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1)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지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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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계속되는 핵 도발과 사드배치를 둘러싼 청와대와 여야의 찬반 갈등, 불편해진 한·중 갈등, 안개 속에 빠진 미국 대통령선거 등 한반도를 둘러싼 앞이 안 보이는 안보위기 속에 대책 없이 터진 대우조선과 한진해운 사태, 믿었던 검사와 판사들의 비리사건, 그리고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제기와 이를 감싸는 청와대와 조선일보의 격돌, 표류하고 있는 세월호 사건 등등, 이들을 보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한마디로 나라에 기강이 무너지고, 영이 서지 않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국정이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박근혜정부에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이 일찍 찾아온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1993년 12월 농수산수석비서관(1996년 8월 해양수산부 출범이후 농림해양수석비서관으로 변경)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김영삼 대통령(YS)임기 말까지 4년 2개월여를 청와대에서 보내며 몸으로 부딪쳐보았던 1997년 YS 5년차의 청와대가 새삼 되새겨지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동시에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혼란상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YS 5년차 청와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일찍 찾아온 2017년 대선전쟁
요즈음 나라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아무래도 내년 대선전이 벌써 시작된 것 같다. 지난 4월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집권여당이 선거전 적전 분열로 스스로 자멸하면서 여소야대의 정국이 만들어 졌고 대통령은 야당협조를 구하지 않고서는 법안하나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 임기 말 레임덕 우려의 출발선상에 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야당은 벌써부터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듯 들떠있으며,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제동을 걸고 세(勢)과시를 하고 있다. 위축된 여당은 야권과 청와대 사이에서 말이 꼬이고 스텝이 꼬여 벌써부터 야당으로부터 ‘야당 연습하고 있다’는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
임기 4년차를 보내고 있는 청와대는 ‘레임덕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여야 정치권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국정운영과 정책결정을 둘러싼 청와대와 여야 간의 마찰음이 그 어느 때 보다 크게 울리고 국정은 표류하고 있다.
야당 대선예비후보자들의 마음은 이미 대선에 가 있는 듯하다. 벌써부터 나도는 ‘아무개 대세론’을 잠재워야 한다며 제각각 자기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있다. 여당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외부영입을 고민할 만큼 인물난이지만 이런저런 후보들이 청와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차별화를 시도하는 자기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야 외곽을 떠도는 사람들도 ‘제3 지대’운운하면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추석을 계기로 이슈선점을 통해 자신을 알리기 위한 여야 예비주자들의 낮 설은 주장들이 벌써부터 신문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곳곳에서 예비후보자들은 민생행보니 강연이니 토크 콘서트니 하며 세 불리기를 위한 크고 작은 대선굿판을 벌이고 있고, 대선꾼들도 다시 굿판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래저래 이번 추석은 대선 전초전이 될 전망이다.
‘서산에 지는 해’
1987년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채택한 이후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모두 두 번의 정권교체를 포함한 여섯 번의 정부교체를 통해 ‘권불 5년’의 단임 대통령제를 실천해 오고 있다. 내년(2017) 말에는 7번째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정부를 바꾸게 된다. 그래서 대통령 임기 5년차가 되면 나라는 온 통 대선굿판에 빠지고 국정은 마비가 된다. 대선굿판의 소리는 모든 대선예비후보자들에게는 가슴 뛰는 희망의 해가 떠올랐음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그러나 청와대에 있는 현직 대통령에게는 권력을 내려놓고 청와대를 떠나야 하는 퇴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조기신호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나”라는 아리랑의 노랫말처럼 현직 대통령은 임기 5년차가 되는 순간 영락없이 ‘서산에 지는 해’신세가 된다.
대선 판이 벌어지면 동쪽의 이산저산에서는 자천타천으로 소위 대선 잠룡이라고 부르는 ‘종이 해’들이 떠오른다. 대부분은 신기루 같아서 어른거리다 사라지지만 몇몇은 여야당을 대표하는 대권후보로 살아남아 생명을 얻어 힘차게 떠오르는 아침 해가 되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천하에는 하나의 해만 떠있어야 하는 데 5년 단임 대통령의 임기 말년에는 불행하게 최소한 3개 이상의 해가 떠올라 천하를 비추며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 천하는 사분오열로 찢어지고 권력을 다시 나누기 시작한다. 대선 판에서 한 권력 잡아보려는 사람들은 떠오르는 해 가운데 누가 진짜 해가 될지를 점치며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선다. 떠오르는 해들과 지는 해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지는 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떠오르는 해의 찬란한 빛에 가려 빛을 잃어간다. 지는 해가 떠오르는 해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YS 4년차의 청와대
1997년 임기 5년차 새해를 맞이한 YS는 새해의 각오를 다지는 신년휘호를 ‘유시유종(有始有終)’이라고 썼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임기 말년을 맞이한 YS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시작한 변화와 개혁을 매듭지어 국정의 처음과 끝을 한결 같이 하고 싶다는 다짐으로 그 휘호를 썼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그러나 YS는 그 다짐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외환위기로 국민에게 큰 고통을 안긴 역사의 죄인이 되어 쓸쓸히 청와대를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취임 후 10개월이 채 안된 1993년 12월 18일 내가 처음 만난 YS는 동안의 열정과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그야말로 중천에 뜬 빛나는 해였다. 취임 후 그가 추진한 문민개혁은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던 해가 임기 5년차가 되자 ‘해들의 전쟁’에 가리고 밀리며 빛을 잃고 급격히 조락하기 시작했다.
YS가 빛을 잃기 시작한 것은 사실은 임기 4년차인 1996년 4월에 실시된 15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부터라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정치상황이 20년 전에도 일어났다. 1995년 6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패한 YS는 다가오는 총선승리에 큰 공을 들였다. 먼저 민주자유당을 자신의 색깔에 맞추어 ‘신한국당’으로 환골탈태시켰다. 국회의원공천도 한 명 한 명 직접 챙겼다. 민정계 의원들을 공천 탈락시키고 민주계의 젊은 피들을 수혈하는 등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김무성, 손학규, 김문수, 이재오, 김영춘, 등등이 그 때 YS의 낙점을 받았다. 선거는 신한국당의 승리로 끝났지만 과반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여소야대가 되었다. 안정된 국정운영을 위해 야당과 무소속 당선자등에 대한 영입(‘의원 빼가기’)작업이 진행되었고 신한국당은 결국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 민심이 만들어 준 여소야대를 YS는 여대야소로 다시 바꾸어 버렸다. 돌이켜 보면 그 것은 정치 9단의 중대한 패착이었다. 그 일로 YS는 자신의 상징이었던 대도무문(大道無門)의 큰 정치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YS와 청와대와 정치권을 뒤흔든 것은 1996년 12월 26일 새벽 국회에서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문민정부의 트레이드마크인 민주성을 훼손하는 정치적 대참사였다.
1996년 15대 4월 총선이후 YS는 시대적 과제인 노동개혁에 착수했다. 대선을 앞둔 임기 후반기에 추진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노동개혁을 미루는 것은 국가미래를 생각해야하는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노동개혁 작업에 나섰던 것이다. YS 다운 통 큰 결단이었다.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만들어 6개월여의 작업 끝에 마련한 개혁안을 바탕으로 12월 정부는 노동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노동계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노동계의 반대에 힘을 얻은 김대중 대표(DJ)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는 노동법 개정에 결사반대하며 의사당을 점령하는 등 실력저지에 나섰다. 다가오는 대선을 의식한 여야 정치권은 노동법개정을 둘러싸고 찬반이 극명하게 갈렸다.
여권내부가 갈리고 청와대 수석 간에도 찬반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YS는 무슨 주문(呪文)에라도 걸린 듯 노동법개정추진은 ‘강요당한 마지막 선택’이란 명분으로 날치기 강행처리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군부독재정부에서나 있을 법한 민주적 국정운영방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쿠데타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YS의 더 큰 치명적 실수는 그나마 노동계의 지지를 받고 있던 ‘복수노조 허용’을 ‘3년 유예’로 고쳐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노동계는 즉각 총파업에 나섰다. YS는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무신분립(無信不立)’이란 말처럼 국민의 믿음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자초했다. 그러나 YS의 실수는 DJ에게는 정국주도권을 잡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노동법사태속에 맞이한 5년차 YS
1997년 새해를 맞아 파업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며 기회를 살피던 야당은 노조의 총파업에 편승하여 장외투쟁에 나섰다. 국정은 표류하기 시작했다. 1월 21일 YS는 사태수습을 위해 여야 영수회담을 개최하고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 결국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노동법을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3월로 예정된 새로운 신한국당 대표를 뽑는 전국위원회를 앞두고 벌어진 노동법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YS는 아쉬움 속에 이홍구 대표를 퇴임시키고 차선으로 이회창 대표를 선임했다. 그날의 결정은 YS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회한의 결정이 되었고 결국은 정권교체의 길을 여는 결과를 낳았다.
만일 YS가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정치판을 바꾸지 않고 15대 총선민의에 따라 끈질기게 대화와 타협의 민주적 국정운영을 실천했더라면, 그리고 날치기 법안 처리를 강행하지만 않았더라면 YS는 그렇게 빨리 빛을 잃지는 않을 것이고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7년 임기 5년차 새해를 맞이한 YS는 이미 총명과 패기와 자신감을 잃고 있었고 서산에 지는 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YS에게는 닥쳐온 시련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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