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B)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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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7) 모용외가 동진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보고(AD320)
최비와 우문씨와 단씨의 연합군을 대파한 모용외는 주부 송해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승전소식을 건강의 동진 황제에게 보고하기로 하여 송해가 쓴 표문을 가지고 배억을 건강에 보냈다. AD320년 3월 건강에 도착한 배억은 승전을 바침과 동시에 모용외의 위엄과 총명함과 어진 것을 대단히 칭찬하였으며 그로 인해 온 천하 인재가 그에게 몰린다고 말하였다. 사마예는 모용외는 물론 배억의 인물됨을 인상 깊게 여기고 중시하기 시작했다.
” 경은 중조의 뛰어난 신하이니
마땅히 강동에 머물면서 나를 보필하시오.
용양장군에게는 별도로 지시를 내려 온 가족을 이리로 모시게 할 것이요.“
배억이 이렇게 말했다.
” 신이 젊어서 나라(서진을 말함)의 은혜를 입었고 궁정을 출입했으니
다시 황제를 모시게 되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옛날의 도읍(장안과 낙양)이 망해버렸고
황제의 능묘들은 뚫리고 황폐해 졌는데
비록 뛰어난 신하와 장수라 하더라도 이 치욕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용양장군만이 황실에 충성하였고 속으로 흉악한 적들을 소탕할 생각으로
가득 차있으니 소신을 보내어 소식을 정성껏 보고 드리게 한 것입니다.
지금 신이 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용양장군부 조정에서는 반드시 이족을 버리고 화족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것인즉
이는 의로운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하는 마음을
외롭게 하여 도적을 토벌하는 일을 게을리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것이 제가 사사로운 것을 좇지 않으며 공적인 것을 잊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사마예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대 말이 지극히 옳다.”
사자를 배억과 함께 보내 모용외에게 안북장군, 평주자사의 벼슬을 내렸다.
(8) 후조 석호가 유주자사 단필제 공격(AD321)
이년 전 건국한 후조의 중산공 석호는 동북 지역의 단씨일가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수하 장수 공장과 함께 염차(산동성 혜민현)에서 단필제를 공격해 들어왔다. 단필제의 동생 단문앙이 형 단필제에게 말했다.
“ 저는 용맹으로 소문이 난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그래서 저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허나 지금 석륵의 공격을 받고도 구원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신망을 잃게 됩니다.
한 번 신망을 잃게 되면 누가 다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그리고는 장사 수 십 명을 데리고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말의 지쳐서 기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석호에게 포위되었다. 석호가 말했다.
“ 형과 나는 모두 이적 출신 아니요.
오랫동안 형과 더불어 한 집안처럼 살고 싶었소,
오늘 하늘이 기회를 주어 이렇게 만나게 했으니
칼을 놓으시고 제 손을 잡으시오.“
단문앙이 석호에게 욕을 퍼부었다.
“ 너는 한낱 도적일 뿐이다.
오래 전에 내가 죽여야 했는데
내 형님(단필제)가 내 계략을 쓰시지 않아서 네거 지금껏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싸우다 죽었으면 죽었지만 네게 항복할 수는 없다.“
단문앙이 끝까지 싸움으로 버티려 했으나 여덟 시간 정도 항전하다가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성 안에 남아있던 단필제는 동진 조정이 있는 건강으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무력으로 반대하면서 석호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었다. 단필제는 석호에게 말했다.
“ 나는 서진 조정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서
장군에게 예를 바칠 수가 없소.“
후조 왕 석륵과 석호는 평소 단필제와 형제관계를 맺었으므로 석호가 일어나 그에게 절을 하였다. 석륵은 단필제에게 관군장군의 자리를 주고 단문앙에게는 좌중랑장을 내렸다. 그리고 포로 3만여호를 다시 돌려보내 본업에 종사하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이에 따라 유주, 기주, 병주 등지가 후조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왔다.(AD321)
(9) 모용외가 거기장군이 되다(AD321)
AD321년 12월 동진 조정은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제군사, 거기장군 및 평주목의 직을 내리고 요동공의 작위를 하사했다. 모용외는 예에 따라 배억과 유수를 장사로 임명하고 배개는 사마, 한수는 별가로 등용했다. 양탐은 군사좨주, 최도는 주부 그리고 황홍을 참군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아들 모용황을 세자로 세웠는데 모용황은 당시 24세로써 체구가 크고 강하였으며 권모와 지략을 많이 갖추었으므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모용외는 또 다른 아들 모용한을 옮겨서 요동에 진수시켰고 모용인은 평곽(요녕성 개평)에 주둔시켰다. 이들 모두 똑똑하고 부지런했으며 위엄도 있고 현명했으므로 그 지방 이민족을 잘 다스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0) 후조 석륵의 모용외 공격과 성공적 방어(AD325)
후조의 석륵은 모용외의 명성을 이미 듣고 있었으므로 그를 포섭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안하였다, 모용외는 그 사자를 잡아서 건강으로 보내버렸다.(AD323) 당시 석륵은 하북지역의 최강자로써 도읍 양국(하북성 형태)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내몽고로부터 남쪽으로는 장강 중류까지 아우르는 초강대국이었다. 이런 초강대국의 우호제안을 거부한 모용외를 석륵이 가만 둘 이유는 없었다. 석륵은 우문걸득귀에게 사신을 보내어 관작을 높여주고서 모용외를 치도록 권유했다.
모용외 또한 석륵의 제안을 거부하고서 그냥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세자 모용황과 색두 단국 등을 파견하여 반격하도록 지시했는데 우익은 배억에게, 좌익은 모용인에게 맡겼다. 우문씨는 요수(내몽고 서납목륜하)를 점거하고서 모용황을 막았고 우문실발웅은 모용인을 방어했다. 모용인의 군대는 우문실발웅의 군대를 쉽게 깨뜨리고 그의 목을 잘랐으며 곧바로 모용황 군대와 합류하여 우문걸득귀를 토멸하였다.
(11) 단말배의 죽음(AD325)
요서공 단말배와 요동공 모용외는 서로 국경이 닿아있는 관계로 서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모용외는 아들 모용황을 보내 단말배의 근거지인 영지(하북성 천안현)을 습격하고 백성 1천 여 호를 약탈하도록 했다.(AD322) 단말배가 AD325년 3월에 죽자 그 동생 단아가 권력을 장악했는데 단아는 모용외와 다투기를 싫어했다. 모용외는 단아에게 권하기를 도읍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자 단아가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단씨 부하들은 그런 결정에 불만이 가득찼다. 단질육권의 손자 단료가 일어나 수도 이전의 죄를 물어 단아를 공격하여 죽였다. 당시 단씨의 세력은 서쪽으로는 북경의 밀운현으로 부터 동쪽으로는 요수까지 펼쳐져있었으며 3만여 호에 활을 쏘는 기병이 4-5만이 넘는 대 세력이었다.
(12) 석륵의 황제등극과 모용외의 토벌제의(AD331)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조의 석륵은 석호가 요동지역을 장악한 데에 이어 AD325년 호뢰관 전투에서 유요의 전조대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후조의 석총이 동진의 예주(안휘성 수춘)를 격파하였다. 이제 석륵의 후조는 황하가 이북은 물론 회하를 넘어 장강지역까지 넘보는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는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동진 조정은 왕돈의 전횡과 황제 사마예의 사망(AD323)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태자 사마소가 사공 왕도의 지지를 받고 황위에 올라 충신 치감의 도움을 받아 왕돈의 정권농단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치혼란은 왕돈이 왕도-온교-치감의 토벌될 때(AD324) 까지 이어졌다. 이 후 명제 사마소가 AD326년 갑자기 사망하고 다섯 살짜리 태자 사마연을 대신하여 유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소준과 조약의 반란이 일어났고 동진 조정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모용외는 동진의 태위도간에게 쪽지를 보내 팽창하고 있는 석륵을 함께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모용외의 측근 송해가 이렇게 말했다.
“ 아무리 전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공의 신분은 모퉁이 지역의 수장에 불과하니
북벌을 하더라도 화족과 이족을 아울러 지휘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따로 표문을 올려서 먼저 공의 관작을 높여야 합니다.“
참군 한항이 반박하면 말했다.
“ 무릇 공로를 세우는 것은 믿음과의로움으로 하는 것이지
명성과 지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환공과 진 문공은 먼저 광복(匡復)의 정의를 구했지
예명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의당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여 흉악한 무리를 먼저 제거하면
구석은 저절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모용외는 한항의 말이 달갑지 않았다. 그를 외직으로 내치고 말았다. 그리고 동이교위 봉추 등을 시켜 도간에게 편지를 보내 모용위에게 연왕에 책봉하고 대장군의 칭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도간이 회답을 보내왔다.
“ 무릇 공로를 올리면 작위가 올라가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제도요.
거기장군(모용위를 이름)께서 비록 조정을 위하여 석륵을 꺾기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충성심과 의로움을 다하고 있으니
내 지금 쪽지를 올려 조정에 요청하겠소.
다만 빨리 되고 안 되고는 황제의 결정에 있다고 하겠소“
(13) 모용외의 죽음과 모용황의 세습과 동생의 쿠테타 음모 (AD333)
AD333년 5월 6일 무선공 모용외가 죽었다. 세자 모용황이 6월에 평주자사의 직책을 대리했다. 장사 배개를 군자좨주로 삼고 고후를 현도태수로 임명했다. 대방태수 왕탄을 좌장사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요동태수 양무를 추천하자 그를 좌장사로 지명하고 왕탄은 우장사로 등용했다.
모용황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던 반면 서형 모용한(翰)과 동복동생 모용인과 모용소는 총명하면서도 용기가 있고 또 인자하여 아버지 모용외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당연히 모용황이 시기하고 질투했다. 모용한(翰)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가족을 이끌고 단씨에게로 도망갔다. 모용인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돌아온 참에 동생 모용소에게 말했다.
“ 형님(모용황)이 까다롭고 엄격하시니 장차 우리의 신변이 걱정되오.”
모용소가 말했다.
“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적자입니다.
당연히 일정한 나라의 몫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의심받을 일을 한 적이 없으니
틈을 보다가 일을 일으키면 됩니다.
형님이 바깥에서 군대를 가지고 오시면
나는 안에서 호응하겠습니다.
성공하는 경우에 저에게 요동을 주십시오.
남자가 일을 벌여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건위장군(모용한)처럼 이역에서 구걸하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요.“
모용인이 말했다.
“ 좋소.”
모용인은 임지인 평곽(요녕성 개평현)으로 돌아갔다. 그런 뒤 10월에 모용인은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어떤 사람이 모용인과 모용소가 모의한 것을 밀고를 하니 모용황은 믿을 수가 없어서 사람을 모용인에게 보내 조사하도록 했다. 모용황의 사자가 도착하자 모용인은 계획이 탄로 났다고 판단하고 사자를 죽였으며 즉시 평곽으로 돌아가 점거하면서 수성자세에 돌입했다. 모용황은 모용소에게 자진을 명령하고 고후,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모용한 등을 보내 모용인을 토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모용인의 수비군사들은 모용황의 토벌군을 격파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이 사로잡히고 모용한과 봉혁은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 지역의 모용황의 군사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모용인이 요동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단료와 선비족의 여러 부족들이 강퍅한 모용황에 대하여 반기를 들면서 모용인과 서로 연대하고자 하였다. 모용황은 이 때에 비로소 자신의 엄격한 통치에 대하여 반성하고 그 부분을 항상 지적하던 황보진을 평주별가라는 중책에 임명했다. <다음에 계속>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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