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에 대한 단상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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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을 읽어라”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특히 대권을 꿈꾸는 사람에게 시대정신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고 시대정신이 반영된 비전과 말로 국민을 감동시키며 지지를 받는 후보들이 통상 승리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대해 많은 언론은 “시대정신에서 졌다”는 평가를 했다. 이 후보는 2002년 1월에 지지도가 50%을 넘을 정도로 대통령이 거의 다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더구나 ‘이회창 대세론’이 거세지면서 반개혁적 영남 수구 보수 인물들이 이 후보 핵심으로 포진됐다. 당시 지지도가 4%에 불과했던 노무현 후보는 “특권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몸부림쳤다. 누구도 노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비밀 병기라 할 수 있는 국민참여경선제를 거치면서 노무현 바람(노풍)이 거세게 불었고 결국 노 후보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3김 정치 청산” “변화와 개혁”을 대선의 핵심 구호로 내세웠다. 그러나 5년이 지난 2002년에는 당시 박근혜 부총재가 요구하는 당권․대권 분리를 거부할 정도로 반개혁적인 모습을 보였고, 결국 대선 경쟁 후보는 이 후보를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당시 2002년 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회창 후보가 “3김과 다를 바 없다”는 응답이 무려 57%에 이르렀다. 시대는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데 이 후보는 지지도에 도취되어 정반대의 길을 걷다가 노풍으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놀라운 것은 2007년에 이회창 후보는 2002년 대선에서 자신은 “시대정신에 진 것이 아니라 병풍을 주도한 김대업에 졌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이회창 후보는 한국 대선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후보는 3번 연속 대선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리 상고 출신 후보들에게 모두 패배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목포상고,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상고, 이명박 대통령은 동지상고 출신이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6세에 사시에 합격(당시 30명 선출)한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가 이들 상고 출신 대통령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 대선에선 학벌과 경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민과 같은 삶을 살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에 부합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수평적 정권교체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2007년 이명박 후보는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경제 대통령론’을 제기했다. 이런 비전과 메시지가 상대 후보들보다 훨씬 시대정신에 부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박근혜 대통령처럼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어몬드 수저’를 갖고 태어난 사람도 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을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박 후보가 당시 야당 후보인 문재인 후보보다 훨씬 앞섰다. 정통 보수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박 후보가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경제 민주화’와 ‘맞춤형 복지’를 들고 나왔다. ‘형평’과 ‘복지 확대’라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보수의 시각에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하면 승리한다는 착각에 빠져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후보 단일화는 시대정신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이란 철학적으로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이 용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독일을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오늘날 시대정신은 철학적인 정의보다는 단지 그 시대에 특유의 사회적 상식을 가리키거나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시대 과제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미래연구원과 동아일보가 최근 의미 있는 여론조사(2016년 7월 28일-8월 9일)를 실시했다. 상투적인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벗어나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을 찾기 위한 시도였다. 현재 각종 언론 매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차기 대선 후보 관련 지지도 조사는 인기 조사 성격이 강하다. 통상 인지도가 높고, 정치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으며, 특정 지역에 기반이 있는 후보들의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단순 지지도 조사로는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나, 대한민국이 어떤 미래를 만나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읽고 시급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번 조사가 의미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경제 분야 전문가 300명과 정치·사회 분야 전문가 222명 등 총 522명이 참여했다. 정확하고 가치 있는 여론조사의 제일 조건은 타당성(validity)있는 설문 항을 만드는 것인데 이번 조사의 문항 설계와 분석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수차례 회의를 거쳐 완성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국가미래연구원·동아일보 조사결과, ‘일자리 창출’(41.8%)과 ‘공동체 회복’(18.4%)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혔다. ‘민주적 국가구조 확립’(8.8%), ‘불평등 완화(8.6%), ’저출산 고령화 회복‘(8.2%), ’경제 민주화‘(7.5%)가 그 뒤를 이었다.
한편, 이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가치로 공정(47.1%)을 가장 많이 지적했다. 그 다음은 혁신(15.7%), 정의(13.8%), 통합(15.5%) 순으로 나타났다.
이런 조사 결과가 주는 함의는 “공정한 경쟁 속에서 혁신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 정의를 바로 세워 국민을 통합시킴으로써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느냐”가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현재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고 혁신의 발판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 등 경제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국가미래연구원과 동아일보 조사 결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몇 가지 특성이 발견된다.
첫째, 전문가들의 이념 성향에 따라 시대 과제에 대한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령, 보수(43.2%)와 중도 성향(43.9%) 성향의 전문가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가장 많이 지적했다. 반면 진보 성향의 전문가들은 “민주적 국가 지배구조”(24.4%)를 가장 많이 지적했다. 진보의 시각은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 구조를 바꿔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 논리다. 내년 대선에서 진보와 보수 간에 경제 살리기 해법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내년 대선에서 일자리 창출과 격차 해소 외에 ‘민주주의 논쟁’이 크게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둘째, 핵심 가치 면에서도 진보와 보수 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진보는 공정(46.3%)과 정의(31.7%)를 크게 강조한 반면, 보수는 공정(37.3%)와 혁신(23.0%)에 비중을 두고 있다. 정의에 대한 비중은 11.5%에 불과했다. 한편, 중도에서는 공정(51.2%)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은 가운데, 혁신(13.7%)과 정의(12.6%)가 비슷했다.
이런 조사 결과가 주는 함의는 진보와 보수에 따라 공정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진보는 공정한 분배를 강조한지만 보수는 공정한 경쟁에 큰 비중을 둘 수 있다. 내년 대선에서 공정을 둘러싼 여야 간, 이념 간에 극심한 대립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전문가들조차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제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적다. 가령,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북 화해(1.5%), 기회균등(1.3%), 복지 강화(1.0%)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낮았다. 일자리 창출과 공동체 회복 등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에 비중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만나야 할 미래가치에 대한 비중이 너무 낮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여론주도층인 전무가 집단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비전화 시키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넷째, 이념성향별로 시대정신 구현을 가로막고 있는 대상에서 큰 차이가 있다. ‘누가 시대정신 구현을 가로막고 있느냐’는 질문에 절반 이상인 54.8%가 ‘정치인’을 꼽았다. 이어 대통령(15.7%), 이익집단(11.1%), 재벌(7.7%) 순이었다. 그런데 진보 층에서는 가장 많은 39.0%가 대통령을 지적한 반면, 보수층에선 그 비중이 7.9%에 불과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헤 대통령의 5년 평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날 전망이다. 대선이 미래가 아니라 ‘잃어버린 10년”등과 같은 과거로 돌아갈 경우 선거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조사에선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전문가들의 10명중 8명(77.8%)이 ‘현재 우리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응답한 것이다. 박근혜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언제부터인지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가고 있다”며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왜 많은 국민들이 좌절하고 분노하는 지에 대한 원인 규명과 성찰이 없었다. 분명, 국민의 열망이 담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인물이 국민의 선택을 받는다. 그런데, 진정한 시대정신이란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과제와 비전일 것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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