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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4B: 내부분열로 나라가 쪼개지는 유송의 유욱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4월27일 16시0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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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 유자훈(劉子勛)의 반란(AD465)

 

태조 유의륭(할아버지)와 세조 유준(아버지)이 모두 셋 째 아들이었으므로 둘째였던 황제 유자업은 자신의 동생이자 셋째 아들인 강주자사 유자훈을 몹시 경계하며 죽일 생각이었다. 마침 하매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그를 죽이게 되자 그 사건에 유자훈을 함께 엮어 주경운을 보내 유자훈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황명을 받은 주경운은 미적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이 정당하지 않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자훈의 심복 사도매, 주수, 반흔지, 저령사 등이 황제가 내린 주군 유자훈 체포명령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반란을 독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지세력 규합에 나섰다. 강주장사 등완을 포섭했고 등완도 황제 유자업을 다음과 같이 폄하하며 흔쾌히 동참하고 나섰다. 

 

“ 어찌 집안의 백명(온가족을 뜻함)을 아끼겠는가.

  말은 천자라고는 하나

  하는 짓은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군주(독부, 獨夫)나 다를 바가 없다.“

  

유자훈은 측근 반흔지를 내세워 공식적으로 유자업 타도 군사를 일으킬 것을 내외에 선언했다.(AD465)   

 

 

<2> 유욱(劉彧)의 쿠테타 집권 (AD465)

 

유자훈의 반란군은 수도 건강에서 400KM 이상 떨어져 있었으므로 황제 유자업에게 직접적이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 건강에서는 온갖 능욕을 당했던 상동왕 유욱을 중심으로 강력한 쿠테타 세력이 형성되었다. 유욱의 의복담당 완전부, 왕도륭, 이도아, 유광세와 환관 전람생이 주도 세력이었다. 황제의 의복담당 수적지는 황제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황제의 미움을 샀음으로 유욱 편에 가담해 반란에 동참했고 황제의 심복 종월과 대주 번승정 또한 소속은 황제 아래에 있었으나 유욱 편이었다.

 

황제 유자업은 화림원의 죽림당이라는 황실정원에서 궁인들에게 나체로 숨바꼭질을 시켰는데 한 궁인이 옷 벗기를 거절하자 그 목을 벤 적이 있었다. 황제의 꿈에 어떤 여자가 황제에게 욕을 하였다.

 

“ 황제 너는 패악하여 

  내년 곡식이 익기도 전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흉흉한 꿈을 꾼 유자업은 다음 날 궁인들을 모두 마당에 모은 뒤 꿈속 모습과 비슷한 여자를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그 날 밤 황제의 꿈속에 죽은 그 여자가 나타나 말했다.

 

“ 내가 황천 상제에게 너의 잘못을 모두 고해 바쳤다!”

    

황제가 이런 꿈을 무당에게 말하자 무당은 죽림당에 반드시 귀신이 있는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날 저녁 황제는 시종을 다 물리치고 죽림당에서 무당과 수 백 명의 화려한 옷을 입은 궁녀와 함께 귀신을 활로 쏘는 의식을 열었다. 활 쏘는 일이 끝나고 모여서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할 순간에 황제의 의복담당 수적지, 강산지 및 순우문조가 칼을 들고 들이닥쳤다. 수적지가 칼을 뽑고 다가오는 것을 본 유자업이 활을 쏘았으나 빗나갔다. 여자들은 혼비백산 도망쳤고 황제 또한 달아나다가 수적지의 칼에 맞아 죽었다. 17세 였다.

수적지가 숙위에게 명령을 선포했다.

 

“ 상동왕 유욱이 태황태후 명령을 받아서

  광폭한 군주를 제거하고

  세상을 평정하였다.“

 

상동왕 유욱(劉彧)이 즉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송의 7대 태종 명제이다. 

    

 

<3> 종월의 불발 쿠테타(AD465)

 

종월은 담금, 동태일 등과 함께 폐제 유자업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새로 황제가 된 유욱이 그들을 위로하며 안심시키려했으나 내심으로는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월과 담금 및 동태일 세 사람이 드디어 황제 유욱을 죽이기로 모의하고 심유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심유지는 그들의 모의 사실을 황제에게 밀고했다. 마치 바로 몇 달 전 당숙 심경지가 안사백과 유원경의 유자업 시해 모의를 사전에 밀고한 공을 세운 것과 유사하다(#본시리즈 4A 참조). 종월 일당은 즉시 처형되었다. 

 

 

 

<4> 의가(義嘉)의 반란과 유자훈의 황제자칭(AD466)

 

구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자훈은 황제라고 자칭하며 연호를 의가(義嘉)라고 했으므로 그들의 거병을 의가의 난(義嘉之亂)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삼촌 유욱이 황제 유자업을 시해하고 건강에서 황제에 올랐으므로 유송에는 두 명의 황제가 일어난 셈이었다. 그렇지만 시해된 폐제 유자업에서 보면 한 명은 삼촌(유욱)이고 다른 한 명은 동생(劉子勛)이었으므로 누구가 정통성이 더 있는지,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에 대해 관료들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천하의 지방 관리들은 유자훈 지지파와 유욱지지파로 갈리었다. 그 중에서 유자훈 동조세력은 서주(徐州, 안휘성) 설안도, 기주(冀州, 하북성) 최고도, 청주(淸州,산동성) 심문수, 익주(益州,사천성) 소혜개, 상주(湘州,호남성) 하혜문, 광주(廣州,광동성) 원담원, 양주(梁州,섬서성 남부) 유원호, 그리고 산양태수 정천조 등 이었다. 예주(豫州,안휘성) 자사 은염과 장사 등완도 처음에는 머뭇거렸으나 조정에서 도망쳐 온 유광세가 유욱 조정의 세력이 불리하다고 전하자 동참하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이렇게 되면 유자훈과 반란세력은 수도 건강을 제외한 남조정부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셈이며 특히 건강을 포위하는 형국이 된 셈이다.   

 

 

<5> 황제 유욱의 대응전략

 

황제 유욱은 매우 초조했다. 지지세력의 크기로 볼 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채흥종이 황제를 설득했다. 무엇보다 쌀과 전쟁물자가 풍부하므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안정책을 쓰고 세금과 요역부담을 줄여주면 이길 것이 확실하다고 자신감을 심어 줬다. 갈승소는 황제에게 뛰어난 장군이자 외숙인 은효조를 불러들이자고 권했다. 황제가 승낙하자 갈승소는 말을 달려 은효조에게로 가서 현재와 같은 난국에는 무엇보다도 나이가 든 황제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은효조는 즉각 2천의 군사를 대동하고 건강으로 달려왔다. 

 

어느 정도 대비태세가 갖추어지자 유욱의 황군은 조직적으로 유자훈의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산양왕 유휴우, 유면, 여안국은 북서쪽으로 예주자사 은염 토벌에 나섰고 파릉왕 유휴약, 심회명, 장영 및 소도성은 동쪽으로 회계의 공의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유욱의 황군에게 결정적인 도움은 하동(호북 송자현)태수 오희의 동참이었다. 하동은 장강 유역에 있었지만 유자훈이 있는 구강보다도 더 서쪽에 있었으므로 유자훈을 서쪽에서 협공하는 형국이 된 셈이다. 따라서 유자훈의 반란세력으로서는 동쪽의 건강 황군과 서쪽의 오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 셈이었다.      

 

 

<6> 유자훈 동군의 궤멸

 

유자훈 반란에 동참한 동군은 진릉(절강성 常州)방면의 공의, 의흥(절강성 宜興) 방면의 유연희, 오흥(절강성 호주)방면 공조 그리고 율양 방면의 유업이 주축이었는데 이들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특히 하동에서 출발한 오희는 무서운 속도로 동진하여 의흥을 공략하자 공조가 도망갔으며 율양을 공략하여 유업을 참수했다. 더 나아가 심양왕 유자방을 체포한 뒤 도망가던 공조를 붙잡아 목을 쳤다. 반란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진릉(상주) 백성들이 공의를 묶어서 왕안에게 보냈는데 왕안이 이렇게 공의를 위로했다.

 

“ 이 일은 공조가 저지른 것이지

  경은 무관하다고 생각하오.

  자수했다고 쓸 것이고 나도 상부에 그렇게 설명하겠소.“

 

공의가 말했다.

 

“ 강동에서의 일은

  내가 결정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죄를 남에게 맡기고 살 길은 찾으려 하는 것은

  그대 같은 조무래기 들이나 생각하는 짓일 뿐이오.“

 

격분한 왕안은 공의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 반란에 참가한 76명의 동군 장수중에서 17명이 참수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를 받았다.  

    

 

<7> 유자훈 정부 등완의 무능함과 유욱 측 은효조의 교만·독선

 

유자훈에 가담한 동군이 무너졌다고 해서 유자훈의 반란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건강의 서쪽에는 막강한 반란군이 장강을 끼고 웅거하고 있었다. 유자훈측의 문제는 상서좌복야 등완의 폭정이었다. 그는 비루하고 어리석었으며 욕심이 많고 인색했다. 관직을 팔았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국정을 등한시했다. 당연히 가신들이 국정을 농단했고 튼튼했던 민심이 이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강의 유욱 측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장군 은효조의 교만과 독선이었다. 조카 갈승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 온 은효조는 초기의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면서 무리한 명령을 자주 내리면서 부하들에게 신임을 잃었다. 결국 부하가 쏜 화살에 맞아 은효조는 사망했고 그 여세를 몰아 등완이 장강의 번창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8> 심유지와 강방흥 : 심유지의 양보

 

번창은 지금의 무호 서남쪽 장강을 끼고 있는 요충지로써 수도 건강과 불과 100KM 떨어진 이다. 따라서 이 지역이 함락되면 건강이 매우 위태로워진다. 군사력을 총동원해서라도 막아내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심유지는 강방흥을 찾아갔다. 강방흥과 심유지는 당시 건강정부의 최고 군사 지도자로써 우월을 다투는 형편이었다. 만약 심유지가 총사령관이 되면 강방흥은 분명히 불만에 차 소극적으로 나설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심유지가 자세를 낮추고 그를 찾아간 것이다.

“ 나 스스로 나약하고 가벼워

  재간과 책략이 경보다 한 수 아래입니다.

  그대를 추대하여 통군(총사령관)으로 삼고

  서로 힘을 합하여 내일의 결전을 치릅시다.“   

 

강방흥은 군사상 쌍벽이라 할 심유지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 온 것에 대해 매우 흐뭇하게 생각하며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심유지의 부하 장수들은 매우 불만이었다. 심유지가 이렇게 그들을 질타했다.

 

“ 나라가 살고 가정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지

  어찌 벼슬이 낮고 높음에 연연해하는가.

  나는 그의 아래에 있을 수가 있으나

  그는 나의 아래에 있지 못하는 사람이니

  힘을 합하기 위해 내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 간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

 

 

<9> 심유지의 자기(赭圻, 지금의 안휘성 번창) 공략(AD466)

 

심유지의 군사는 강을 거슬러 올라와 등완이 지키는 번창을 포위했다. 번창의 외곽을 수비하던 유자훈의 군사 유호와 설상보는 패배하여 도망가 버렸다. 심유지의 포위가 길어지자 궁색해진 등완은 부하 장수 장렬에게 진안왕 유자훈의 목을 베고 심유지의 황군에게 항복하자고 제안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장렬은 부하를 시켜 등완을 처단해 버렸다. 그리고는 황군측인 유휴인에게 항복했다. 장인 채흥종과 헤어져 지방으로 나와 있다가 유자훈의 반란에 동참한 원의도 부하 설백진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구강에 머물러 있던 유자훈은 채도연에게 체포되어 심유지에게로 보내졌는데 심유지는 즉시 유자훈을 베어버렸고 그 시신을 건강으로 보냈다. 당시 유자훈의 나이는 11세 였다.

 

심유지의 번창함락과 유자훈 처형으로 전세는 급격하게 황군 쪽으로 기울자 그동안 유자훈에게 동조하던 세력들이 속속 항복해왔다. 예주자사 은염이 수현을 버리고 항복했으며 익주의황제 유욱이 동생을 보내 설득하자 소혜개 또한 항복했다.  

 

 

<10> 유송의 북쪽 국토 상실

 

심유지의 승전소식에 접한 서주의 설안도는 유욱에게 항복하는 의사의 편지를 유욱 조정에게 보냈다. 채흥종이 이렇게 말했다.

 

 

 

 

“ 허위가 아닙니다.

  한 명의 사신과 한 자의 편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지금 5만의 군사로 그를 위협하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니

  혹 복쪽의 오랑캐를 끌어 들일 수도 있습니다.“

 

유욱 황제는 이번 기회에 북쪽의 위나라를 치는 것이 어떠냐고 소도성에게 물었다. 소도성이 대답했다.

 

“ 설안도는 교활한 사람입니다. 

  군대로 압박하는 것은 

  훌륭한 국가 계책이 아닐 듯합니다. 

     

유욱은 듣지 않았다. 

 

“ 군대가 이미 강하고 날카로운데

  어찌 이길 수 없음을 걱정한 단 말이오.

  경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마시오.“

 

유욱은 설안도의 항복문서를 거부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벌을 선언했다. 설안도는 아들을 북위 탁발홍에게 보내고 항복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서주 땅은 다시 북위에게 떨어졌고, 유송은 그 일대 회서 7군을 모두 잃게 되었다.(AD466) 회서 7군을 얻게 된 북위는 다음 해인 AD467 대대적으로 남침하여 회하 이북의 모든 유송의 땅을 점령해 버렸다. 반란군을 섬멸한 심유지와 장영은 안휘성 회수에 주둔하면서 북쪽의 위나라를 공략하고 싶어 했지만 번번히 패배하고 말았다.  

 

혼군 유자업의 폭정에 따른 조정분열과 황실 내 이어지는 황위찬탈 쿠테타로 유송의 국력은 급격하게 무너졌고 결국 그 틈을 탄 북위는 회하 유역의 유송 북쪽영토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유송나라의 역사(宋略)를 쓴 배자야(裵子野)는 이렇게 썼다.

 

“ 옛 적 제나라 환공이 규구의 맹약(BC652)을 깨고 자만하므로 

  아홉 나라가 배반했고

  조공(조조)이 예의를 취하지 않아서 천하가 분열되었다.  

  터럭 하나라도 잃으면 나중에 차이는 크게 벌어지는 것인데

  유욱의 초기 위세와 명령이 백리를 넘지 못하였으니 

  병장들이 반란을 마음에 품었으나

  정성스럽고 후덕한 정치로 감동시켜

  목숨을 다하여 충성심이 생겨나게 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서쪽을 꺾고 북쪽을 소탕하며 동쪽을 규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만한 마음으로 명분 없이 북쪽 위나라를 공격하려다가

  회하 이북의 땅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애석하다.

  텅빈 마음으로 나아가며 교만하지 않게 정치를 했으면

   세 명의 배반(설안도와 함께 배반한 장수)이 어떻게 일어났을 것인가.

   유유는 갑옷 안으로 서캐와 이가 득실거리면서

   천하를 개척했으나

   나중의 손자들은 하루에 영토를 백리나 오그라들게 하였으니

   아버지 심은 것을 아들이 거두고 

   아버지 세운 기둥에 집을 세우는 것(播穫堂構,파확당구)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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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4월27일 16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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