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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학 총장이 노예 후손들에 사죄하는 까닭 “1838년 272명 노예를 팔아 빚을 갚은 죄를 진사(陳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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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09월17일 18시15분
  • 최종수정 2016년12월16일 07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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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어디를 둘러보아도 빤한 구석 없이 온갖 비행과 혼란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의 형국이다. 올 곧게 살아가려는 순수한 품성(品性),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최소한의 염치(廉恥),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기본을 이루는 도덕(道德)은 내팽개쳐진 지 오래된 듯 하다. 굳이 종교의 가르침을 들어 얘기할 것도 없이,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삼독(三毒) 오욕(五慾)에서 솟아나는 독버섯이다. 개개인이 살아가는 데 안분(安分)의 정도를 넘어서 과분한 것을 추구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해악(害惡)이다. 일상으로 벌어지는 부정, 거짓, 질시, 반목, 쟁투는 해도 너무 한 것이, 이제 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쏠려가다 보니 일상 사회 규율이나 약속은 다반사로 무시되고 무너지기 일쑤다. 

허나, 근자에 우연히 눈에 띈 New York Times가 전하는 이야기 한 토막이 이런 울화를 조금이나마 씻어주는 듯 해서 조금 더 자세히 자초지종을 찾아보고, 나름대로 생각도 해본 끝에, 늘 해오던 무슨 ‘경제’라는 둥, ‘금융’이라는 둥 하는 소위 관심 분야도 아닌 것을, 큰 마음을 먹고 소개하기로 작정했다.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인성은 피폐해져 후안무치의 극에 달하고, 사회 정의는 사라져 무뢰한들 간의 아귀 다툼을 일상으로 연출하는 이 풍진(風塵) 세상에, 인간이 인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한다는 게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 신선한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역사학에는 전혀 발길도 들여 놓아 본 적도 없는 문외한인 처지에 무척 주제넘은 일이지만, 과히 힐책하지 말 것을 미리 용서를 구하며, 읽는 이마다 조그만 삶의 교훈으로 음미해 보기를 감히 권한다.

 

■ 조지타운 대학 총장이 노예의 후손들을 만난 까닭 

지난 6월 초 조지타운 대학 John J. DeGioia 총장이 워싱턴 Spokane의 한 공공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45분 여 동안 Patricia Bayonne-Johnson이라는 이름의 한 부인을 만났다. 그리고는 Davenport 호텔로 옮겨 오찬을 같이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 만남은 어쩌면 역사적인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DeGioia 총장은 뒤에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듣고, 배우려고 왔습니다. 이번 만남은 대단히 감동적이었고 크게 용기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날 DeGioia 총장이 만난 Bayonne-Johnson 여사는 아마추어 가보(家譜)학자이자 은퇴한 교사다. 이 아마추어 가보학자는 “DeGioia 총장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고,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 전하면서, “이것은 대단히 훌륭한 시작이다” 고 소감을 말하며, 자신의 조상들이 겪었던 희생과 고난에 대해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데 필요한 절차를 기꺼이 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 회동은 조지타운 대학 관리들이 이 대학이 과거에 노예(奴隸) 매매에 연루되었던 사실을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가를 고심하던 중에 주선한 것이다. 그 사건이란 약 200여년 전 이 학교를 세운 카톨릭 예수회(Jesuit) 사제들이 소유했던 노예들을 판 것이었고, 이들이 지금 돈으로 330만 달러 정도에 팔려간 것이다. 

 

■ 카톨릭 ‘예수회(Jesuit)’ 대학이 노예들을 팔게 된 사연  

예수회 사제들이 272명의 노예들을 팔아 넘긴 것은 지금부터 약 200년 전인 1838년의 일이다. 예수회 신부들이 조지타운 대학을 설립했을 당시에는 대학의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이 Maryland 주에 있는 예수회 농장 수익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농장 운영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부자 신자들이 자주 노예들을 기증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1838년에 일어난 노예 매각 사건은 예수회 사제들인 이 대학 초기의 두 명의 총장들이 조직한 것이었다. 

조지타운 대학이 운영 자금을 의존해 오던 Maryland 주 농장은 경영이 부실해지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대학의 운영 자금을 조달해 줄 수가 없게 되었고, 당시 총장이었던 Mulledy 신부는 이러다가 대학이 대규모의 현금 자본을 투입하지 않으면 존립조차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여 새로운 자금원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Henry Johnson 하원의원 및 Louisiana주에 있는 지주 Jesse Batey와 협상에 들어갔고, 1838년 노예들을 Louisiana 주 농장으로 팔기로 타결을 본 것이다. 

이 때 Mulledy 총장 신부는 노예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고, 가족들이 흩어지지 않게 해 줄 것이고, 매각 대전은 빚을 갚거나, 운용 경비로 써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 관계자의 말로는 이런 약속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Mulledy 신부는 노예 매도 선수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자기 임기 중에 진 빚을 갚는데 썼고, 이로 인해 로마로 소환되어 사임했다. 이로 인해, 이듬 해에는 당시 교황 Gregory 16세는 어떤 이유에서도 흑인 노예들의 거래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된다. 

 

■ 당시 사제들은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노예 매도는 보통 노예 매매와 다른 것이었다. 이 노예들은 미국에서도 저명한 카톨릭 예수회 사제들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에 훌륭한 카톨릭 고등교육 기관이었고, 나중에 조지타운 대학이 된 이 대학의 장래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노예들과 함께 팔려 나간 것이다. 이 노예 매각 대금의 일부가 당시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대학의 빚을 상환하는 데 사용된 것이다. 조지타운 대학 역사학자이며 지금 이 대학이 과거에 노예 제도에 연루되어 응어리진 비극적인 역사의 뿌리를 알리고 진사(陳謝)하는 방도를 연구하고 있는 실무 작업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Adam Rothman 박사는 “대학의 존재 자체가 이런 역사에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 말한다. 

당시의 기록들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연구에 참가하고 있는 팀원들은 곳곳의 문서 기록을 열람하고, Maryland 주 예수회 농장에서 New Orleans 부두까지 노예들이 팔려나간 족적(足跡)을 따라가 보기도 하면서 Louisiana 3개 농장으로 흩어진 노예들의 행방을 찾기도 했다. 지금까지 결과는, 사제들에 의해 강제되어 그들이 갇혀 있던 삶의 일면을 보는 정도에 그친다. 그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한 예배에 참석하도록 강요하고, 때로는 채찍질 당하고, 때로는 팔려 나가기도 한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도망과 농장의 거친 작업 환경 그리고 강제 노역에 대한 참여를 둘러싸고 일부 예수회 사제들의 두려움의 목소리 등 기록들이다. 

Rothman 박사는 “미국 노예 제도의 축소판입니다” 고 말한다. 노예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목수들, 대장간 일하는 사람들, 임신한 부인들, 건장한 아버지들, 아이들, 갓난 아기들이었다. 이들은 1838년에 다른 곳으로 팔려가면서 가족 및 공동 사회가 찢어지는 두려움과, 좌절과, 슬픔을 겪었던 것이다. 이전에 예수회와 노예 제도에 관해 저술한 적이 있는 Seattle 대학 역사학 교수 Thomas R, Murphy 신부는, 당시는 카톨릭 교회에서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비도덕적(immoral)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Rothman 박사의 연구 결과로는, 이전에 예수회 사제들은 개인 노예들을 팔아 넘기기도 했었다. 1780년대에는 자신들이 소유할 노예들의 구성을 고르는 것에 대해 공공연하게 논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제들에게는 그들이 소유했던 노예들을 전부 팔아 넘긴다는 결정에 대해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노예들이 남쪽의 깊은 오지(奧地)로 팔려가면 카톨릭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 악명 높은 남부 농장의 무자비한 노예 취급으로 고난을 겪을 것, 그리고 노예 가족들이 다시 제각기 팔려 나가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 학생들의 항거(抗拒)가 발단, 각계가 진상 규명에 참여 

오늘날에 이르러, 조지타운 대학 캠퍼스 내에는 인종 차별에 대한 항거(抗拒)가 일어나고 있다. 이전부터 이와 유사한 움직임은 있었으나, 이렇게 대학 측의 움직임을 획기적으로 확대되게 만든 것은 역시 학생들의 시위가 촉발한 것이다. 학생들은 항거를 위한 연대를 조직했고 팔려간 272명의 노예들을 상징하는 ‘#GU 272’ 라는 띠를 두르고 데모를 하면서 항거했다. 드디어, 대학 측은 이 대학 건물에서 노예를 팔아 넘긴 초기의 2 명의 총장들의 이름을 떼어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 대학 졸업생인 사업가 Cellini 씨는 Georgetown Memory Project라는 비영리 단체를 결성하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펼치면서 8명의 가보학자들을 고용하여 진상을 밝혀내는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대학 교수, 학생, 졸업생 및 가보(家譜)학자들로 이례적인 단체가 결성되어 당시 팔려간 남녀 노예들,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일이 있었다면,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 팔려갔던 노예들의 후손들에게 무슨 빚을 지고 있는지를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Brown, Columbia, Harvard 및 University of Virginia 등을 포함하여 미국의 많은 대학들은 그들 대학들이 노예 제도 및 노예 매매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1838년에 조지타운 대학을 운영했던 예수회 사제들마저 노예를 매도하려고 획책(劃策)했다는 것은 당시의 노예 매매 제도의 규모가 실로 엄청났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272명 노예의 후손들에 무엇을 갚아야 하나? ”  

이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이 대학 졸업생이자 사업가인 Cellini 씨는 여태까지 이 대학이나 예수회(Jesuit)도 이들 노예들의 고난의 삶을 추적하거나 그들의 후예들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그 자신도 미국의 노예 역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조지타운 대학 기록에 오랜 동안 남겨져 온 노예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들은 이름도 얼굴도 없는 사람들의 꾸며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름을 가진 실제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실제 후손들입니다” 고 말한다. 

가보학자들 및 조력자들의 노력으로, Cornelius Hawkins 라는 이름의 한 노예 소년의 가족 역사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에 대한 사진, 편지, 보도 내용 등 아무 것도 그가 Maryland주 예수회 농장에서 겪은 마지막 시절에 대해 전해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다행으로, 항구에서 노예들이 실려 나간 기록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가 노예들을 싣고 New Orleans 항구로 떠났던 화물선에 태워져 팔려간 때는 키가 겨우 5피트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이 어린 노예의 이름은 한 검사관이 1838년 12월 6일에, ‘화물(貨物)’을 검사하고 나서 “검사필, 틀림없음” 이라는 기록에 남아 있었다. 이 배에는 129명의 다른 노예들도 태워져 있었다. 

 

■ 지나간 과오(過誤)에서 배우려는 것  

당시 로마 예수회 국제기구 책임을 맡고 있던 Jan Roothaan 사제는, 당초에는 노예를 파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던 듯, “노예를 팔아 넘겨 우리의 영혼을 잃느니 차라리 재정적 곤란을 겪는 편이 더 낳을 것” 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 조지타운 대학 DeGioia 총장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카톨릭 전통 체계에 따라” 워싱턴 교구와 미국 예수회의 파트너십을 위한 ‘화해의 미사(Mass of reconciliation)’ 를 거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학생들, 교수들, 그리고 노예의 후손들이 이 대학 Gaston Hall에 운집한 자리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 공동체(예수회)는 노예 제도에 참여했습니다. 이 원죄의 악행(original evil)은 이 나라의 처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금 나타났습니다. 우리들은 진실의 뒤에 숨어 있을 수 있었고, 이런 진실을 묻어 버렸고, 이런 진실을 부정하고 무시해 왔습니다“ 고 말했다. 우리는 개인으로써 그리고 공동체로써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의 소유자라는 것을 거절하면서는 최상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고 말했다. 

연설을 마치고 좌중의 의견을 구하자, 한 남자가 마이크를 받았다. “내 이름은 Joe Stewart 입니다. 나는 272 명 노예 중 한 사람의 후손입니다” 고 자신을 소개하고 지금 이 대학이 기울이고 있는 진상 규명 노력에 후의를 표했다. 그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고 선언하여 다른 후예들의 찬동을 받았다. 그 후 DeGioia 총장은 실무 그룹, 학생들, 학자들, 행정가들 및 졸업생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놓고 이러한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 갈 것인가에 대해 숙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 후 New York Times에서 팔려 간 노예 중 한 사람인 Cornelius Hawkins의 일생을 추적하고, 오늘날 후예를 찾아 낸 것이다. 

동 위원회의 보고서는 조지타운 대학의 노예 제도에 대한 의존도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하고 깊은 것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대학이 1789년 개방되기 훨씬 전부터 노예들의 노동 및 노예 매도에 의한 수익은 대학 운용 자금의 수익 모델이었고, 노예들은 예수회 소유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것 외에도 캠퍼스 내에서도 노역을 했고, 심지어는 학생들이나 다른 부자들에 의해 고용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위원회는 앞으로도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밝혀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진실(眞實)’이 무엇인가를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밝혀진 진실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 우리는 이 참혹한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미국의 노예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Alex Haley의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 ‘뿌리(Roots)’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주인공 ‘쿤타 킨테’의 처절한 인생사를 그린 것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당시 미 대륙을 개척하고 있던 이민자들의 무자비한 폭압으로 낯선 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는 지금 미국 인구에서 흑인 비율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참혹의 역사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들이 즐겨 듣는 ‘Amazing Grace’라는 찬송가 노래는 바로 이런 노예들을 실어 나르던 노예선의 선장을 했던 작가가 자신의 지난 날에 저지른 과오를 회계하며 쓴 참회의 고백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류 역사 상 예가 드문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극악 무도한 학대 사례인 노예 제도가 일상적인 사회 제도처럼 횡행했던 것은 200여년 전 미국 건국 초기의 일이다. 그 후 수 많은 의인(義人) 지사(志士)들이 이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노력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미국 사회에 흑백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있고, 심지어 서로 살육을 자행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이것도 따져보면 폭압으로 가해한 백인들이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 사죄, 솔직한 역사의 청산을 기피해서 일어나는 현재 진행형 갈등의 표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최근 역사를 별견(瞥見)해 보아도, 이에 못지않은 가해와 핍박이 엄연히 있었으나, 진정한 사과와 용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에 연유한 갈등, 대립, 반목은 가실 길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제 하에 신음하던 시기에도 동족 간 반목이 극심했고, 해방되고 나서 정부 수립 전후에 벌어진 좌우 사상 대결에서는 살육 투쟁도 빈번히 벌어졌다. 이후 갈라진 남북 구도 하에서는 동족 상잔(相殘)의 전면 전쟁까지 치루었으나 아직도 서로의 목숨을 노린 대치 상황만 계속될 뿐이다. 그 후 우리 사회 발전 과정에서도 이해 관계의 충돌은 지역 간, 계층 간에 극한의 대립을 낳았고, 이로 인한 갈등도 여전히 내연(內燃)하고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지금에 와서 과거의 충돌 사실에 연유되어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대부분 당시의 해당 행위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조지타운 대학의 사죄와 화해 노력은 무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에 대해 지금 사람들이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노력이다. 만일, 지금에 와서도 당시와 같은 대립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한다면 당시 과오를 저지른 당사자들과 다름 없는 진정한 입장에서의 협상과, 타협과 화해의 노력을 서둘러야 할 책무를 같이 지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권력의 힘으로 박해하고 탄압한 것에 대한 사죄와 화해, 부(富)를 가진 자들이 고용된 노동자들에 가한 부당한 처우 및 무시에 대한 사죄와 화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영예와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약한 자들에게 자행한 폭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화해의 노력이 없이는, 앞서 소개한 조지타운 대학의 DeGois 총장이 역설한 바와 같이, 우리는 분명히 최선의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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