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재정과 복지의 새 틀을 짜자 ② 영국의 역사적 경험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처럼 복지하면 영국이고 영국하면 복지가 생각날 정도로 복지를 떠나서 영국을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영국의 복지체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영국식 의회민주주의가 17세기 초 월폴 수상 이후 300년에 걸쳐 발전되어 왔다면 영국식 복지국가는 그보다 100여년 앞선 엘리자베스 I세 시 구빈법으로부터 출범했다. 당시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여왕이 집권하자마자 당시 세계 최강인 스페인과 80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끊임없이 흉년이 이어졌으며 곡물가격이 급등한데다, 무역을 통해 유입되는 통화로 인해 인플레가 극심했다.
농지를 목장으로 바꾸어버리는 엔클로져 운동으로 인해 대부분의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이리저리 떠도는 부랑아로 전락했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왕실과 지주계급은 심각한 체제불안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I세 여왕이 죽고 50년 만에 크롬웰 혁명으로 찰스 I세의 목이 잘리는 것을 보면 당시 어려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체제불안에서 안정을 지켜내기 위해 엘리자베스 I세와 지배계층은 『구빈법(1601)』을 제정했다. 구빈법의 핵심내용은 빈민을 세 부류로 나누고, 각 부류에 대해 차별적인 지원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1) 근로불능의 장애인 노인, 아동에 대해서는 금품을 제공하고, (2) 근로 가능한 빈민에게는 자활 작업을 하도록 일감을 주되, (3) 나태한 빈민에게는 교화소에서 징벌적 교화를 내린다는 것이다.
구빈법의 개악
그러나 현실적으로 근로불능 장애인과 노인아동에게 주는 혜택은 매우 적었고, 대부분 작업장이나 교화소에서 가혹행위가 만연하였다. 불만투성이인 구빈법에 대해 19세기 초중엽 치열한 찬반논란이 대두되었다. 한 쪽에서는 구빈법을 철폐하자고 주장하였다. 구빈법이 빈민을 오히려 양산한다는 논리였다. 농업생산성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인구증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가난은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맬더스 이론이 뿌리에 있었다.
리카도의 임금기금설도 한 몫을 했다. 임금으로 제공되는 기금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늘면 개인의 임금은 당연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정반대 논리로 구빈법을 비판하는 학자도 있었다. 구빈법이 있으니까 사용자들이 더 가혹해지고 착취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초연금이 있으니까 다른 연금은 들지 않겠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구빈법 때문에 착취와 가혹행위가 더 만연하게 되면, 구빈법의 근본 취지에도 어긋나고 또 사회 불만과 폭동으로 발전되면서 사회체제가 불안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시드니 웹이나 채드윅과 같은 진보주의자들은 구빈법을 근본적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봤다. 당시 나폴레옹 전쟁, 피털루 폭동 등 극도로 불안한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구빈법을 철폐하는 것은 어려웠다.
또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철폐는 시대정신과 역행하는 조치였다. 결국 개정하기로 하고 채드윅의 주도로 실태보고서가 작성되고(1834) 이를 바탕으로 구빈법을 개정하였다. 구빈법의 개정의 핵심은, 자활자조의 원칙에 따라 빈민 지원을 대폭 줄이는 것이었다. 빈민, 특히 도시빈민에 대한 지원이 크게 줄어듦에 따라 1840년 대 이후 영국의 사회불안은 극도로 치닫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재위(1837-1901) 기간은 영국의 최고 번성기였지만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빈곤문제를 겪고 있었다. 런던 시민의 1/3이 끼니를 굶는 빈민일 정도였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매우 불안하였다. 풍요속의 빈곤에 봉착한 당시 지식층과 정치인들이 씨름한 과제는 빈곤이 (1) 개인 능력의 문제인가, (2) 국가 체제의 문제인가 하는 문제였다. 만약 개인의 문제라면 국가가 개입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만, 국가체제의 문제라면 마땅히 국가가 개입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진보진영 압승(1906년)과 증세
증세전쟁과 진보진영의 승리
이 국민예산은 ‘부자와 중산층에 대한 전쟁선포’으로 인식되었다. 조지5세까지 나서서 증세안을 승인하라고 독촉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꼴통보수’의 요람이었던 상원은 하원의석 과반 동의를 요구하면서 예산승인을 거부하였다.(1909.11.30.) 두 달 뒤 자유당은 민의를 묻기 위해 아예 상하 양원을 해산하고 총선에 돌입하였다(1910.1월). 상원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당은 내심 총선에서 압승을 기대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자유당(274)+노동당(40)+아일랜드의회(71)=385, 과반=336] 할 수 없이 상원도 국민예산안을 통과시켰다.(1910.4.28.)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원의 예산승인거부에 분노한 하원은 예산문제에 관한 한 상원의 거부권(혹은 지연권)을 대폭 축소하는 의회법 개정을 위해 의회를 다시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치렀다.(1910년.12월) 결과는 4월 총선과 같은 자유당 압승이었다.[보수당(271석) ↔ 자유당(272석)+노동당(42석)+아일랜드당(74석)=388] 이런 정치적 승리를 바탕으로 영국 의회는 로이드-조지 수상의 주도 아래 1922년까지 대대적인 복지정책과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정책적 함의
영국의 복지역사가 던져 주는 시사점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실업·빈곤·복지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빅토리아 여왕 집권기 같은 최고 번성기에 최악의 복지문제가 대두되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둘째로, 체제안정과 사회발전을 위해 복지문제 해결은 필수적 과제라는 점이다. 복지문제를 방치하면 심각한 사회불안과 체제불안이 야기되고 결국 남미와 같은 치명적인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선진국이니까 복지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복지가 잘 되니까 선진국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국민적 복지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정치 리더십이다. 글래드스톤, 캠벨-배너먼, 로이드-조지 처칠 등과 같은 진보정당의 리더십과 킬 하디 노동당의 출현과 성공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넷째로 국민적 복지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증세는 불가피 하다는 점이다. 증세 없는 복지증진은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결국, (1)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증세 체계와 (2)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복지국가 구축에 꼭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