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서의 경제정책…낙서도 작품일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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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전혀 예술적인 행위가 아니지만 경제정책을 ‘예술(art)’이라고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학자들이 경제정책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다양하다. 근본적으로는 아마도 경제정책이 가지는 미묘함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같은 정책일지라도 시대와 상황, 지역과 나라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경제정책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경제정책이 의도한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다. 특히 상황에 따라 경제주체들의 생각, 기대, 예측을 바꿀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세계 역사에서 경제정책이 일상적인 관심사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발생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때이다. 거시경제학이 경제학의 한 연구 분야로 탄생한 배경도 대공황이다. 대공황 이전에 지금과 같이 단기적인 변동을 다루기 위해 상시적으로 거시경제정책을 고민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안다. 대공황의 원인에 관한 학설은 아직도 분분하다. 여기서는 그에 관하여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지만 ‘정책을 왜 예술이라고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경제정책을 도입하여 대처한 것은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였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1933년 3월 4일이다. 당시에는 미국 대통령 취임이 1월이 아니라 3월에 이뤄졌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국민의 일자리를 복원하고, 저축을 보호하며, 병자와 노인을 구호함으로써 번영을 도모하는 것이 첫 번째 우선순위임을 천명하고 농업과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첫 100일 동안에 13개의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다.
루스벨트는 이와 같은 정책을 천명함과 동시에 취임한지 불과 8일 만에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는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노변정담을 통해 루스벨트는 마치 이웃의 누구가인 것처럼 통상적인 언어로 국민의 관심사인 정책과 대통령의 생각을 설명하고 알림으로써 국민에게 희망과 의욕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달라진다는 인식과 기대를 심어주었다. 실업률이 25%나 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따뜻한 격려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과감한 정책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감동적이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비로소 미국인들은 무언가 달라진다는 희망과 기대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1960년대는 번영의 시대였다. 이론적으로도 대공황 이후 주류로 자리 잡은 케인즈 학파 경제학이 가장 잘 들어맞은 시기였다. 케인즈 경제학의 근간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필립스곡선(Phillips curve) 또한 그 어떤 시대보다 잘 들어맞았다. 따라서 당시 많은 학자들 사이에는 통화증가율의 변화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조정함으로써 정부가 원하는 수준의 실업률을 마음대로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하였다. 당시의 학자들 가운데에는, 설명하고 처방하지 못할 경제문제가 없기 때문에 이제 경제학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존재할 지경이었다.
미국의 1960년대는 정부지출이 크게 확대된 시기였다.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뉴프런티어(New Frontier)’로 시작하여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을 통해 빈곤과 인종차별의 완전한 퇴출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예산적자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전쟁에 대해 진보와 보수로 국론은 분열되고 경제적으로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70년대의 불길한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거시경제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가 패착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미국경제학회 회장에 취임한 이가 바로 일찍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다. 취임에 즈음하여 1968년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필립스곡선이 경제주체들의 생각 곧 기대(예상)에 달려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실업과 인플레이션의 역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을 발표하였다. 인플레이션이 높아질 때 사람들의 인플레이션 기대 또한 높아지기 때문에 임금, 원자재 등의 가격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인플레이션이 높게 상승한다고 하여도 실업률이 낮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마치 무슨 예언처럼 1970년대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리고 유가충격과 함께 실업률이 오히려 인플레이션과 함께 증가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는 자원민족주의 때문에 원유가격과 원자재 가격이 급속히 상승한 시기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이란 혁명에 따른 갈등과 함께 2차 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1960년대 설익은 낙관론이 틀렸음을 웅변으로 보여준 것이다. 튼튼한 이론과 현실에 기초한 정책만이 사람들의 생각(기대)을 바꿀 수 있고 정책의 효과를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 엄중했던 만큼 1970년대는 프리드먼의 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책에 관한 이론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특히 시카고대학의 석학 루카스(Robert E. Lucas, Jr.)가 주장한 소위 ‘루카스 비평(Lucas critique)’은 올바른 정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는 경우 정책이 일반대중의 생각(기대, 예상)을 어떻게 바꾸게 되는지 까지를 고려하여 효과를 분석한 다음 시행하여야만 엉뚱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규칙을 바꿀 때 그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미리 분석한 다음 규칙을 바꿔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의 이론적인 천명이었던 것이다.
한편, 레이건(Ronald W. Reagan)은 인플레이션을 포함한 온갖 거시경제의 문제를 안고 1981년 1월 미국의 4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것은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볼커(Paul A. Volker)의 첫 번째 우선순위였다. 그는 미국의 통화증가율을 급속히 감소시킴으로써 2년 안에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실업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한결같은 낙관주의로 미국 국민에게 신뢰와 감동을 주었고, 그 결과 그의 첫 임기 마지막 즈음이 되어서는 미국경제가 건실한 성장과 높은 고용을 달성하기 시작하였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건실한 성장에 관한 대통령과 국민의 낙관적 기대가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 획기적으로 발전한 경제정책이론의 핵심은 경제주체들의 생각, 기대, 예상이 정책효과를 결정하는 핵심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의 기대에 어긋나거나 경제주체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책은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만 양산하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의 경제정책은 대체로 모두 그와 같은 정책들뿐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이 세상에는 없는 이론, 꿈같은 이론, 저승의 이론, 불온한 이론인 소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도그마 아래 시행한 정책들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노동시간의 강제적인 단축, 법인세 인상, 비정규직의 무리한 정규직 전환 등 이 나라의 경제현실을 전혀 무시한, 경제주체들의 기대를 부정적으로만 바꾸는 그런 부류의 것들뿐이었다. 이런 현실을 방치한다면 문재인 정부의 앞으로 2년여는 지극히 비관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지난주에는 경제부총리 주재로 경제관련 장관과 관계자들이 모여 ‘경제활력대책회의’라는 모임을 갖고 올해 하반기에 시행할 경기부양책이라는 것을 내어 놓았다.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들이 모여서 한다는 짓들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하기 어렵다. 내용이라는 것이 추경을 빠른 시일 안에 통과시켜달라는 것, 투자세액공제를 포함한 감세를 1조 5천억 정도 올 한 해 한시적으로 시행한다는 것, 8조원 규모의 민간건설투자에 대해서도 조기에 착공이 이뤄지도록 지원한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올해 성장률을 2.6~2.7%에서 2.4~2.5%로 하향조정하였다. 도대체 이런 회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몇이나 되며 우리 경제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낙관적으로 바꾸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앞에서도 누누이 강조한 바와 같이 경제정책은 시장참가자들의 생각, 곧 기대와 예상을 바꿀 수 있어야만 한다. 정책이 소기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책이 크거나, 정책은 작더라도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아무런 정책이 없더라도 앞으로 무언가 달라질 거라는 희망을 주거나 하여야 한다. 경제정책이 예술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정책은 실시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정책이 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동적이지도 않고, 더군다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도 아니고, 뭐 하러 국고만 낭비한단 말인가?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집권세력이 환골탈태하는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는 백약이 무효할 것이다. 특히 경제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대통령은 경제에 관하여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것이 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하루 빨리 깨달으시라는 충고를 드리고 싶다. 차라리 경제는 경제를 잘 아는 주위에 일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대통령이 발표한 제조업 르네상스니, 2030년 4만 달러 소득이니 등의 내용은 코미디고 대통령이 발표하기에는 창피한 내용이다.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제조업 죽이는 정책을 광범위하게 도입하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르네상스? ,2030년 소득 4만 달러’는 2018년의 1인당 소득($31,370)에서 실질소득이 년 1.5% 정도만 성장해도 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경제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면 당연히 달성할 수 있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그걸 달성할 수 없다고 본 것인데, 결국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늪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대통령이 나서서 인정한 셈이다.
한심하지 않나, 대한민국? 일본이 반도체 관련 핵심소재 수출을 제한한다고 한다. 외교는 상대방이 있는 것인데 그토록 면박하고 창피를 주면서 일본이 어떻게 나오리라고 생각했나? 롱 리스트가 있다고? 있으면 뭐 하나 대응이 안 되는데. 우리의 정책이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은 외교의 참사가 경제적 참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全)방위로 과거를 한없이 들쑤셔서 이념적인 전투에서 이길지는 모르지만 결국 전쟁에는 지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과거는 흘러간 것인데 왜 미래를 보지 못하나. 적어도 경제정책이라도 미래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과거는 흘러간 것이다. 그로부터 교훈을 얻으려 해야지 거기에 멈춰 서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경제는 모두 미래에 관한 것뿐이다. 사람의 기대를 계속 저버리면서 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몇 번이나 말해야 할까?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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