다.
“ 너는 나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가르쳐서
동생이 형을 배반하라고 꼬드겼으니 얼마나 의롭지 못한가.
또 업성의 군사로 병주를 대항하게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고원해는 연주자사로 내쫓겼다.
<103> 고담의 화사개 총애(AD563)
고담이 화사개를 총애함이 지나쳤다. 고담이 정무를 보든지 연회를 열든지 항상 화사개는 옆에 있었으며 잠깐 사이라도 떨어지면 고담이 불안해했다. 여러 날 집으로 가지 않고 궁궐에 머무는 날이 많았고 하루에도 여러 번 독방으로 불러 들어가기도 했다. 놓아준 다음에도 다시 쫓아가 부르기도 했으며 돌아오지 않으면 또 다시 기병을 보내 독촉하기도 했다.
화사개는 간사하게 아첨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매번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여 고담을 즐겁고 기쁘게 만들었다. 당연히 고담이 화사개에게 내린 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좌우에서 시종할 때의 언사가 매우 비열하고 무례하여 군신간의 예의나 질서를 온통 무시하였다. 항상 이렇게 고담에게 말했다
“ 천하 명군 요순이나 혼군 걸주나 무엇이 크게 다르겠습니까.
폐하께서는 혈기가 왕성하신 연세이시니
뜻하는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십시오.
하루의 즐거움은 천 년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하들이 국사를 잘못 다룰까 염려하시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나라는 잘 굴러가게 되어있습니다.”
고담은 나라가 제대로 잘 굴러간다는 말에 흡족해 하면서 오락놀이에 빠져들었다. 이 때 고담의 주변에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사람은 화사개를 중심으로 조언심, 원문요, 당옹, 풍자종, 호장찬 이렇게 여섯 명이었다.
북주-돌궐의 북제 침공(AD563-AD564)
북주가 돌궐의 목간가한과 연합하여 북제를 칠 계획을 꾸몄다. 북주는 목간가한의 딸을 받아들여 황후로 삼기로 하고 양천과 왕경을 돌궐에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맺었다. 당시 돌궐은 지금의 몽골과 내몽골 지역 전역을 차지하는 막대한 세력이었다.
북제에서는 북주과 돌궐 연대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선물과 혼인관계를 가지고 연대를 제의하였다. 목간가한은 북제의 조건이 북주의 조건보다 훨씬 더 나았으므로 북주 사신 양천과 왕경을 압송하여 북제로 보낼 생각이었다. 양천이 목간가한을 크게 꾸짖었다.
“ 태조(우문태)께서 옛날에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돈독히 하고
연연부락 사람들이 투항해 오면 하나같이
그대에게 보내 그대가 기쁘게 받았는데
그 은혜를 저버리고 부정하게 행동하다니
하늘의 귀신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목간가한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대의 말이 맞다.
내 뜻은 결정되었으니 로 더불어 동쪽 적(북제)을 물리치도록 한다.
그런 다음에 내 딸을 보내겠다.”
목간가한이 양천과 왕경을 돌려보냈다. 북주에서는 주국 양충이 1만 기병을 거느리고 돌궐군과 함께 북쪽으로부터 내려오고 대장군 달해무는 3만 보병을 거느리고 평양(산서성 임분)을 거쳐 북제의 수도 진양에서 합류하도록 계획했다.
북주의 양충은 파죽지세로 북제의 북쪽지역 성들을 함락시켰다. 돌궐에서는 10만의 기병을 보내와 세 갈래로 나누어 항주(산서성 대동시)로 내려왔다. 북제의 고담은 업에서 서둘러 진양으로 달려왔다.
북제의 곡률광은 보병 3만을 가지고 평양 방어에 임했다. 고담은 궁녀들에게 군복을 입혀 수행하게 하면서 틈만 있으면 동쪽으로 피할 생각이었다. 고예와 고효완(고징의 아들)은 강력하게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전군을 통솔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담은 6군의 통수권을 고예에게 내려주는 한편 병주자사 단소가 전쟁의 총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가까스로 북제군이 위용을 갖추고 전쟁에 임하는 동안 진양 북성 주변에 몰려온 돌궐은 북제 군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돌궐의 장수가 말했다.
“ 너희들이 지난 번 북제의 군사기강이 흐트러졌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다.
눈에는 쇠의 기운이 보인다.(안중유철)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돌궐과 북주의 군대가 먼저 공격해 들어왔지만 눈이 많이 내린 까닭에 북주와 돌궐의 기병 움직임이 둔하여 북제의 단소가 훌륭하게 방어해 낼 수 있었다. 단소는 패주하는 돌궐과 북주를 쫓아가지 않고 수비에 치중했다.
<103> 곡률광의 탄식(AD564)
평양을 공격하던 북주 달해무는 진양전투에서 양충이 패부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북제의 사공 곡률광이 그에게 편지를 띄워 보냈다.
“ 큰 기러기는 이미 달아났건만
그물 치는 어부는 아직도 습지를 쳐다보고 있구나.”
달해무는 그제야 양충이 후퇴한 것을 깨닫고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곡률광은 서둘러 진양으로 달려갔다. 고담은 큰 환난을 겪은 공포에 곡률광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임성왕 고개(고담의 동생이다)가 나서서 말렸다.
“ 어찌 이렇게 나약함을 보이십니까. ”
고담이 울음을 그쳤다. 고양이 집권할 때(AD550-AD559)만 하더라도 북제가 두려운 북주는 겨울이면 황하의얼음을 깨어서 군대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제는 바뀌어 북제가 겨울 강바닥을 깨는 형편이 되었다. 곡률광은 이렇게 된 것이 고담이 집권하면서 형편없는 인간들이 조정을 휘두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는 항상 관(관중지역)과 농(농서지역)을 삼킬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오로지 음악과 여색만 맑히고 있으니
앞으로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
<104> 북제의 율령반포(AD564)
북제는 오랜 숙원사업이던 율령체계를 완성했다. 율은 12편이었고 령은 40권이었다. 형벌은 크게 다섯 종류였는데 사, 유, 형, 편 및 장으로 되어 있었다.
①死 : 환열-효수-참수-교수의 네 등급
②流
③刑 : 1년 - 5년의 5등급
④鞭 : 40대 - 100대의 5등급
⑤丈 : 10대 – 30대의 3등급
일 년 전 북주가 마련한 25등급(각 등급마다 다섯 계단) 형벌체계 보다는 간결하였다. 18세가 되면 나라로부터 경작지를 얻게 되는데 그 대신 租(토지소득세)와 調(지역특산물세)를 내어야 한다. 또한 20세 이상 60세 까지는 반드시 병역에 동원되어야 한다. 66세가 되면 토지를 돌려주되 세금부담이 없어진다. 결혼한 한명은 80무, 부인은 40무, 노비는 성인으로 간주되었다. 소를 가진 사람은 추가로 60무를 받았다.
한 가정의 특산물세(調)는 비단 1필과 면 8량이었다. 토지세인 조租는 통상 2석이었다. 노비에 대한 조租는 양인의 절반이었다.
<105> 고담이 조카를 죽임(AD564)
고담은 상서령 고예를 최고행정직인 녹상서사로 임명하고 사도 누예를 태위로 삼았다. 태부 단소는 태사로, 임성왕 고개는 대장군이 되었다.
이 때 이상한 하늘에 징조가 나타났다. 겹 무지개가 태양을 둘러쌌는데 태양이 무지개를 지나치려고 해도 뚫지를 못했다. 그리고 밤에는 붉은 별이 나타나기도 했다. 고담은 불길하다고 생각하고 형 고연의 맏아들 고백년을 통해서 사전에 액땜하기로 했다.
당시 여덟 살이던 고백년이 스승에게 글을 배우면서 ‘칙勅’이라는 글자를 여러 번 쓴 적이 있었는데 스승이 그것을 봉함하여 고담에게 건넸다. 고담은 황제만 쓸 수 있는 칙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쓴 고백년을 소환했다. 어린 고백년은 이 사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패옥과 요대를 풀어 벗고 부인 곡률씨에게 맡기고 황제 고담에게로 갔다.
고담은 고백년에게 칙자를 써보라고 한 다음에 자신이 갖고 있는 글자와 비교하여 동일함을 확인했다. 고담은 주변에게 명하여 마구 채찍질을 하도록 한 다음 피를 흘리는 고백년을 끌고 당하로 내려가 또 때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을 잃고 몸이 늘어지자 칼로 고백년의 목을 벤 다음 시신을 연못에 던졌다. 연못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낙릉왕비 곡률씨는 패옥을 쥐고 며칠을 울며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는데 손에는 끝까지 패옥을 놓지 않았다. 아버지 곡률광이 딸의 손을 펴고 나서야 쥔 손이 풀렸다.
<106> 북제가 우문호 모친을 돌려보냄(AD564)
북주 태조 우문태가 하발악을 따라 관중으로 갈 때 우문태의 어머니 염씨와 고모들은 모두 진양에 살고 있었다. 북제와 북주 사이가 나빠지면서 북제는 염씨와 고모들을 모두 궁궐 하녀로 배속시켰다. 우문태가 죽고 동생 우문호가 집권하면서 북제에 간첩을 들여보내 어머니를 찾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북제가 북주에 사람을 보내 옥벽(산서성 직산)에서 물자교류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우문호가 그것을 허락하면서 이 기회에 어머니를 찾도록 지시하였다. 동시에 사람을 북제 조정에 보내 서로 통교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북주가 돌궐과 함께 진양을 공격한 것이 일 년도 되지 않았고 또 북주가 돌궐과 함께 재침공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북제는 흔쾌히 수교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호의를 보이는 뜻으로 우문호의 모친 염씨와 고모를 모두 장안으로 돌려보내기로 약속하고 먼저 고모들만 보냈다.
우문호의 고모가 돌아올 때 북제에서는 우문호의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우문호 어릴 적 몇 가지 일을 적어서 알리고 동시에 어머니 염씨가 입고 있던 비단 도포도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 신임의 증표로 삼게 하였다.
” 내가 천 년에 한 번 있을 천운을 만나
북제의 은덕을 깊게 받아서 지금 이날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또 너희를 만날 것을 허락받았다.
이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늘 이후 나의 삶은 오직 네 손에 달려있으니
어둡다고 하면서 속이고 나를 저버리려 하지마라“
우문호는 울면서 어머니에 대한 답신을 보냈다. 북제에서는 염씨를 인질삼아 우문호에게 편지를 여러 번 보내 확실한 불침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지만 편지만 몇 번 오고갈 뿐 확답은 없었다. 북제 고담은 진양에서 수비하고 있는 단소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단소가 이렇게 답했다.
” 주나라 사람들은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입니다.
통교하자고 해 놓고 아직 사신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먼저 어머니를 먼저 보내버리면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이 됩니다.
약속만 해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저쪽이 몸이 달아
확실한 약속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내도 늦지 않습니다.“
고담은 단소의 말을 듣지 않고 바로 염씨를 장안으로 보내버렸다. 우문호는 35년 만에 생모를 만났다. (계속)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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