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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기업인 가석방 주장의 “이상한 논리”
우리나라에서는 경제범죄를 저지른 기업인,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사람 등 유력 인사들에게 집행유예, 가석방, 사면의 특혜를 주는 것이 관행처럼 이어져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도 특별사면을 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권한의 남용이자 국민 의사를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고, 사면권 행사 제한과 엄정한 법치를 약속했다.
그런데 작년 9월에 법무부장관과 경제부총리가 비리 기업인들의 가석방 얘기를 꺼냈다. 12월에는 유력 정치인들이 ‘경제를 위한 가석방론’을 띄웠다. 대기업 총수의 부재로 그룹의 투자, 신사업 등 통 큰 결정이 안 되고 있으니, 경제를 위해 비리 기업인들의 가석방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이들에게 유전중죄의 역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언론은 가석방론을 우호적으로 다뤘고, 특히 경제지들이 가석방 필요성을 부각했다.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면 범법 기업인들을 선처하는 게 좋지 않나. 국민들이 자주 들어온 엘리트들의 면죄부 논리다. 이에 대해 미국의 보수 경제지 월스트리트 저널(2015.1.1.)이 “서울의 재벌 고착”(Seoul’s chaebol fixation)이라는 사설에서 직격탄을 날렸다. 제목이 내용을 말해준다. 가석방론은 ‘비리 총수들이 경영하게 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이상한 논리(odd reasoning)”라고 비꼬았고, 박대통령이 “재벌의 주문(chaebol spell)”에 걸린 것 같다고 꼬집었다. 요컨대 한국 정부와 정치가 재벌들에게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 때문인지 가석방론은 가라앉았다. 가석방 논자들의 반론도 없다. ‘경제를 위한 가석방론’이 왜 “이상한 논리”인지 이들이 진정 납득한 것인가?
우리 시장경제의 윤리적 기반이 붕괴되어 있다
시장경제는 사람들 간의 자발적 거래를 통해 작동한다. 사람들이 사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불공정·무책임하게 권한을 남용하고, 위·탈법을 일삼으면, 거래는 위축되고 시장경제는 약탈경제로 변한다. 이 비윤리적 행위들은 거의 언제나 경제적 효율성을 파괴하고 국부를 잠식한다. 시장경제는 정직성, 공정성, 책임성, 신뢰, 준법 등의 윤리적 기반 위에서 작동할 때 그 마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 시장경제의 윤리(ethics of the market economy)는 어떤가? 주지하듯이, 기업 지배주주 일가의 사익편취, 편법 증여・상속, 탈세, 횡령, 배임, 내부자거래, 주가조작, 회계분식 등 각종 비윤리적 행위가 빈발한다. 서기호 의원의 「재벌범죄백서」(2014)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10대 그룹의 절반(40대 그룹은 40%)에서 총수일가가 형사 유죄판결을 받았다. 공기업과 사기업 모두 빈번히 위·불법행위를 하며, 공기업의 방만 경영, 납품 등 이권을 둘러싼 ‘기업 부패(corporate corruption)’도 심각하다. 사회 전반에 연고주의, 리베이트 수수, 공공자금 허위청구, 보험사기, 소비자 기망 등의 비윤리적 행태가 퍼져 있다. 시민단체까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휘둘러 사익을 챙긴다.
원전비리, 세월호 참사, 방산비리 등에서 보듯이, 사회 곳곳이 ‘부패 균형’ 상태에 있다. 국민권익위원회의 2014년 조사결과, 일반 국민의 62.8%가 ‘사회가 부패하다’고 보고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인 우리나라가 국제투명성기구의 2014년 부패인식지수에서 175개국 중 43위(OECD 34개국 중 27위)를 했다. 부탄이나 대만보다도 낮은 순위다.
이렇듯 시장경제의 윤리적 기반이 무너져 있는 것이 우리 경제사회의 발전을 막는 핵심 문제다. 정직보다 부정직, 준법보다 위・탈법, 신뢰보다 기회주의, 책임보다 모럴 해저드(moral hazard)가 사익에 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비윤리가 곧 좋은 비즈니스”(bad ethics is good business)인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믿지 못한다. 세 명중 두 명이 ‘조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한다’고 생각한다(2014년 한국리서치의 ‘한국인의 사회인식 조사’).
비윤리에 대한 상벌 시스템의 실패
우리 경제의 취약한 윤리적 기반은 정직성, 공정성, 책임성, 준법 등에 대한 상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다. 상벌 시스템의 기본 요소는 법과 규칙이다. 법치(rule of law)가 중요하다. 법과 규칙이 누구에게나 엄정하고 비차별적으로 적용·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법제도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아냥이 있을 정도로 유력 인사들의 범법행위를 관대하게 취급해왔고, 정치권은 이들에게 가석방과 사면의 특혜를 베풀어왔다. 우리의 상벌 시스템은 엘리트들에게 비윤리적 행위를 할 유인을 제공하고 있다.
그 귀결은 광범위하고 심층적이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간의 ‘서로 봐주기’ 관계는 다시 그들 간의 유착을 촉진한다. 시스템이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이는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잠식한다. 시스템과 법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사라지고, 부자 등 상위계층의 정당성이 인정받지 못한다. 대기업 지배주주 일가의 비윤리와 특권은 사람들의 반감과 불신(이를 친재벌 논자들은 ‘반기업 정서’라고 호도한다)을 유발해 사회적 합의와 결속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비윤리적 경영·사업행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초래하고 외국인 투자를 저해한다.
시장경제 윤리의 향상과 법치의 확립이 긴요하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에서 보듯이, 시장경제의 윤리와 법치가 없으면 경제발전도 없다. 기업·비즈니스 윤리의 붕괴는 경제위기를 초래한다.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나 미국 금융위기의 기저에는 엘리트 계층의 탐욕과 비윤리적 사익추구가 깔려 있다.
시장경제의 윤리가 향상되지 않으면, 기업 문화와 비즈니스 윤리가 개선되지 않으면, 진정한 선진경제로 발전할 수 없다. 비리 기업인들의 가석방이 아니라 참된 법치를 세우고 경제의 비윤리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윤리적 시장경제‘를 향해 나가야 한다. 정직성, 공정성, 책임성, 신뢰, 준법 등에 대한 상벌 시스템을 바로 세워 ‘좋은 윤리가 곧 좋은 비즈니스‘(good ethics is good business)가 되는 시장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회가 개인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좀 더 엄격해져야 한다. 기업은 윤리적일 수 없다. 기업은 사람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탐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은 기업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기 전에 재벌총수 등 기업인 개인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개인의 책임은 제켜둔 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운하는 것은 시장윤리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주도의 고속성장기를 거치면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간에 연계와 보상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여기서 비리 기업인 가석방론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후진적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이룬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현 수준에서, 재계에 대한 정치인들의 관계와 역할이 비리 기업인들의 가석방·사면을 요청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시장과 기업의 윤리를 향상시킬 법·제도와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진정으로 경제를 걱정하는 정부와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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