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5 자만심으로 멸망한 틈새왕국, 남량(I,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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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5) 후진 요흥의 무리한 독발녹단 공략과 남량의 독립선언(AD408)
요흥은 안팎으로 어려운 독발녹단의 남량을 흡수할 생각을 품고서 상서령 위종(韋宗)을 무위에 보내 염탐을 시켰다. 무위에서 독발녹단과 오랫동안 예기를 나누었던 위종이 나오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 기이한 영재와 영특한 인물이
화하(華夏,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밝은 지혜와 명석한 지식이
반드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구주(九州) 바깥과 오경 밖에도
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발녹단의 재주에 놀란 위종이 돌아와 요흥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보고했다.
“ 남량왕국이 비록 피폐하긴 했어도 아직 도모할 수 없겠습니다.”
요흥이 이렇게 되물었다.
“ 아니 유발발은 그 까마귀 떼 같은 무리들로도
독발녹단을 궁지에 몰수 있었는데
나와 같은 천하 대군을 가진 사람이 그를 처단하지 못한단 말인가?“
위종이 말했다.
“ 형세가 변하고 뒤집어지는 경우는
천만가지가 넘습니다.
남을 깔보는 자는 반드시 패하고
남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에게 패한 것은
그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독발녹단이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군의 천만대군을 가지고도 이기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요흥은 위종의 충간을 듣지 않았다. 아들 요필과 염성 걸복건귀 등의 장수와 함께 3만 군사를 보내 독발녹단을 공격하고 동시에 좌복야 제난을 시켜 2만 기병으로 유발발을 공격했다.
이부상서 윤소가 요흥을 막아섰다.
“ 차라리 북량의 저거몽손과 서량의 이고에게 명하여 남량의 배후를 공격함만 못합니다.”
요흥은 이 또한 듣지 않고 독발녹단에게 기만하는 편지를 썼다.
“ 제난을 보내 유발발을 토벌시켰다.
유발발이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요필에게 군사를 붙여서 하서회랑(난주-무위-장액-주천을 잇는 길)
그쪽으로 보내니 그대는 그렇게 알아라.“
독발녹단은 요흥의 편지를 곧이곧대로 믿고서 대비하지 않았다. 요필의 부하 강기가 군사 5천을 요구하면서 급습하자고 건의했지만 요필은 듣지 않고 정상 속도로 무위로 다가갔다. 요필의 군대가 무위로 들이닥치자 독발녹단은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전투가 지루하게 계속되자 무위 성안에서 내부반란의 기미가 있었으나 독발녹단은 반란무리 5천명을 전원 매몰시키고 반란을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독발녹단은 성안에 있는 양과 소를 모두 성 밖으로 풀어 내 보냈다. 후진 장군 염성이 병사를 풀어 양소무리를 잡게 했는데 이 틈을 타고 독발녹단의 군사들이 뒤를 공격하여 요필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7천명의 후진 병사의 목이 이 때 달아났다. 요흥은 요현에게 2만 기병을 붙여서 패전한 요필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나 요현 또한 독발녹단에게 패했다. 요현은 패전의 책임을 염성에게 묻고 독발녹단에게 사과하고 철군했다. 독발녹단 또한 사자를 종주국 후진에 보내 사죄했다. 후진과 남량이 다시 화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AD409년에 독발녹단은 독립을 선언한다. 약해진 후진이나 북량이 너무나 가볍게 여겨진 때문이었다.
(46) 독발녹단의 저거몽손 공격 실패(AD410)
후진과의 연대를 끊어버린 남량의 독발녹단은 끊임없이 서쪽의 북량지역을 넘보면서 침략을 그치지 않았다. 북량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번 남량이 치고 들어오면 반드시 북량도 반격으로 보복했다.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던 AD410년 3월 독발녹단은 스스로 5만 기병을 거느리고 저거몽손을 쳤는데 궁천에서 대패하여 단기로 도망 나오는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저거몽손이 승기를 타고 진군하여 남량의 수도 고장(무위)를 포위했다. 멸절될 것이 두려웠던 고장 주민 1만여호는 저거몽손에게 항복했다. 독발녹단은 측근 경귀와 그 아들 경타를 보내 인질로 삼게 하고 화친을 요청했다. 저거몽손이 화친을 수락하고 8천 호를 데리고 돌아왔다. 독발녹단의 부하 절굴기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수도를 다시 고장(무위)에서 낙도로 옮겼다. 독발녹단의 군대들은 이 때 대부분 저거몽손에게 항복하였다.
(47) 북량의 남량 반격 (AD411)
독발녹단은 북량 공격 실패로 세력이 크게 약화된 반면 저거몽손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남량의 장군 초랑이 고장을 수비하고 있었으나 저거몽손이 뽑아버렸다. 초랑을 풀어 준 뒤 동생 저거나를 진주자사로 삼아서 고장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몰아서 남량의 수도 낙도를 포위했다. 30여 일 동안 함락을 시키지 못했는데 독발녹단이 아들 독발안주를 인질로 보내자 저거몽손은 군대를 되돌려 돌아갔다.
여러 차례 저거몽손에게 치욕을 당한 독발녹단이 다시 저거몽손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호군 맹개가 나서서 극력 반대했다.
“ 저거몽손이 새로이 고장을 병합하고
형세가 강성하니 지금은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독발녹단은 맹개의 충고를 듣지 않고 다섯 길로 나누어 출병했다. 독발녹단은 저거몽손의 변방지역을 공격하여 5천여 호를 약탈하는데 성공했다. 장군 굴우가 이번 승리로 만족하고 군사를 돌리자고 권했으나 독발녹단은 듣지 않고 진군을 강행했다. 마침 날이 어둡고 안개가 끼면서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길을 잃은 독발녹단 군대는 저거몽손의 기습군을 만나 참패하였다. 독발녹단은 다시 낙도로 돌아갔지만 저거몽손의 군대가 낙도를 포위하자 다시 아들 독발염간을 인질로 보내 화친을 간청하였다. 저거몽손은 다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48) 서진 조정의 반란 : 걸복공부의 걸복건귀 살해(AD412)
끊임없이 후진의 변방을 침략하던 서진의 걸복건귀는 천수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뒤 감숙성 장랑현을 빼앗고 또 감숙성 임하마저 뺏은 뒤 수도를 임하로 옮겼다. 걸복심건을 하주자사로 삼아 부한에 진수시키고 걸복공부는 청수지역을 토벌하도록 지시했다. 걸복치반은 감속성 유중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 땅들은 대부분 후량이 무너지고 나서 남량이 지배하던 땅들이었다.
유중에 주둔하던 걸복치반이 남량 영역인 서쪽 청해성 순화현을 공략하여 장악하였는데 이 때 조카인 걸복공부가 삼촌인 주군 걸복건귀와 그 아들 10여 명을 살해하고 대하(감숙성 대하)로 도주하였다.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동생 걸복지달과 걸복목혁간 등을 보내 3천 기병으로 걸복공부를 쫓아가 토벌했다. 도망가던 걸복공부는 걸복지달에게 잡혀 환형에 처해졌다.
후진 신하들은 서진의 혼란을 틈타 걸복치반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지만 후진 주군 요흥은 남의 상사를 틈타 공격하는 것은 도리와 예의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하왕 유발발도 걸복치반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군사중랑장 왕매덕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극구 말리는 바람에
유발발 또한 공격하려는 마음을 거두었다.
반란괴수 걸복공부를 처단한 걸복치반은 난주 동남쪽 위원 방향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농서지역을 방어하던 후진의 태위 색릉 또한 관할지역을 거두어 걸복치반에게 항복해 들어왔다.(AD413)
저거몽손과 독발녹단의 알력은 간간히 지속되었으나 일진일퇴를 반복할 뿐 어느 쪽이든 큰 진전은 없었다. 어느날 저거몽손이 잠을 자는 동안 환관 왕회조가 저거몽손을 죽이려고 했으나 저거몽손의 발을 조금 다칠 뿐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다. 왕회조의 아내 맹씨가 남편을 사로잡아 오므로 목을 베었다. 저거몽손은 수도를 장액에서 고장(무위)으로 옮겼다.(AD412)
(49) 독발녹단의 치명적인 을불공격(AD414)
청해호 서쪽 타계한과 을불 부족들이 남량을 배반하고 나섰다. 독발녹단은 이들 반란 세력을 당장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군 맹개가 극력 반대했다.
“ 지금 해마다 기근이 들었습니다.
동남쪽에서는 걸복치반이 들이닥치고
북쪽에서는 저거몽손이 위협하고 있어서 백성들이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지금 먼 길을 나서시면 이길지라도
반드시 배후의 걱정이 생길 것입니다.
걸복치반과 더불어 맹약을 맺으신 다음
양식을 유통하도록 하여 여러 부족들에게 안심을 시키신 뒤에
무기를 수선하고 때를 기다려 출병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독발녹단은 맹개의 말을 듣지 않았다. 태자 독발호대를 불러 말했다.
“ 저거몽손은 지금 출병 중이니 별안간 닥칠 수 없을 것이다.
걸복치반이 걱정되는데 그러나 군사의 숫자가 적고 방어하기가 용이하니
네가 낙도를 잘 방어하기만 하면 한 달 안에 내가 돌아 올 것이다.“
마침내 7천 기병을 이끌고 독발녹단은 을불과 타계한 토벌에 나섰다.
(50) 남량이 서진 걸복치반에게 멸망(AD414)
독발녹단의 출병 소식을 들은 걸복치반이 낙도를 습격하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태부주부 초습은 이렇게 말했다.
“ 독발녹단은 가까이 있는 걱정은 생각지 않고
먼 이익만 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를 공격하되 서쪽 길을 끊어서
독발녹단이 구원할 수 없도록 조치한다면
독발호대는 성을 지키고 앉아서 방어만 하다가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니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걸복치반이 옳다고 판단하여 2만 기병을 이끌고 낙도를 공격했다. 남량의 종사중랑 위숙이 낙도의 외성을 버리고 내성만 지키도록 권고했다. 독발호대가 이렇게 대꾸했다.
“ 걸복치반은 작은 도적일 뿐이오.
아침저녁 사이에 물리칠 수 있는 조무래기들인데
경은 너무 걱정이 많은 것 같으오.“
독발호대는 진인, 즉 중국 본토 사람들을 의심하여 내성에 가두어 버렸다. 맹개가 나서서 반발했다.
“ 국가가 계란을 쌓아 놓은 것 같이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저 맹개와 같은 사람들이 나아가 은혜를 갚고자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바라는데
어찌하여 전하는 의심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독발호대가 말했다.
“ 내 어찌 그대의 충성심을 모르겠소.
하나 나머지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단 말이오.
저들이 만에 하나 뜻밖의 일을 벌이는 것이 두려운 것이니
결국 그렇게 하면 그대들도 평안해 지는 것 아니겠소?“
하루 저녁에 낙도 내외성이 무너지고 걸복치반이 들이닥쳤다. 걸복호대와 문무관료 및 1만 가구를 압송하여 수도 부한(임하)으로 옮겼다. 5천 군사를 걸복첩건에게 보내 독발녹단을 추격하게 했다.
(51) 남량의 충신 위현정(AD414)
수도 낙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독발녹단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 지금 아내와 아들들이 모두 걸복치반에게 사로 잡혔소,
물러나도 갈 곳이 없으니
경 들은 나와 더불어 을불 부락의 물자 도움을 받아
글한 부락을 탈취한 다음
걸복치반에게 가족들과 맞바꾸자고 하면 어떨까?“
독발녹단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갈 때 많은 군사들과 부장들이 도망쳐 떨어져 나갔다. 독발녹단이 말했다.
“ 저거몽손이나 걸복치반 모두 옛날에는 내 신하들이었는데
지금 내가 머리를 숙이자니 부끄러운 일 아닌가.
사해가 넓어도 나를 받아 줄 곳이 없으니 얼마나 허망한가.
죽는 것이 흩어져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못하다.
독발번니는 나의 장조카로 종복의 큰 힘이 되고 있고
또 북쪽의 우리 무리들도 1만호가 넘으니 장차 너희들도 그리로 가서
미래를 기약하도록 하라.
나는 어차피 죽을 몸이니 가서 내 아이와 아내를 보고 죽으리라.“
독발녹단의 모든 신하들은 걸복치반에게 항복하고 들어갔다. 오직 음리록만이 독발녹단을 따라가기로 했다. 음리록이 말했다.
“ 신의 노모가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갈 날을 한 번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신하가 되어 충성과 효성의 두 가지를 다 이루기란 어렵습니다.
신이 재주가 없어서 폐하를 위해 이웃나라에게
피눈물 흘리면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할 수도 없으면서
어찌 폐하의 곁을 감히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독발녹단이 감탄하며 말했다.
“ 사람을 안다는 것이 실로 쉽지 않은데
대신들과 가족들이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나갔지만
오늘 충성과 의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지러지지 않은 사람은
오직 경 뿐 이요.“
독발녹단의 남량 여러 성들이 모두 걸복치반에게 항복했으나 오직 위현정만이 고문(감숙성 수등현)을 지키면 함락되지 않았다. 걸복치반이 위현정에게 편지를 보냈다.
“ 남량의 다른 성들이 모두 함락되었소.
낙도도 함락된 지 오래되었소.
오직 한 개의 성을 지켜서 무엇하겠다는 거요?“
위현정이 이렇게 말했다.
“ 양왕(독발녹단)의 후덕한 은혜로 나라를 지키는 번병이 되었습니다.
비록 낙도가 함락되고 아내와 가족들이 다 사로 잡혔다 해도
먼저 항복하여 상을 받기 보다는
뒤에 따라가 죽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다만 주상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데 감히 귀순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내와 자식에 관한 일은 작은 일일 뿐인데
어찌 작은 일로 큰일을 그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한 때의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뜻을 버리는 사람을
대왕께서는 기용하시겠읍니까?“
걸복치반은 독발호대를 재촉해서 위현정이 항복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위현정이 독발호대를 꾸짖었다. 그해 10월 걸복치반은 스스로 진왕(秦王)이라고 일컬으며 백관을 두었다.
“ 그대는 저부(즉 세자)가 되어서 힘을 다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면박을 당하여 아비를 버리고 임금을 잊고 만세 대업을 무너뜨렸으니
나 위현정은 어진 선비로써 어떻게 그런 사람을 본받을 수가 있겠소?“
나중에 독발녹단이 항복하여 걸복치반에게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위현정은 성문을 열고 서진에 항복했다.
(52) 남량 독발녹단의 항복과 죽음 (AD414)
독발녹단이 항복해 들어오자 걸복치반은 사자를 교외까지 보내 상빈으로 맞이했다. 독발녹단을 표기장군으로 삼고 좌상공의 작위를 내렸으며 투항한 남량의 여러 신하들에게 재능에 따라 관직을 내렸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걸복치반은 사람을 시켜 독발녹단을 짐살시켰는데 주변의 독발녹단 측근들이 해독하려하자 말리면서 말했다.
“ 내가 병이 들어 그런 것이니 해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치료를 거부한 독발녹단은 다음해에 죽었다. 독발호대 또한 걸복치반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독발녹단의 여러 아들과 손자들은 북량의 저거몽손에게로 달아났다가 한참 뒤에 북위로 망명했다. 북위 주군 탁발사는 이들 독발씨 후손들을 뿌리가 같은 종족이라며 크게 우대하고 탁발씨와 같은 ‘원’씨 성을 하사했다.
(53) 남량 멸망의 원인 : 자만심으로 멸망한 틈새왕국 남량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AD383년 10월)하면서 시작된 북중국의 분열은 일차적으로 AD384년 모용수의 후연과 요익중의 후진 건국, 그리고 그 다음해인 AD385년 걸복국인의 서진과 AD386년의 후량과 북위로 나타났고 약 10년 뒤 이차적으로 AD397년의 남량과 북량, 그리고 AD398년 서량으로 이어졌다. 일차 분열이 전진의 붕괴 때문이라면 이차 분열은 북위에게 참패한 후진의 쇠약함과 관련이 있다. 하여간에 AD403년 후량이 후진에게 멸망당할 당시만 해도 황하 서쪽은 남량이 독보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다만 신흥 세력인 혁련발발이 후진과 남량을 동시에 위협할 뿐이었다.
이런 남량이 십년 만에 멸망당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도자 독발녹단의 판단착오 때문이었다. 독발녹단은 아버지 독발사복건의 칭찬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 자랐고 큰 형 독발오고나 둘째 형 독발이록고 또한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들었기 때문에 왕이 되기까지 독발녹단의 지위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판단과는 달리 독발녹단의 재주는 여러 곳에서 문제점을 드러냈었다. AD401년 강기가 투항해 오자 독발이록고가 동생 독발녹단에게 너무 가까이 하지 말기를 경계를 하라고 했지만 믿지 않고 가까이 했다가 결국 강기는 후진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사람을 보는 눈이 독발이록고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반면 독발녹단은 도전적이고 자만하기를 잘 해서 자기가 믿는 바대로 움직이기를 좋아했다. AD406년에는 수도를 서녕에서 고장으로 옮겼고 AD407년에는 혁련발발의 딸 청혼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다. AD408년에는 후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 지역에 대한 야망을 만 천하에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독발녹단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AD414년 을불 지역 공격이었다. 청해호 서쪽에 있던 타계한과 을불 부족들이 남량을 배반하고 나서자 독발녹단은 이들 반란 세력을 당장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군 맹개가 극력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해마다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피폐했고 또 북량 저거몽손이나 서진 걸복치반이 호시탐탐 위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독발녹단이 서쪽으로 을불을 치러 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진의 걸복치반은 곧바로 2만 기병으로 낙도를 습격했다. 하루 저녁에 낙도 내외성이 다 무너지고 걸복치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사로잡힌 세자 걸복호대와 문무관료 및 1만 가구는 압송되어 서진의 수도 부한(임하)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5천 군사를 걸복첩건에게 보내 독발녹단을 추격하게 했다. 독발녹단의 군사들은 거의 다 도망가거나 걸복치반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독발녹단은 걸복치반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걸복치반은 독발녹단을 깎듯이 대접한 뒤 얼마 있다가 짐독으로 독살시켰다. <끝>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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