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순수함은 어디로 갔을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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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전인 1987년 6월 10일 한낮,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33-1번 버스가 청계천 입구에 멈춰 섰다. 쫓기던 시위 학생이 버스에 급히 뛰어 들었고 악명 높던 이십여 명의 백골단으로 불리던 무술 경찰이 버스를 에워쌌다. 경찰들이 버스 문에 오르려 하자 급히 밀쳐 낸 승객들은 창문을 닫고 학생을 보호하고 있었다. 자욱한 최루탄 속에 백여명의 백골단들이 버스를 둘러싸자 시민들 중 누군가가 절박하게 외쳤다. “버스 창을 부수고 학생을 끌고 가기 전에 빨리 인간방패를 만들자.”고.
우연히 가까이 있었던 나는 기자임을 밝히며 경찰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지금과 달리 기자들이 많지 않았던 시대, 취재기자란 말에 무술경찰들이 주춤하던 사이 평소 안면이 있던 경찰 최고위 간부가 다가왔다. 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포위망을 풀고 버스를 보낼 것을 지시했다. 버스는 슬금슬금 움직여 청계고가위로 사라졌고, 버스를 에워 쌓던 시민들은 학생을 살려냈다는 안도감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회색 아스팔트위에 쏟아 부었다. 내가 겪은 6.10 민주항쟁의 한 단면이다. 세월이 흘렀다. 당시 사건기자로 시위 현장을 쫒아 다녔던 나는 유학을 다녀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중년이 되었다.
회고하건대 그 해 6월은 뜨거웠다. 오월, 범국민적 반정부 시위를 예고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물고문해 죽인 사건의 수사가 조작됐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메가톤급 폭로가 나왔고 6월 10일 넥타이 부대까지 합세한 백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휩쓸었다. 거대한 민주화 요구 물결은 결국 당시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역사적인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이렇게 이뤄졌다.
그로부터 29년이 흘렀다. 그리고 6월의 여름이 또다시 우리 곁에 와 있다. 그 시절 거칠고 가혹했던 독재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과거의 독재 경험과 가슴 떨렸던 6월 민주항쟁을 겪지 못한 지금의 세대들에게 민주주의는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특별한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독재의 험악한 세월과 6월 민주항쟁을 피눈물로 겪은 이 땅의 기성세대는 그 날의 감격과 의미를 결코 잊지 못한다.
6월 민주항쟁을 눈앞에 두고 다채로운 행사들이 6월 내내 예정돼 있다. 그러나 풍성한 준비와 행사에도 불구하고 올해 6월은 무언가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아쉬운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모습이다. 선거에 참패한 보수 세력은 반성하기는 커녕 계파간의 싸움에 볼썽사납고 진보 세력은 쪼개져 내년 표밭을 의식, 색깔 경쟁에 급급하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기성세대의 엄청난 희생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정치권의 행태는 참담하기만 하다.
나는 우리 시대가 쟁취해 낸 한국 현대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강대국에 의한 해방과 남북분단, 그리고 수백만명이 희생된 동족간의 전쟁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해 낸 위대한 현대사를 나는 엄청난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리석게도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우리는/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던 우리는/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던 우리는/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중 일부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 살리라 믿었고 그런 믿음이 지금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대한민국을 걱정스런 맘으로 지켜봐야하는 지금의 나의 마음은 우울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 시절의 순수함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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