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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4A : 분열과 폭정으로 나라를 망친 송 유자업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4월20일 15시5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6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 유송(劉宋)의 혼란과 혼군 유자업의 등극(AD464)

 

북위 탁발준이 재위하던 AD460년경 당시 장강 남쪽의 유송은 극도로 혼란했다. 건국황제 유유의 아들로 AD423-AD453년의 삼십년 원가의 치세(元嘉之治)를 열었던 문제 유의륭은 태자폐위 문제로 발생한 태자간의 갈등문제에 휘말려 피살되었다.(AD453) 그 이후 황제로 즉위한 태자 유소파와 그를 반대하는 다른 황자를 지지하는 파들 사이에 극렬한 내부분란에 휩싸이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유의륭의 둘째 아들 유준(劉駿)이 형 유소를 제거하고 황제가 되었으나(AD453) 유준은 형편없는 황제였다.

 

재물과 이익을 끝없이 탐하였고 자사나 이천석 관리들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 올 때에는 반드시 일정액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종일토록 술을 마셨고 깨어 있을 때는 잠시 뿐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상주하는 일이 있으면 즉시 자세를 바로 하여 깨어있는 시늉을 하여  주변 신하들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유준이 AD464년 죽으면서 유조를 내렸다.

 

“ 태재 유의공은 상서령에서 해임하고 중서감을 덧붙이며

  유원경은 영상서령에 임명하고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 두 사람에게 상의하여 결정할 것이며

  큰 일은 심경지와 더불어 상의하라. 

  군대에 관한 일은 반드시 심경지와 의논할 것이며

  상서의 일은 안백지에게 맡기고

  외감의일은 왕현모에게 부탁하라.“

 

유준이 죽고 그의 아들 유자업이 15세 나이로 황제자리를 계승하였다.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유자업은 전혀 슬픈 기색을 하지 낳았다.

 

이부상서 채흥종이 이렇게 독백했다.

 

“ 노나라 소왕이 양공이 죽은 뒤에 곡을 하지 않자

  숙손목자가 그가 끝을 보지 못할 것을 알았다고 했는데 

  오늘 나라의 재앙은 바로 유자업에게 있음을 알겠구나!“

 

<2> 어머니의 임종을 외면하는 유자업

 

유자업은 아버지 유준의 정부인 왕태후 소생이다. 왕태후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아들 유자업을 침상으로 불렀다. 그러나 유자업은 이렇게 말하며 가기를 거절했다.

 

“ 병자의 몸에는 귀신이 많다는데

  어찌 내가 귀신 곁으로 갈 수가 있겠는가?“

 

왕태후가 격분하며 말했다.

 

“ 칼을 갖고 와서 내 배를 갈라라.

  저렇게 비린내 나고 어리석은 녀석을

  어떻게 내가 낳았단 말인가“

 

왕태후는 그 말을 마치고 곧바로 죽었다.

 

 

<3> 채흥종의 좌천(AD465)

 

황제 유자업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정사는 태재 유의공이 떠맡고 소상지가 그를 보좌했으며 인사는 채흥종이 맡았다. 그러나 태재 유의공이 매우 무능했으므로 사실상 대법흥이 정사를 도맡았다. 당시 채흥종은 훌륭한 인사를 추천하고 임용하면서 조정 대신의 정치 잘잘못을 지적함으로써 국정을 떠받치는 유일한 존재였으니 당연히 황제는 물론 대법흥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채흥종이 번번이 황제에게 직설을 고해바치면 대법흥과 소상지 등이 문서를 고쳐서 황제에게 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채흥종이 대법흥에게 이렇게 말했다.

 

“ 주상께서 상중에 계시니

  친히 만기를 친람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선(인사) 문제는 원래 기밀이라서

  아무도 건드리면 안 되는데

  이렇게 서류를 고치고 조작하면

  더 이상 국가의 기밀서류는 어느 것이 천자의 뜻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됩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채흥종이 자주 비판하고 따지자 유의공이나 대법흥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결국 채흥종은 좌천되어 신창태수로 쫒겨 나갔다.

 

 

<4> 유자업의 오른팔 화원아와 대법흥 제거(AD465)

 

황제 유자업은 성질이 급하고 포악했으며 능력이 모자랐다. 어려서부터 태후와 대신, 그리고 대법흥이라는 사람을 몹시 두려워했고 그들의 견책을 부끄러워했다. 유자업이 황제가 된 뒤 점차 나이가 들면서 마음대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대법흥이 나서서 제재를 가했다. 

 

유자업은 환관 화원아를 특별히 총애하면서 엄청난 재물을 내리려고 했으나 대법흥이 나서서 절반으로 줄이자 화원아가 대법흥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황제 유자업이 화원아에게 시중에 돌아다니는 유언비어를 탐문하게 하자 화원아가 이렇게 보고했다.

 

“ 시중에 떠도는 말이

  궁중에는 두 천자가 있답니다.

  대법흥이 진짜이고

  자리에 앉아있는 황제는 안천자(雁天子,가짜)랍니다.

  대법흥은 태재 안사백 유원경과 한 통속이 되어서

  왕래하는 문객이 수 백 명이며

  안팎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 이 자리는 더 이상 황제 폐하의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황제는 대법흥을 면직시킨 뒤 귀양을 보낸 다음 죽음을 내렸고 그들의 일당 또한 제거해 버렸다. 당시 고명대신 상서우복야 및 단양윤 안사백과 유원경은 살려 뒀었는데 그들은 한 패거리가 되어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란 방자하여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사람이었으므로 황제 유자업은 이들 마저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5> 안사백과 유원경의 유자업 시해 모의(AD465)

 

안사백과 유원경은 자신을 해치려는 황제에 대해 대책회의를 열고서 황제 유자업을 시해하고 유유의 아들 유의공(황제 유자업의 종조부)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유원경은 그 결정을 측근 심경지에게 알렸는데 안사백은 심경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유원경에게 이렇게 짜증을 내며 물었다.

 

“ 심경지라는 작자는 자잘한 간신배에 불과한데 

  어찌 그 중요한 거사에 그를 끌어드리려 하시는거요?“

 

심경지가 그 말을 유원경에게서 전해 듣고는 곧바로 황제시해 모의사실을 황제에게 밀고해버렸다. 황제는 즉각 황실군대를 동원하여 유의공을 토벌하고 그의 네 아들을 그 자리에서 격살시켜버렸다. 그리고 유원경을 조정으로 소환한 뒤 여덟 아들과 여섯 동생과 모든 조카를 살해했다. 그 이후 정권을 오로지하게 된 유자업은 대신들을 공공연히 채찍질하며 모욕을 주고 멸시하기를 노예처럼 했다.    

 

 

<6> 황음한 황제 유자업

 

유자업에게는 여동생 산음공주가 있었는데 공주는 평소에 이런 불평을 늘어놓았다.

 

“ 어찌 같은 태에서 태어난 형제인데도

  폐하는 육궁 궁녀가 만 여 명이나 되고

  첩은 오직 부마 한 명만 주어지는 것입니까?

  세상에 불공평한 것이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습니까?“

 

유자업은 크게 웃으며 일리가 있다고 말한 뒤 면수(面首, 미남자) 삼십 여명을 붙여 주었다. 

한 번은 유자업이 선조들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화공이 그림을 그려오자 유자업은 선조의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 고조 유유황제께서는 위대한 영웅으로써 몇 명의 천자를 사로 잡으셨다.

  태조 유의륭(할아버지)은 말년에 어린 아이에게 머리를 찍히셨다.

  세조 유준(아버지)은 거대한 술독이 오른 빨간 코를 가지셨는데 

  어찌 그의 코가 빨갛지 않은가?“

  

즉시 그림을 고쳐 코를 빨갛게 그리도록 지시했다. 

  

유자업은 과거 자신의 태자지위를 넘본 이복 동생 유자란(10세)에게 사약을 내렸고 그의 동생 유자사(6세)와 여동생에게도 같이 사약을 내렸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유자업은 유자란의 생모 은귀비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부셔 버렸다. 

     

황음한 유자업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유의륭의 열 번 째 딸 신채공주는 영삭장군 하매가 남편이었는데 유자업에게는 고모인 셈이었다. 유자업이 고모 신채공주를 몰래 궁으로 불러들인 뒤 사귀빈으로 부르며 가까이 하면서 신채공주는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장례마저 치렀다. 영삭장군 하매는 그런 황음한 황제를 가만두고 볼 수가 없었다. 황제가 외유를 하는 것을 틈타 시해를 계획했다가 들켜 살해되었다.    

 

 

<7> 원의와 채흥종

 

유자업이 태자였을 때 그의 무능함을 알게 된 황제 유의륭은 태자를 유자란으로 바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중 원의가 나서서 유자업을 극력 옹호한 까닭에 폐위되지 않았었다. 그런 연유로 유자업은 원의에 대해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었으므로 정치를 오로지하게 되자 모든 정사를 원의를 맡기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원의에 대한 총애는 오래가지 않았다. 원의는 사소한 죄로 문책 받게 되었고 원의 또한 황음한 황제 곁에 있는 것이 불안하여 외직으로 나갈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원의의 요청을 받아들여 옹주자사로 내보냈다. 원의의 장인 채흥종이 원의에게 이렇게 물었다.

 

“ 양양 땅은 황제의 권력이 닿지 않아 흉흉하기 짝이 없고 

  또 최근 별자리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어찌 그런 곳에 가겠는가?“

 

원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 천도란 요원한 것이므로

  어찌 인간의 예측한 대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정에서는 채흥종을 임해왕 유자욱의 장사로 임명하여 내보내려고 했으나 채흥종이 사양했다. 그런 장인에게 원의가 말했다.

 

“ 장인께서 나가셔서 섬성 서쪽의 여덟 주를 장악하시고

  저는 양양과 면수(한수)를 지키면 서로 지척지간이기도 하고

  또 하천과 육지로 서로 연결되는 곳이니

  만에 하나 조정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함께 제환공과 진문공의 공적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어찌 흉악하고 난폭한 자의곁에서 통제를 받으시고

  추축하지 못할 재앙에 가까이 계시려고 하십니까?“

 

채흥종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빈한한 가문에서 일어났네.

  아직까지 주상과 소원한 관계는 아닐세.

  만약 변고가 생겨 안이 어려워지면

  바깥 역시 예측을 못하기는 마찬가지 일세

  자네는 바깥에서 화를 피하고 

  나는 안에서 화를 면하는 것 역시 좋지 않겠는가?“

 

원의는 명문가문 출신으로써 군사에는 문외한이었으나 청렴하고 결백하였으며 인망이 높았다. 여러 황족과 교분을 두터이 하면서 고명한 인사들과 접촉을 깊이 하였다. 

  

<8> 심경지와 채흥종

 

심경지는 황제에게 안사백과 유원경의 황제시해 모의를 사전에 밀고한 공으로 황제의 환심을 산 인물이다. 그는 학식은 없어서 글을 읽지 못했고 집안이 어마어마한 거부였으나 본인은 몸종 서, 너 명에 불과했고 언사가 겸손하고 소박하여 아무도 그가 삼공인줄 알지 못했다. 그런 심경지가 자주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실책을 간하였으므로 점차 황제는 그를 멀리 하였다. 

 

황제가 자신을 멀리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심경지는 나라 걱정에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끊어버렸다. 심복 범선을 채흥종에게 보내 안부를 물어보게 하였다. 채흥종이 범선에게 이렇게 답했다.

 

“ 공께서 문을 닫고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은

  청탁을 피하려 하심입니다.

  저는 공에게 부탁할 것이 없습니다.

  어찌 저를 만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범선이 그런 채흥종의 뜻을 듣고 전하자 심경지는 바로 그를 불러 만났다. 채흥종이 말했다.

 

“ 주상의 하는 일이 인륜의 도를 벗어났고

  덕을 행하여 잘못을 고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지금 꺼리는 것(즉, 반란)은 오직 공에게 달려있고 

  백성이 옹옹하며 쳐다보는 것 또한

  오직 공 한 분이십니다.“

 

심경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 오늘날의 근심과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오직 천명에 맡길 뿐입니다.”

 

채흥종이 대답했다.

 

“ 이번 모의는 우리가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조석으로 닥칠 광적인 혼군의 폭정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심경지가 거부하며 말했다.

 

“ 경의 지극한 말이 감동스럽습니다마는

  이 일은 큰일이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조카 심문수가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여 말했다.

 

“ 시기와 잔인함이 심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재앙은 

  나가든 들어오든 피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힘을 이용하면

  일을 도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더 쉽습니다.“

심경지는 끝내 황제시해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 반란모의를 하다가 잡힌 하매를 죽이려 할 때 심경지가 와서 반대할 것을 우려한 황제는 다리를 끊어 버렸는데 심경지는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결국 돌아갔다. 황제는 심경지의 당질 직합장군 심유지를 보내 심경지에게 사약을 내렸다. 심경지가 사약을 거부하자 심유지는 이불로 덮어 질식사시켰다. 그의 나이 여든이었다. 심경지의 큰 아들 심문숙이 막내 동생 심문계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 나는 죽을 수 있으나 너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심문숙과 그 아래 동생 심소명은 같이 사약을 받았으나 막내동생 심문계는 도망쳐 살았다.

 

 

<9> 왕현모와 채흥종의 연합

 

영군장군, 즉 황군호위장군인 왕현모는 황제의 가혹한 사형집행을 여러 번 말리며 충간을 올렸으므로 황제가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왕현모는 자신의 측근 부하 포법영이 채흥종이 태수로 있었던 동양(산동성 청주)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보내 의중을 타진했다.

 

채흥종이 포법영에게 말했다.

 

“ 영군장군께서 걱정이 많으실 것이오.”

 

포법영이 말했다.

 

“ 잠도 거의 못 주무시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십니다.

  체포하려는 자가 곧 문밖에 있다고 느끼셔서

  잠시도 편치 못하십니다.“

    

채흥종이 말했다.

 

“ 어찌 앉아서 기다리고만 계실건가?”

 

포법영이 말을 달려 왕현모에게 채흥종의 말을 전달했다. 왕현모가 다시 포법영을 보내 감사를 표시하며 부탁했다.

 

“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로 약속하십시다. ”

 

우위장군 유도륭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측근을 지키며 호위를 하고 있었다. 채흥종이 유도륭과 함께 황제를 모시고 외출을 나가면서 말했다.

 

“ 유군, 나는 근래 한사(閒寫)할까 생각 중이오”

 

한사(閒寫)란 한가한 시간을 내어 자서전이나 자신의 생각을 저술하는 것을 말한다. 유도륭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다급히 채흥종의 손을 꼬집으며 나직히 말했다.

 

“ 채공,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마시지요.” 

 

 

<10> 황족을 가두고 능멸한 황제 유자업(AD465)

 

유자업은 황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두려워 전원을 건강(남경)에 가두어 감시했다. 때로 그들을 불러 구타하고 채찍질 했으며 견딜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황족을 저울에다 올려 무게를 잰 뒤 상동왕 유욱에게는 돼지왕(저왕), 유휴인에게는 도살왕, 유휴우에게는 도적왕, 유위에게는 노새왕 등의 별명을 붙여 조롱하기를 서슴지 않았다.(AD465) 나무통에 밥과 여러 가지 음식을 섞어 담아 땅을 파 구덩이를 파고 대마무 통을 내린 뒤 유욱을 발가벗기고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어 먹도록 강요했다. 나아가 여러 황족들의 비와 공주를 세워 놓고서 주위 사람들에게 능욕하도록 시켰다. 황족 유삭의 비 강씨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자 강씨의 세 아들을 모두 죽였다.(AD465)  

 

당시 세간에는 상(湘)지역에서 천자가 나온 다는 소문이 있었다. 상지역이란 지금의 호남성장사다. 유자업은 상동왕 유욱이 그 지역을 관할하는 번왕이므로 황제가 직접 그곳으로 내려가기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황제가 유욱의 손과 발을 묶고 막대기로 꿰어서 사람들에게 메도록 한 뒤 말했다. 

 

“ 오늘 돼지를 잡을 것이다.”

 

유휴인이 곁에서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돼지를 잡으시면 안 됩니다.”

 

황제가 왜 그러냐고 묻자 유휴인이 대답했다.

 

“ 황제의 아들이 조만간 탄생할 것이니

  그 때를 기다렸다가 

  돼지의 간과 폐를 꺼내야 되는 법입니다.“  

 

아들 예기가 나오자 황제의 유욱에 대한 광기가 풀리면서 그를 풀어주게 하였다.

 

 

<11> 유자훈의 유자업 타도 선포(AD465)

 

유자업은 또한 태조 유의륭(할아버지) 세조 유준(아버지)가 모두 셋 째 아들이었으므로 자신의 동생 강주자사 유자훈을 몹시 경계하여 죽일 생각이었다. 강주는 지금의 구강시로써 수도 건강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침 하매가 모반사건과 연루되어 죽게 되자 그 사건에 유자훈을 함께 엮어서 죽이려고 주경운에게 유자훈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주경운은 명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으니 유자훈의 심복 사도매, 주수, 반흔지, 저령사 등이 그 소식을 듣고서 장사 등완을 포섭했다. 등완도 흔쾌히 동참하고 나섰다. 유자훈이 반흔지를 내세워 공식적으로 유자업 타도를 선포했다.  

 

 

<12> 유욱의 쿠테타 (AD465)

 

유자훈의 반란군은 구강에서 일어났으므로 황제가 살고 있는 건강에는 직접적이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 건강에서는 온갖 능욕을 당했던 상동왕 유욱을 중심으로 강력한 쿠테타 세력이 형성되었다.

 

유욱의 의복담당 완전부, 왕도륭, 이도아, 유광세와 환관 전람생이 주도 세력이었다. 황제의 의복담당 수적지는 황제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황제의 미움을 샀음으로 유욱 편에 가담해 반란에 동참했고 황제의 심복 종월과 대주 번승정 또한 소속은 황제아래에 있었으나 유욱 편이었다.

 

황제 유자업은 화림원의 죽림당이라는 황실정원에서 궁인들에게 나체로 숨바꼭질을 시켰는데  한 궁인이 옷 벗기를 거절하자 목을 벤 적이 있었다. 황제의 꿈에 어던 여자가 황제에게 욕을 하였다.

 

“ 황제 너는 패악하니 내년 곡식이 익기도 전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흉흉한 꿈을 꾼 유자업은 다음 날 궁인들을 모두 모은 뒤 꿈속의 모습과 비슷한 여자를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그 날 황제의 꿈속에 죽은 그 여자가 나타나 말했다.

 

“ 내가 황천 상제에게 너의 잘못을 모두 고해 바쳤다!”

    

황제가 이런 꿈을 무당에게 말하자 무당은 죽림당에 반드시 귀신이 있는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날 저녁 황제는 시종을 다 물리치고 죽림당에서 무당과 수 백 명의 화려한 옷을 입은 궁녀와 함께 귀신을 활로 쏘는 의식을 열었다. 활 쏘는 일이 끝나고 모여서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할 순간에 황제의 의복담당 수적지, 강산지 및 순우문조가 칼을 들고 들이닥쳤다. 수적지가 칼을 뽑고 다가오는 것을 본 유자업이 활을 쏘았으나 빗나갔다. 여자들은 혼비백산 도망쳤고 황제 또한 달아나다가 수적지의 칼에 맞아 죽었다. 17세 였다.

숙위에게 명령을 선포했다.

 

“ 상동왕 유욱이 태황태후 명령을 받아서

  광폭한 군주를 제거하고

  세상을 평정하였다.“

 

상동왕 유욱이 즉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송의 7대 태종 명제이다. 

    

<13> 유자업의 종말과 유송의 멸망

 

유송의 황제 유자업은 혼군의 대명사다. 황제가 된 지 일 년 만에 쫓겨 나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어머니가 죽어 가는데에도 귀신이 무서워 문병하지 낳았다. 고명대신을 가차 없이 죽였으며 반란이 두려워 형제들을 무참히 살육했고 황실 가족들을 능멸했다. 유자업이 반란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문제는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황실 가족들이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쪼개지고 분열하였으며 잦은 변란과 내란으로 황위조차 불안정하게 계승되었다. 결국 증조할아버지 유유가 AD420년에 세운 송(유송)나라는 유자업의 폭정 일 년 만에 사실상 붕괴되었고 결국 유자업이 쫓겨난 지 14년 만에 제나라 창업주 소도성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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