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3> 최측근 전횡(D) 석현(石顯) 3인방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1) 효원제(BC49-BC33) 즉위와 고명을 받은 세 측근(BC49)
효원제의 아버지 효선제(유순, 재위 BC74-BC49)가 병석에 눕게 되자 사후를 부탁할 대신 세 명을 뽑아 황궁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외척이며 시중인 사고(史高)와 태자태부 소망지(蕭望之)와 소부 주감(周堪)가 그들이었다. 사고에게는 대사마 및 거기장군, 소망지에게는 전장군과 광록훈, 주감에게는 광록대부라는 직책을 주어 군권과 함께 실질적인 권한을 이 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외척 사고를 제외하면 모두 태자 유석(=효원제)의 스승이었으니 사실상 태자의 스승에게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12월 7일 효선제는 세상을 떠났다. 그 해 12월 26일 태자 26세의 유석이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이 효원제이다. 사고는 효원제의 할머니 쪽 친척이었지만 무능한 사람이었으므로 소망지와 주감이 주도적으로 행정과 인사를 주관하였다. 당연히 사고는 소외감을 느꼈고 소망지와 사이가 틀어졌다.(BC49)
(2) 환관 석현(石顯)과 홍공의 궁중 장악 (BC47)
복야 석현과 중서령 홍공은 효원제의 아버지 효선제 때부터 오랫동안 궁중 일을 담당하였으므로 궁정 내의 인사며 행정이며 모든 일을 꿰뚫고 있었다. 성인의 나이이긴 하였지만 병약한 효원제는 거의 모든 일을 석현 무리에게 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석현 또한 바깥사람들과 파당을 만들지 않으면서 오로지 외척 사고와 붙어 황제만 보살폈으므로 황제의 믿음은 말로 깊어 갔다. 크고 작은 일이 모두 석현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고 자주 황제를 뵙는 지위에 있게 됨에 따라 조정의 많은 관료들이 석현을 머리를 조아리며 존경했다. 석현은 교활하고 총명하였으며 일을 잘 익히고 인주의 미세한 뜻을 깊이 꿰뚫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마음속으로는 도적 같은 생각을 품고서 궤변을 가지고 사람을 중상 모략했으며 눈을 흘겼다는 이유만으로 가두어 죄를 주었다고 했다. 소망지는 외척 사씨와 환관 석현의 국정농단이 점차 심해짐을 크게 걱정하여 황제에게 상소했다. “ 황궁비서실(中書)은 정치의 근본이며 국가의 중추입니다. 마땅히 밝고 공정한 사람을 두어야 합니다. 한 무제가 궁중에서 놀기 위해 환관을 뽑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올바를 옛 법도를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환관을 내쫓아서 ‘죄를 지은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는다’는 예경의 법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당시 생각은 환관과 같은 사람은 ‘하늘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임> 이때부터 사고, 석현, 홍공이 세 사람은 서로 결탁하여 소망지와 대립하게 된다.(BC47)
정붕이라는 회계사람이 소망지에게 붙어서 한 자리 할 생각으로 소망지에게 편지를 올렸다.“대사마 거기장군 사고가 사사로이 사익을 도모했으며 외척세력인 사씨 집안과 허씨(황제의 외가)집안 자제들이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소망지가 편지를 주감에게 보여주자 정붕을 황궁의 작은 직책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직접 만나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망지가 만나 본 결과 정붕은 마음 가득히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불온한 생각으로 가득 찼음을 알고 왕래를 끊어버렸다. 원한을 품은 정붕은 그길로 허씨와 사씨에게로 달려가 “전장군 소망지의 작은 허물 다섯 가지와 큰 죄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허씨와 사씨 일당들은 곧바로 그 사실을 석현에게 알렸다. 석현은 소망지가 궁궐에 들어오지 않는 휴가 날을 선택하여 정붕을 시켜 황제에게 상소하도록 하였다.
“ 전장군 소망지가 황제의 가까운 외척 사씨와 허씨를 몰아내려고 책동하였습니다.” 황제는 그 사건을 석현과 일당인 중서령 홍공에게 내려 보냈다. 소망지는 “국가를 바로 잡으려고 한 것이지 나라를 뒤엎으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석현과 홍공이 상소하여 주장했다. “ 소망지와 주감과 유경지가 붕당을 만들어 서로 끌어주며 천거하면서 대신들을 참소하고 황제의 인척들을 이간질했으니 정위에게 내려 보내 더 철저히 수사해야 할 것입니다.” 황제는 정위에게 내려 보내는 것이 감옥에 가두는 것인 줄을 모르고 “그리하라”고 명령했다. 나중에 갇힌 것을 알게 된 황제가 황급히 풀어주라고 했다. 석현과 홍공은 사고를 찾아가 말했다.
“황제에게 강력하게 말씀드려서 면직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고의 강청에 못이겨 황제는 지난 날 스승이었던 소망지와 주감과 유경지를 모두 폐서인시켰다.
(3) 충신 소망지의 죽음(BC47)
폐서인시키기는 했어도 황제는 소망지와 주감과 유경지의 능력과 절개를 높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큰 지진이 일어나자 유경지가 외갓집 친척을 통해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다. “지진이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홍공과 석현 같은 무리들 때문이지 소망지와 주감과 유경지 때문이 아닙니다.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을 다시 쓰셔서 소통의 길을 여시면 재앙과 이변이 사라질 것입니다.” 상소문이 올라오자 석현과 홍공은 분명히 유경지의 짓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어 죄를 뒤집어씌워 가두어 버렸다.
그 때 소망지의 아들 소급이 예전의 아버지 소망지의 억울함을 다시 소송하는 편지를 올렸는데 이것을 본 석현과 홍공은 대신으로써의 체통을 잃고 아들을 시켜 다시 소송을 건 죄를 물어 소망지를 체포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황제가 망설이며 말했다. “원래 청렴하고 덕이 깊은 사람인 줄 내가 잘 아는데 어찌 그런 경박한 생각을 했을지 의심이 가는군요.” 황제가 체포시키는 것을 주저하자 석현이 나서면서 말했다. “ 그저 언어가 야뱍하다는 혐의일 뿐이므로 크게 죄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야박한 언어를 썼다는 죄로는 체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황제는 안심하고 체포를 허락했다. 12월 석현은 소망지에게 체포명령 조서를 보냈고 그의 집을 군사로 포위시켜버렸다. 소망지가 빈객 주운에게 어찌해야 할지를 묻자 자살을 권유했다. 소망지가 탄식하며 말했다. “ 일찍이 장상의지위에 있은 내가 나이 예순이 넘어 늙어서 감옥에 들어가며 살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 구차한 일이 아니겠는가?”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 황제가 그 사실을 알고 통탄하며 말했다. “내가 현명한 스승을 죽였구나.” 올라온 점심을 물리치고 온 종일 황제는 눈물을 흘렸다. 석현을 불러서 매우 심하게 꾸지자 석현은 이렇게 둘러댔다. “ 자세히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로 자살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해에 홍공은 병사하고 대신 석현이 중서령이 되었다.
(4) 경방(京房)의 충언(BC37)
경방(京房)이라는 사람은 역경(易經)의 대가 초연수(焦延壽)의 수제자로 재난을 예견하는 능력이 탁월했고 또 역사상 최초로 「인사고과제도」을 제안한 사람이다.
경방이 전한 효원제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나라 려왕(厲王)과 유왕(幽王)이 어떻게 주(周)나라를 멸망하게 했는지 아십니까?”
황제는 답했다. “일을 맡은 사람들이 간사했기 때문이오.”
경방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효원제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 간사하다는 것을 알고서 채용했습니까 아니면 총명하다고 생각하고 채용했습니까?”
황제는 “당연히 그들이 총명한 줄 알았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경방은 물었다. “그들이 현명하지 않았음을 어떻게 지금은 알 수가 있습니까?”
황제는 답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혼란해졌고 임금이 위태로워 졌으니 알게 된 것이오.” 경방이 물었다. “어찌하여 려왕과 유왕은 이를 깨닫지 못하여 불초한 사람을 등용시켜 나라를 어지럽힌 것입니까?”
황제가 말했다. “난세를 만나면 군주는 모든 자기 신하를 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오.”
경방이 다시 물었다. “주나라 려왕과 유왕의 교훈을 보고도 제환공(齊桓公)이나 진2세 황제(胡亥)이 수조나 조고를 쓴 것을 보면 역사를 보고 깨닫지 못한 것 아닙니까?”
황제가 말했다. “오직 도를 지닌 군주만이 과거 일을 가지고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뿐이오.” 경방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가 즉위한 이후로 수재와 한재와 명충의 피해가 있고 백성들에게는 굶주리고 돌림병이 돌고 있으며 도적질이 금지되지 않고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 저자에 가득하니 춘추에 기록된 모든 재변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보시기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까, 혼란스럽습니까.?“
놀란 황제가 말했다. “지극히 혼란하다고 생각하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오.”
경방이 물었다. “지금 모든 것을 맡기고 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황제는 대답했다.“그래도 지금이 이전 보다는 낫고 또 지금 어려운 것이 그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지 않소?”
경방이 말했다. “모든 이전 군주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신은 나중에 가서 오늘을 비판하며 황제를 욕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황제가 한참 있다가 물었다. “오늘날 어지럽히는 자들이 누구요?”
경방이 말했다. “밝으신 군주께서 의당 그 사람을 아십니다.”
황제가 말했다. “모르겠소. 만약에 안 다면 어찌 그들을 임용했겠소.”
경방이 말했다. “황제께서 가장 신임하시며 더불어 휘장 속에서 일을 도모하시며 천하의 선비들을 올리거나 내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황제가 마침내 말했다. “내가 이미 오래 전에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었소.”(BC37)
(5) 석현 삼인방의 경방 축출(BC37)
당시 실세는 중서령(中書令) 석현(石顯)과 중서복야 뇌양과 상서령(尙書令) 오록충종(五鹿充宗)이 쥐고 있었다. 석현과 뇌양과 오록충종 등의 무리들은 황제와 가까운 경방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래야 황제의 귀와 눈을 막아 마음대로 황제를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방을 쫓아내기 위해 짜낸 계략이 바로 경방이 제안한 「고공과이법(考功課吏法)」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고공과이법이란 그 사람의 실제 행정능력을 평가한 다음에 직책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법이다. 경방에게 행정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고찰하기 위해 지방직으로 내 보내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경방은 지방으로 좌천되기 싫었지만 정기적으로 황제께 직접 보고할 알현기회를 얻는다는 조건하에 지방직을 수용하기로 했다. 수시로 황궁으로 갈 기회를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석현무리들은 경방의 알현기회를 즉시 무효화시켰다. 경사로 올라와 황제를 만날 기회를 석현 삼인방들은 봉쇄했다. 경방은 할 수 없이 황제에게 밀봉한 친서(封書)를 올렸다. 이 봉서마저 황제의 책상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경방을 모함하여 참혹하게 처형되고 말았다.(BC37) 석현과 홍공과 오록충종 일당을 비판한 사람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게 되어 그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걸을 때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발을 포개어 걸을 정도(重足一足)라고 했다.
(6) 나쁜 여론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계략
자기들에 대한 나쁜 여론을 누구보다도 석현 삼인방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그들이 쓴 수법은 방패막이 허수아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절개가 높고 평판이 좋은 공 우(貢禹)를 추천하여 간대부에 임명하여 예를 갖추어 대우하는 척 하였다. 간대부란 황제에게 쓴 소리를 올리는 직책이다. 그러나 명색만 간대부였지 실제로 공우는 전혀 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석현 삼인방은 더 교활한 계교를 고안해냈다. 석현은 야간 언제라도 황궁의 문을 열고 드나들 수 있는 야간통행증을 부탁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고의로 밤늦게 궁으로 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히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발했다.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면서 이 고발장을 석현에게 보여주었다. 석현이 울면서 말했다.“폐하께서 지나치게 소신을 사사롭게 대하시고 일을 부탁하시니 질투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신을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신이 바라기는 중책을 뺏으시고 그저 후궁 청소 일만이라도 하게 하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폐하의 저를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만이 저를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석현을 가엽게 여긴 황제는 후한 상을 내려주며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총애하였다.
(7) 효원제의 사망(BC33)과 석현의 몰락(BC32)
평소 병이 많았던 효원제는 BC33년 5월 24일 미앙궁에서 죽었다. 43세였고 16년 간 재위했다. 황후 왕정궁에게서 난 태자 유오가 황제가 되었다. 효성제(BC33-BC7)다. 황제가 바뀌자 승상과 어사대부가 곧바로 석현의 죄목을 낱낱이 들어 올렸다. 석현 무리인 뇌양과 진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는데 석현은 걱정과 근심으로 밥을 먹지 못하다가 돌아가는 길에서 죽었다.(BC32) 효성제가 들어서면서 황실은 황후 왕정군의 왕씨 일족의 전횡에 휩싸이게 된다. 이 왕씨의 일족 왕망 때문에 결국 전한은 멸망된다.(AD6)
사마광(司馬光)은 이렇게 평론했다.“인군의 덕이 밝지 못하면 신하가 충성을 바치려고 해도 어찌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경방의 충언이야 명백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효원제는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시경>에 이렇게 말했다. ‘얼굴을 맞대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귀를 잡아당겨 말했다. 손으로 잡아끌었을 뿐 아니라 사실을 보여주며 말하였다. 그대에게 가르치면서 거듭거듭 말 했지만 나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듣는다.’는 말이 효원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순열(荀悅)은 이렇게 평론했다. ”공자가 말하였다.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라. 정치는 올바름이라. 올바름이 위에서 쌓이면 만 가지 되는 아래 일도 절로 알차게 되는 법이다.(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顔淵17)“ <ifs POS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