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18> 오욕의 현실과 오연한 기개의 시(詩)-김관식의 시 읽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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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김관식(金冠植, 1934~1970, 사진)은 1934년 충남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 505번지에서 부 김낙희(金洛羲)와 모 정성녀(鄭姓女)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에 정진하여 동양의 고전을 읽었다. 그가 한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서원의 전교를 맡아 본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동양고전에 대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남선, 오세창 등에게서 한학을 사사 받으면서 주역, 반야심경, 동의보감, 당시(唐詩) 등 동양학을 꿰뚫는 해박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고향에서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하였다. 그는 학교 교육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의 탁월한 재능과 개성을 실현할 수 없었다.
사진 설몀: 김관식의 시에 오연함과 자존의지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무잡한 현실로부터 순정한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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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식이 시단에 등단한 것은 1955년인데, 「연(蓮)」(『현대문학』1955. 5), 「계곡에서」(『현대문학』1955. 6), 「자하문 근처」(『현대문학』1955. 11)가 잇달아 추천되었다. 섬세한 묘사력과 사물과 정신을 일치시켜 가는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으며, 추천자는 서정주였다. 김관식은 한국시에서 잊혀진 시인이다. 50년대에 시단에 등단해서 놀라운 감각과 해박한 깊이를 보여준 시인이었지만 36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해버렸다. 그의 시단 등단이 1955년이니까 1970년 사망하기까지 15 년간이 그의 시 창작 기간이었다. 그 동안 그는『낙화집』(신한문화사. 1952), 『해넘어가기 전의 기도』(이형기, 이중노 공저. 1955), 『김관식 시선』(자유세계사. 1956) 등의 시집을 냈다. 김관식의 작품들은 197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증보판 김관식시전집-다시 광야에』로 엮어져 나왔다. 84편의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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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식의 첫 시집 『낙화집』은 1952년 8월15일, 박목월의 창조사에서 간행된 72페이지 분량의 소시집이다. 이 시집은 희귀본으로 책의 제목만 밝혀져 있었을 뿐이므로, 서지 사항을 밝힌다. 이 시집의 안 페이지에는 ‘A thing of heauty(beatuty의 오자일 것이다) is a joy forever’라는 John Keats의 시구와 <이 소곡을 삼가 / 영랑 선생(永郞 先生)의 / 영전(靈前)에 올리나이다>라는 헌사가 적혀 있다.
권두시로 김영랑의 4행시「허리띠 매는 시악시」가 실려 있다. 표제를 <서정소곡(抒情小曲) 『낙화집』>으로 한 것은 나이 어려 내는 시집의 겸양일 것이다. 이 시집에는 「서정소곡」이라는 제목의 간지 뒤에 1에서 20까지 숫자로만 표시된 4행시 20편이 실려 있고, 「금중유수(琴中流水)」라는 제목의 간지 뒤에 37편의 한시가 실려 있다. 이 시집의 시편들 중 6 편은 『김관식 시선』에 「四行詩鈔(사행시록)」라는 표제 아래 수록되어 있는데, 1은 「지연(紙鳶)으로」 2는 「봄밤」, 3은 「사향 내음이」, 4는 「잔춘(殘春)」, 9는 「돌이나 되자」, 10은 「그리움으로」라는 표제로 실려 있다.
서를 쓴 조지훈은 서정주의 소개로 김관식이 자신을 찾아온 내력과 위당(爲堂), 가람, 영랑에게서 사사한 김관식의 습작내력도 소개하고 있다. 일찍 시집을 내는 것을 말리고 싶었지만 <옛날을 정리하고 새로 떠나려는 정성>을 위해 서문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끝으로 충고와 당부의 말을 적고 있다. 이 시집의 말미에는 ‘Nature I Loved And, Next to nature, art:’ 라는 WㆍSavage Iandor의 말을 적고 있다.
시집 『해넘어가기 전의 기도(祈禱)』에는 이형기의 시 12편과 ‘여백(餘白)에’라는 작가의 말이, 김관식의 19편과 ‘서(緖)’라는 작가의 말, 이중노의 15 편과 ‘후기’라는 작가의 말이 붙어 있고 판권란의 대표 저자가 김관식으로 되어 있다. 김관식은 이 합동시집에 실린 ‘서(緖)’에서 자신의 시편들이『낙화집』무렵의 것들임을 밝히고 “불살워 아궁이에 던지는 셈치고” 펴내는 것이라 했다. 아울러 “마음으로 사귄 벗 형기(炯基)와 같이 내게 된 것을 즐거웁게 생각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김관식 시선』은 1956년 12월 25일 자유세계사에서 간행되었다. 초기 『낙화집』의 6편이 「사행시초」라는 한 편으로 실려 있고, 그 외 『낙화집』과 『해넘어가기 전의 기도(祈禱)』에 수록되지 않은 시와 서문 「自序小引(자서소인)」이 실려 있다. 수록 작품은 모두 29편이다.
김관식의 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매우 영세한 실정이다. 아마도, 김관식에 관한 기행담과 에피소드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김관식의 시는 기행담도 에피소드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가 보여주는 깊이나 품격, 그리고 이미지나 비유들은 매우 새롭고 참신하다.
Ⅱ
김관식은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학을 통해 조선조 선비의 기개와 방식으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응전하였다. 김관식은 전래적인 선비의 현실관을 1950년대로부터 60년대에 걸치는 혼란의 사회 속에서 실현하려하였다. 자신이 실현하고자하는 선비의 현실관은 지고한 것이었지만, 실제 그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지나치게 오욕에 찌든 것이었다.
김관식은 자신이 지닌 선비의 방식에 턱없이 부족한 현실 가치에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그는 타락하고 무잡해진 오욕의 현실 앞에 선비의 기개로 오연히 맞섰던 것이며 타협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나타났다. 이런 김관식의 삶이 세속의 눈들에 의해 희화되었고, 문학 밖의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면서 시중의 에피소드나 스캔들처럼 떠다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선비 정신은 항상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통찰할 때 구체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치국 평천하(治國 平天下)’의 이상은 조선조 선비의 궁극적 목표였다. 그런데, 현실을 향한 자아의 의지가 거부되거나 부정되고 현실 정치 마당에서 물러나게 될 때 자신의 심회를 구현할 또 다른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공간이 ‘전원’이었다. ‘전원’은 어떤 경우에도 의연하고 질박하며 영원한 공간으로 개인의 자아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자아와 ‘전원’은 항상 화해롭다.
그런데, 조선조 문학에 나타나는 귀거래에는 대체로 사회 정치적 반항정신이 Pathos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반항정신에서 비롯된 문학작품들일지라도 현실비판이나 현실개혁의 의지가 노래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이 여하히 불만스러워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시인은 전원을 향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거나 불우한 자신의 심회를 현실 초월의 공간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김관식의 시에는 불만의 현실 속에 던져진 선비의 좌절과 응전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때로는 현실초월의 초연한 응전 방식이 원용되었고 또, 때로는 현실에 대한 준열한 도전과 비판의 응전 방식이 원용되었다. 다만, 조선조 선비들의 시가가 아무리 불만스런 현실 속에서도 그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던 데 비하여 김관식은 현실 비판의 시를 써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김관식은 동양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결합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오연히 시의 길을 걸었다. 김관식은 1956년 자유문학사에서 간행된『김관식 시선』에 수록된 ‘자서소인’(自序小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생각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는 자신이 동양적 전통을 물려받은 동양정신의 소유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양적 한계에 머물지 않고 서양정신과의 합일을 지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는 동양인이다. 나는 나대로의 눈으로 동양의 자연과 생활을 다시 한 번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희랍 정신을 추구하여 그 자유분방하고 풍성 윤택한 것을 어떻게 해야 우리의 상대 신라와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맺게 할 수 있을가 하는 것도 좀 생각해 보았다.”
동양인으로서의 자신이 동양적인 한계에 머무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자유분방한 희랍정신과 신라정신의 합일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양인인 자신이 동양인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서구 정신까지를 함께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김관식은 자신이 처해있는 처지를 “심각하게 반성하고 고민해야할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김관식은 ‘봐레리’나 ‘릴케’, ‘오-든’이나 ‘엘리옽’, ‘스펜더’나 ‘푸레이저’와 같은 서구의 시인들보다 도연명(陶淵明) 두자미(杜子美) 육방옹(陸放翁) 왕마힐(王摩詰)과 같은 동양의 시인들에 마음이 끌린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하고 있다.
김관식은 자신이 동양적인 시인들에 더 마음이 끌리게 되는 이유를 임어당의 논리를 빌어 설명하고 있다. 즉, 서구의 화가는 그림을 통해서 이상을 추구해가다가 마지막에는 ‘여인’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의 화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지나(支那)의 화가는 풀과 벌레 같은 ‘초충’과 한 덩어리의 바위를 들여다보고도 가장 커다란 기쁨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동양화의 특이란 특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관식은 맹목적 서구 추종을 경계하기도 한다.
한국시문학의 일방적 서구 지향보다는 스스로 생명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 연원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양적 사유를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시의 목표점이 ‘형이상적 종교의 경지’라고 밝히고 있다.
서구적인 데 감염되지 않은 ‘순수 동양의 전통적 사상과 정서와 예지와 풍류’를 ‘민족 운율’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이 시인이 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시의 목표인 셈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펴본 『김관식 시선』의 ‘자서소인’의 내용 속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관식의 견해에 따르면 『김관식 시선』에서 “희랍정신을 추구하여 그 자유분방하고 풍성 윤택한 것을 어떻게 해야 우리 상대 신라와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맺게 할 수 있을가 하는 것도 좀 생각해 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같은 글의 뒤 쪽에서는 “나는 원래 서구의 박래 사조에 전혀 감염되거나 침범 당하지 않은 순수 동양의 전통적 사상과 감각과 정서와 예지와 풍류를 이 나라 민족운율의 기초 위에 세우려는 것이 강력한 주안점이요 치열한 의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앞의 논리에서 “희랍정신과 상대 신라의 정신의 유기적 연관성을 맺게 할 수 있을가 하는 것도 좀 생각해 보았다”고 하는 말을 부수적인 말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동일한 지면에서 상반되는 논리를 전개해서 혼란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는 것 같다.
Ⅲ
현실과 자아가 불화의 관계로 대립하게 되고, 현실이 주는 위압이 심각해질 때 자연에 의탁해서 심회를 표현하는 것은 조선조 시가로부터의 오랜 관습이다. 특히, 조선조 선비 문화가 현실과의 연관 위에서 자아의 위상을 설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자아와 현실이 친화의 관계에 있을 때, 시적 자아는 자연을 상정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충분한 자족감을 이뤄내고 있으므로 굳이 자연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 자아와 현실이 불화의 관계에 놓이게 되고 현실 속에 자아를 구현할 방도를 찾지 못할 때 자아는 자연을 투사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현실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버림받은 자아가 그나마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은 자연 밖에 없다. 자연은 의연하며 질박하고 또한 영원한 것이어서 언제나 자아를 받아주고 위무해 주기 때문이다.
김관식이 전원 속에 이상향을 상정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김관식은 그의 이상향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오늘은 나도 고기잡이가 되어 그물을 말어 사렴 사렴 걷어담고 닻 감아 돛 일우어 산협창랑(山峽滄浪)에 탁영가(濯纓歌)를 읖조리며 물이랑에 남실거리는 아즈랑이 봄날을
푸른 이끼의 시내 언덕 위에는 복사꽃만이 구름 같이 노을 같이 피어 있길래 어즈러히 떨어져 궁구르는 꽃이팔 머나 먼 어데론지 저어서 가고.
빛나는 바위굴로 기어들어 가면은
깊은 골목에 개짖는소리.
저녁 연기 피어 오르는 저기 저 수풀 아래 그윽히 가라앉은 항아리 속 같은 곳에 그림처럼 펼쳐진 굉장히도 옛스러운 마을이었다. 해는 늦게 떴다 일찍암치 떨어지고 하늘만 동그랗게 빤히 내다보이는.
-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서
몽유도원(夢遊桃源)은 옛 선인들이 그들의 이상향으로 관념화한 공간이었다. 도연명(陶淵明)이 그의 귀거래사에서 ‘전원장무호불귀(田園將蕪胡不歸)’를 읖은 이후 도화원(桃花源)은 현실 속에서 좌절한 시인묵객들이 현실 공간의 어디선가 찾고자 했던 이상향이 되었다. 조선조의 안견도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꿈속의 도화원을 그렸었다.
김관식의 시「몽유도원도」도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유사한 면이 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무릉의 한 어부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도착한 곳이 도화원이었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말을 타고 헤매다가 우연히 닿게 된 곳이 도화원이었다.
김관식은 탁영가를 읖조리며 고기잡이를 하다가 산골짜기 어디선가 복사꽃이 <구름같이 노을같이> 핀 곳을 찾아가 바위굴을 지나 도화원에 닿고 있다. 김관식의 도화원은 골목에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저녁 연기도 피어오르는 한적한 마을이다. 단지, 세속의 번뇌나 욕망을 벗어난 유유자적의 삶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김관식은 그가 상정한 이상향으로서의 도화원을 그리고 있으며, 그곳에서의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김관식의 시에는 그런 초탈한 삶을 그린 여러 편의 시들이 보인다.
산(山)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穀食)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淸明)하면 동해(東海)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山)에 가 살래.
- 「居山好(거산호) 1」
위의 시의 시적 자아는 현실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하고 있다. <산에 가 살래>라는 진술이 그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 시의 자아가 <산>을 삶의 공간으로 상정하게 된 것은 현실과의 관계가 심각한 불화에 놓이게 되고, 현실 속에 자아의 의지를 구현할 방도가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산>은 조화로움의 공간이어서 자아를 배반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실에의 통로가 막힌 자아가 거처를 <산>으로 옮기고 그 속에 자아의 의지를 구현하고자 한다. <팥밭을 일궈 곡식을 심고>, <질그릇을 구우며>, <동해 바다에가 물고기를 낚는> 일들은 조화로움의 공간인 산에 사는 <산 사람>의 일로 합당하며 가능한 일들이다.
위의 시 「거산호(居山好)1」에서 김관식은 <산>을 이상향으로 노래한다. <산>은 의연하고 불변하는 가치로 언제나 조화로운 질서에 의해 변화를 구현해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리고, 항상 변화 많고 가변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현실의 대립 공간이기도 하다. 김관식이 <산에 가 살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무잡함을 떠나 조화로움의 공간으로 찾아가고 싶은 의욕의 소산이다. 갈등과 좌절의 공간인 현실을 버리면, 생존 조건 자체도 질박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산을 일궈 곡식을 심고 질그릇이나 구우며 물고기를 낚는 유유자적의 삶이다.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에서도 낚시질이나 그물질이 최소한의 생존 수단임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질박한 삶 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작록>의 부귀나 영화와는 인연을 버린 사람이다.
나도 오늘은 소부허유(巢父許由)와 같이
욕심없는 나라의 백성이 되어
흰 무명옷을 정갈히 갈아입고
목이 마를 때 명감잎을 뜯어 석간수를 한모금 떠서 마시고 농사짓는 일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태고적으로 저만치 썩 물러나 어리석게 살리라.
시비없는 세상에 시비없이 태어나 시비없이 살다가 시비없이 가는 것이 소원이어니
- 「巢父許由 傳(소부허유 전)」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고사는 세속을 벗어난 청빈한 삶의 극단을 보여준다. 임금으로부터 벼슬하라는 얘기를 듣고 귀가 더러워졌다고 흐르는 냇물에 귀를 씻는 소부, 그 귀 씻은 더러운 물을 자신의 소에게조차 먹일 수 없다고 상류로 오르는 허유다. 권세와 부귀영화가 헛되고 때묻은 것이라는 극단의 염결성을 찾아볼 수 있다.
김관식은 지금 그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처럼 살고싶어 한다. <무명 옷 정갈히 입고> 목이 마르면 나뭇잎으로 석간수 한 모금을 마시는 그런 삶을 염원하면서 태고적 삶을 따라 살고 싶어한다. 옳고 그름을 주장하면서 갈등하고 반목하는 그런 삶이 아닌 그야말로 순연한 삶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원 귀의의 삶은 때때로 아직 청산하지 못한 현실에의 욕구를 반영해 보여주기도 한다.
생강을 씹지 않곤
잠 못 이루던 孔子(공자)의 괴로운 밤을
아하, 어떻게 새워야 하나.
소크라테스보단도 肉身(육신)은 야웼는데,
독배(毒盃)도 내 차지는 없단 말이냐!
두룩저어지 종(種) 누룩돼지야
오래 오래 꿀, 꿀, 꿀 잠 잘 자거라.
높새가 불고 청노새 울어
지평선(地平線) 너머 누른 해는 빠지고
쇠붙이 소리 서그럭거리는 고량(高梁), 수수밭에 서리 찬 달빛. …… 기러기떼 우지짖으며 지나가는 그림자도 그리 반갑던 나의 형제(兄弟)의 즐거운 안행(雁行)의 밤은 어린 시절(時節)의 아름다운 동화(童話) 속에나 묻어 버리고
눈이여. 어서 내리고 지고,
내리고 지고, 눈이여. 우리
눈 속에 묻혀 눈을 씹어 눈물을 먹고
三冬(삼동)을 하얗게 얼어서 살자.
- 「撫劍의 書(무검의 서)」
공자는 자신의 뜻을 펼칠 공간을 위해 천하를 찾아다녔다. 자신의 뜻을 받아주지 않는 좌절을 되새기면서 온전히 밤을 지새우기도 하면서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들었다. 소크라테스의 야윈 육신 속에 깃든 강한 정신과 철저한 원칙주의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그가 <독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룩저어지 종(種) 누룩돼지>는 원칙도 이상도 없이 안일한 현실에 안주해 사는 삶을 지칭하는 것일 게다. 김관식은 그런 안일함을 향해 <오래 오래 꿀, 꿀, 꿀 잠 잘 자거라>고 한다.
김관식은 그가 지녔던 아름다운 날, 청빈의 날들을 이제 기억 속에 묻어 버리고 있다. <높새바람 불고 해가 지며 쇠붙이 소리 서걱거리는 고량, 수수밭에 내린 찬 서리, 기러기떼>같은 아름답고 청빈하던 기대를 버리고, 이제 참고 견디는 인내의 삶을 따른다. <삼동을 허옇게 얼어서 살자>에서 현실과의 예리한 응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먼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 「석상石像의 노래」
위의 시의 화자는 <그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지닌 비극적 존재자이다. <그대>는 <머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고, 화자가 지니는 그리운 사연은 눈썹 기슭에 피눈물이 어리울 만큼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벙어리 가슴>에 <혓바늘>로 말을 잃었으며 말문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너무나도 절실한 전언을 지니고 있지만 말문이 막힌 석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지닌 비극을 스스로 잠재우면서 인고의 삶을 살고 있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김관식은 자신이 당면한 비극을 구체화함으로써, 현실과 응전하고 있는 것이며, 현실을 극복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관식은 시적 자아와 현실이 불화의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초월적인 의지를 구체화하였다. 김관식은 그의 시 속에 이상향을 상정하면서, 그곳에서의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그려 보여 준다. 김관식의 시에는 그런 초탈한 삶을 그린 여러 편의 시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전원 귀의의 삶은 때때로 아직 청산하지 못한 현실에의 욕구를 반영해 보여주기도 한다. 거대한 현실 앞에 왜소화된 인간을 그린다. 인고의 삶을 살아가는 비극적 응전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김관식의 시에는 오연한 자존의식이 나타난다. 김관식의 시에 오연함과 자존의 의지가 나타나는 것은 무잡한 현실로부터 순정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김관식은 부패와 무질서가 만연된 현실, 가치 부재 속에서 시적 자아를 확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실현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위 수단은 오연함과 자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납향(臘享)도 지낸,
눈빛 새하얀 섣달 단대목.
한겹 장지 밖 울부짖는 저 바람 속
사나운 눈보라 성가시게 보채쌓고.
아내도 없이 홀아빗내 풍기는 비인 내 토실(土室). 아랫목 한귀퉁이 분(盆)에 섰는 너에게
정성스레 핫옷을 내어 입히다.
천정에 쥐란 놈이 엿볼 겨를에―.
악마딘 덩그렇게 가는 가지에 흰나비 몇 마리 건성드뭇 붙어 앉은 얼마 안되는 화접(花瓣)이라 할지라도
알만 모를만 가만히 새어나오는 말할 수 없는 느긋한 향기(香氣)
- 「古梅(고매)」에서
매화는 지절의 상징으로 의미화된 나무이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은 추위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려 난향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위의 시의 <고매>는 수난과 결핍 속에 던져진 시적 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납향(臘享)>은 한 해의 수확을 끝내고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의례이다. 한 해의 수확을 끝냈지만 시인이 겪는 결핍은 여전하다. 한 겹 장지 밖에는 찬바람이 울부짖고 있고 눈보라도 스치고 있다. 천정에는 쥐가 뛰어 다닌다. 이것이 김관식이 처해 있는 현실이고, 현실의 은유이다. 김관식은 환경 속의 시적 자아를 <고매(古梅)>로 인식한다.
부유함과 풍족함의 선비 서실에서 은은히 난향을 퍼뜨리고 있어야 할, 품격의 꽃이 지금 온갖 간난에 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결핍 속에 던져져 수난의 자리에 놓여 있다 해도 지절의 꽃임은 물론이다. 시인은 매화에 핫옷-솜을 둔 옷-을 입힌다. 몇 개의 화판을 붙인 채 은은한 꽃향기를 퍼뜨리고 있는 매화의 모습에서 김관식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 보여주고 있다. 김관식의 자존의식이 들어 나 있는 시이다. 몸은 비록 시련의 상황에 던져져 있지만 자신의 본성과 품격만은 지켜가고 있다는 오연함과 강한 자존을 볼 수 있다.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간. 심. 비. 폐. 신(肝, 心, 脾, 肺, 腎)…
오장 어디 한군데 성한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 철모르는 어린 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 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보다.
- 「병상록」
병상에 누운 시적 자아는 극한의 한계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온 몸에 병이 깊어 자리를 보존하고 누운지 10년이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생물학 교실의 골격 표본>처럼 야윈 채 자리에 누워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 그가 생계를 책임져야 할 혈육들이 얼크러져 잠들어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 자신은 어떤 책무도 감당할 수 없는 무력한 처지이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디이젤 차>가 달리듯 병상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병이 깊은 처지이다.
그러나, 김관식은 이처럼 처절한 정한의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는 오연히 일어서서 <가여운 내 아들 딸들아/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고 외친다. 안락에 빠져 죽어서는 안되고 우환을 딛고 일어서는 데에 참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검>은 <백금 도가니의 단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오연한 절규를 통해 시인은 절망의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김관식의 시에는 오연한 자존의식이 나타난다. 김관식의 시에 오연함과 자존의 의지가 나타나는 것은 무잡한 현실로부터 순정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김관식은 부패와 무질서가 만연된 현실, 가치 부재 속에서 시적 자아를 확립하려 하였다.
김관식의 시에 저항적인 의식의 일단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196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이다. 그는 봉직해오던 고등학교 교사를 사직하였으며, 잠깐 동안 나가던 『세계일보』의 논설위원도 사직하였다. 그는 4.19 직후에 치뤄진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고, 낙선하였다. 1960년을 전후한 시기 조직도 자금도 없이 신념만으로 감행한 무모한 출마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용산구의 당선자는 정치계의 거물 장면(張勉)이었다.
김관식이 초월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인고 속에서 극기하기도 하던 현실과의 관계를 버리고, 직접 현실과의 힘든 응전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적 좌절이나 절망을 자아의 내면으로 용해시켜 가는 과거의 방식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김관식이 이런 변모를 보이게 된 것은 현실적 가치의 타락이 극에 달한 당시 사회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래적인 선비의 이상이었던 ‘치국 평천하(治國 平天下)’의 덕목을 실현해야 한다는 명분에서였을 것이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그의 현장 정치 도전은 많은 화제를 제공하였지만, 시인 김관식에게는 그의 시적 경향을 일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관식은 이때까지의 내적, 소극적 현실관을 버리고 현실 자체와 맞부딪는 외적, 적극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 것이다.
바위야 바위야 눌러라.
황소 같은 바위야
천근(千斤) 같은 무게로
네가 아무리 눌러도
죽순(竹筍)은 뾰죽뾰죽
자꾸만 자꾸만 솟더라.
- 「諷謠調(풍요조)」
위의 시에서 김관식은 <바위>와 같은 외압을 인식하고 있으며, 인식한 외압과 힘든 응전을 벌이고 있다. 김관식이 인식한 현실의 좌절과 절망은 <황소>와 같은 무게와 힘을 지닌 <천근>이다. 지금, <천근의 무게를 지닌 황소>와 <죽순>은 불화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죽순의 의지가 황소의 무게를 지닌 현실에 짓눌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순>의 의지란 무엇인가. <죽순>은 힘차게 뻗어 올라가 굳고 곧은 신념과 지절의 존재를 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순>은 여린 싹의 상태인 채 바위에 눌리고 있고, <대나무>로 자라 오르려는 자신의 의지를 심각히 위협받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거대한 바위에 짓눌려 자신의 의지가 심각히 위협받는 상황, 이것이 김관식이 인식한 현실관이다. 그러나, 김관식은 천근의 무게로 짓눌리는 현실의 좌절과 절망을 딛고 불의의 현실 속에 생명의지를 실현하고 있는 <죽순>의 의지를 발견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시의 표제가 <풍요조(諷謠調)>로 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요>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퍼져나가 널리 불려지는 전파력을 가진 노래이다. 김관식은 거대한 외압 속에서도 솟아올라 신념과 지절을 실현하는 <죽순>의 의지가 <풍요>처럼 전파되어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한 여름내 땀으로 가꾼
무우 배추가 서푼에 팔리나니
배부른 자여 은진미륵처럼 서서
코끼리같은
벽이 되거라
나는 엄나무마냥 야위어 산다
가시가 돋힌…
- 「무제」
위의 시에서 김관식이 인식하고 있는 부정의 현실은 빈부의 문제이다. 거대 자산의 횡포 앞에 무너져가는 사회구조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도시와 농촌간의 불균형, 재산가와 빈민 간에 개재되어 있는 모순의 수탈구조, 이런 것들을 투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적시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우 배추>의 문제이다. <무우 배추>는 땅에서 자라 오르는 근원 소채이다. 한민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면서 동일한 집단무의식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김치문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 <무우 배추>이다.
농민은 <무우 배추>의 파종으로부터 수확에 이르는 오랜 기간 땀과 애정으로 보살핀다. 그러니까, 판매대에 오르는 <무우 배추>는 공장에서 출하되어 나오는 일반 상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농민의 땀이 깃든 애정의 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애정의 산물>이 제 값을 받지 못하고 푸대접받는 것이 현실이다. <서푼>이 되어 팔려 가는 <농민의 땀> 앞에서 시인은 이 사회가 지닌 근원적 모순과 불평등 구조를 본다.
김관식이 이 불평등 구조를 통해 인식해내고 있는 농민의 모습은 거대한 벽 앞에서 가시를 지닌 엄나무처럼 야위고 있다. 그런데, 이 <엄나무>의 비극은 그 앞에 선 벽이 크고 높은 것일수록 증대되게 마련이다. <배부른 자>의 탐욕과 횡포가 크면 클수록, 공동체 사회의 모랄은 휘발되어가게 마련이고 <배곺은 자>들의 비극도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엄나무>는 <거대한 벽> 앞에서 야위어 가지만 <가시>를 지니고 있다. 가시를 지닌 채 야위어 가는 나무는 은진미륵 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한 <벽> 앞에 서 있고, 그 그늘에 가리워진 채 야위어 간다. <은진미륵>은 언젠가 찾아올 구원자를 향한 미륵신앙의 상징물이다. 그런 은진미륵을 거대한 좌절과 절망으로 상정함으로써 시적 내포가 확산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관식은 선명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미지는 인식에 닿아 있으며 정신이 되어 있다. 묘사가 인식의 출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관식의 묘사는 구체적인 것, 미세한 것들의 본질을 인식해내는 치밀한 것이다.
수천 만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즈막 안쓰러운 저녁 햇살을 다투어
얇은 날개야 마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 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려는 듯
갓난이 새끼손가락보다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 가물 높이 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나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나무 같이
물 오른 아이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그 가운데 어떤 놈들은 물 속만을 들여다 보고
제가끔 골돌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蓮(연)꽃이 그 큰 봉우리를 열었다.
- 「연蓮」
위의 시의 잠자리 이미지는 탁월한 정신 묘사가 되어 있다. 지금 잠자리들은 하루 해가 저물기 전의 한뼘 남짓한 날빛 속에서 안쓰럽게 날고 있다. 잠자리들이 이처럼 안쓰럽게 날고 있는 것은 자신이 얼마 남지 않은 저물녘의 날빛 속을 날고 있으며 머지않아 밤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중한 한계시간을 나르는 잠자리들의 비상의 몸짓은 필사적인 것이 되어 있다. <얇은 날개야 마스러지건 말건>(‘마스러지건’이 창작과 비평사 판 전집에는 ‘바스러지건’으로 고쳐 수록되어 있으나 『현대문학』추천 당시나 1956년 『김관식 시선』에 모두 ‘마스러지건’으로 되어 있다.),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구을리며>, <새끼 손가락 보다 작은 키로 허공을 자질하며>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잠자리 이미지가 한계상황 속에서의 치열한 생명의지의 정신을 구체화해주고 있다.
제2연에서는 연못가 아이들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성찰한다. 어리고 청순한 눈들이 물속을 들여다보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제1연에서 제시된 치열한 생명 구현의 잠자리의 한계상황과 제2연의 어리고 청순한 아이들이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는 성찰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의미의 내포를 확산시킨다. 제3연에서는 1연과 2연의 외부 묘사가 시적 자아의 내면으로 치환된다. 마음 속 개흙밭에 <향기를 마련하여> <연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것이다.
김관식은 선명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미지는 정신이 되어 있고 인식에 닿아 있다. 김관식의 미세하고 선명한 이미지들이 도달한 정신의 깊이는 1950년대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였다.
Ⅳ
김관식은 한국시에서 잊혀진 시인이다. 50년대에 시단에 등단해서 놀라운 감각과 해박한 깊이를 보여준 시인이었지만 36세의 한창 나이에 타계하였다. 그는 숱한 기행담과 에피소드를 남겼지만 그의 시는 기행담도 에피소드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가 보여주는 깊이나 품격, 그리고 이미지나 비유들은 매우 새롭고 참신하다.
김관식은 시적 자아와 현실이 불화의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초월적인 의지를 구체화하였다. 김관식은 그의 시속에 이상향을 상정하면서, 그곳에서의 한적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그려 보여 준다. 김관식의 시에는 그런 초탈한 삶을 그린 여러 편의 시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전원 귀의의 삶은 때때로 아직 청산하지 못한 현실에의 욕구를 반영해 보여주기도 한다. 거대한 현실 앞에 왜소화된 인간을 그린다. 인고의 삶을 살아가는 비극적 응전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김관식의 시에는 오연한 자존의식이 나타난다. 김관식의 시에 오연함과 자존의 의지가 나타나는 것은 무잡한 현실로부터 순정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김관식은 부패와 무질서가 만연된 현실, 가치 부재 속에서 시적 자아를 확립하려 하였다.
김관식의 시에 저항적인 의식의 일단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196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이다. 김관식이 초월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인고 속에서 극기하기도 하던 현실과의 관계를 버리고, 직접 현실과의 힘든 응전을 시작한 것은 현실적 가치의 타락이 극에 달한 당시 사회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래적인 선비의 이상이었던 ‘치국 평천하(治國 平天下)’의 덕목을 실현해야 한다는 명분에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