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10) 1997년 대한민국은 왜, 어떻게 결딴이 났는가? (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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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한민국을 누가 환란에 빠뜨렸는가?
2016년 11월 12일 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는 광화문의 ‘100만 촛불의 함성’은 돌이켜 보면 40년 전 박대통령과 최태민의 우연하고 사소한 작은 만남에서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박대통령은 최씨일가와 ‘피보다 진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게 포획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통령의 권력을 그들과 나누고, 그들을 위해 쓰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박대통령과 최씨일가의 권력남용과 국정농단은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박대통령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는 ‘비정상적 상태’에 빠져있는 것 같다. 박대통령의 작은 실수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고 나라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박대통령의 비정상적 행보에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권위도 지지도 모두 잃었다. 박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다. 이제 박대통령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헌법적 절차에 따라 질서 있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박대통령이 이러한 국민적 요구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4.19나 6.10과 같은 또 한 번의 혁명적 상황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이는 박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대통령의 작은 실수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대통령은 작은 실수 하나라도 쉽게 용인될 수 없다.
20년 전인 1997년 YS 5년차 대한민국은 ‘환란’으로 결딴이 났다. 환란은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 왜 우리는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을까? 역사는 1997년에 일어난 한보와 기아사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조 등 이익단체들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저항, 동남아 금융위기 확산, 대통령선거와 표만 쫓는 ‘창’과 ‘제’, DJ의 무책임한 정치행보, YS 경제참모들의 늦장대처, 5년 단임 대통령제의 구조적 결함, 관료사회와 우리사회에 만연된 5년차 병, 그리고 정치적 기반을 잃고 5년차 레임덕에 걸린 힘 빠진 YS, 등등 많은 이유를 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1997년 대한민국을 환란에 이르게 한 정치경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살얼음판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던 대한민국을 ‘환란’에 밀어 넣은 직격탄을 날린 결정적 원인들은 아니다. 그렇다면 환란의 결정적 원인은 무엇일까? 누가 대한민국을 환란으로 몰아넣었는가?
YS는 DJ정부 출범 후 실시된 환란에 대한 검찰조사답변서에서 “강경식 부총리에게 예정대로 IMF행을 포함한 종합대책을 발표케 하고 그 다음에 경질했어야 옳았다”고 자신의 인사실수를 반성했다. 돌이켜 보면 환란은 1997년 11월 19일 외환부족이란 위급상황을 조심스럽게 관리하고 있던 경제팀을 교체하고 임창열(‘임’)을 경제부총리로 기용한 YS의 치명적 인사실수와 ‘임’의 돌발적인 ‘IMF행 거부 발언’에서 비롯되었고, 대선만을 의식한 DJ의 ‘IMF 재협상 주장’이 더해져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임’의 ‘역사적 거짓말’이 결정적으로 외환금융시장을 한 순간에 환란에 밀어 넣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날(19일) YS가 경제팀 교체인사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결국 YS의 작은 인사실수가 나라를 환란에 빠지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IMF로 가는 것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1997년 11월의 YS 5년차 우리경제는 외환부족사태로 하루 앞을 내다보기가 어려웠다. 11월 3일 이후 외환부족사태가 심화되면서 경제는 언제 국가부도가 일어날지 모르는 지경이 되었고 국민의 불안 심리는 더 커졌다. 대선도 막바지에 이르면서 YS와 ‘창’과 DJ간의 기 싸움은 불을 뿜고 있었다. 11월 7일 YS는 ‘창’과 갈등으로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8일에는 ‘선거엄정중립’ 방침을 밝히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나라가 대선정국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라경제는 ‘환란’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었다.
1997년 11월 7일 외환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당시 김인호 경제수석은 청와대에서 금융정책관계자들을 소집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외환사정을 점검했다. 당시 대책회의에서는 여전히 우리 경제의 기초여건은 튼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환율폭등과 외환보유고의 급감이 문제이긴 하지만 이미 발표한 ‘10.29 경제안정화대책’을 추진하면서 국책은행의 해외차입 및 미국, 일본 등과의 양자협의에 의한 외환확보방안을 강구하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IMF 등 국제금융기구로 부터의 긴급 자금조달이 필요한지를 앞으로 검토해 나간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당시 한국은행측은 IMF 지원을 받기위해서는 사전 협상으로 시간이 걸리므로 당장 검토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재정경제원측은 긴급지원경우는 한 달이면 협상이 마무리 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은 IMF행 보다 다른 방안을 찾아보자는 입장 이었다. 김 수석은 “IMF 지원을 받으면 경제정책에 대해 IMF의 간섭과 구조조정 등이 뒤따르기 때문에 IMF행에 앞서 재경원과 한은이 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다 점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경제수석의 한마디는 사실상 경제정책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 수석은 ‘이날 처음으로 정부차원에서 IMF행을 논의 했다’고 증언했지만 IMF행은 최악의 카드일 뿐이었고 당장은 IMF이외의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8일 아침 김 수석은 강 부총리와 협의를 갖고 IMF이외의 가능한 대안을 더 검토하기로 했다. 김 수석은 그 날 YS에게 처음으로 “IMF에 가는 문제를 검토 하겠다”고 보고했다고 말했지만 ‘IMF에 가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IMF로 가야 합니다”
11월 9일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는 강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동남아시아를 순방중인 미셀 깡드쉬 총재를 만나보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IMF에 자금지원요청을 하라는 조언이었다. 당시 필리핀은 신속하게 IMF로부터 6억 달러의 자금지원을 받아 외환위기를 넘겼다. 9일 김 수석은 다시 강 부총리, 이경재 한은총재, 이영탁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등과 같이 금융외환위기 대책회의를 갖고 금융개혁법안 국회통과에 최선을 다하고 법안통과 즉시 금융산업 구조조정 등 종합적인 ‘외환위기극복종합대책’을 발표하기로 하고 IMF문제는 계속 검토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여전히 IMF행은 정책적 대안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10일 아침 강 부총리는 김 수석과 함께 YS에게 “금융개혁법안 처리와 종합금융안정정책 등을 설명하고, ‘이런 방안들이 안 되면 IMF에 가는 가능성도 검토 하겠다”는 입장을 보고했다. 그러나 강 부총리가 ‘IMF에 가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보고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검토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11월 10일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가용 외환보유고 수준이 150억 달러수준으로 떨어져 IMF 지원요청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YS는 그의 회고록에서 19쪽에 걸쳐 ‘IMF 행, 고통의 결단’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8일과 10일의 김 수석과 강 부총리의 보고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YS는 오히려 11월 10일 오후 3시경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가 전화를 걸어와 처음으로 ‘IMF행’을 건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날(10일) 밤 YS는 다시 이경식 한은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IMF행이 불가피한지를 다시 확인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은 회고록에는 없다. 회고록에 의하면 YS는 11일 오후 다시 홍 전 부총리와 통화를 하고 IMF 행의 불가피성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YS는 김 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홍 전 부총리가 전화를 걸어와 IMF로 가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어떻게 추진 중이냐”고 오히려 물었다. 김 수석은 “강 부총리가 검토하고 있으니 최종 결론이 나면 보고드리겠다.”고 답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 수석은 곧바로 강 부총리를 만나 “YS가 IMF에 가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IMF행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YS에게 조속히 보고할 것을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11월 13일 회의를 갖고 최종결론을 내리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YS는 다시 11월 12일 김광일 특보의 안내를 받은 윤진식 경제비서관으로부터 ‘외화부족으로 인한 국가부도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IMF자금지원요청이 시급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후일 검찰수사과정에서 밝혀졌지만 윤진식은 11월 9일 홍재형 전 부총리를 찾아가 만났고, 12일 대통령 보고 시에는 경제팀의 교체도 건의했다고 한다. 그는 김 수석과 강 부총리가 “IMF로 안 가려 한다”고 판단하여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임창열 (‘임’)이 강 부총리 후임으로 거론되었다고 한다.
이 런 사실을 모른 김 수석은 11월 13일 저녁 강 부총리, 이 한은총재와 같이 최종적으로 IMF행을 결정하고 14일 아침 이를 YS에게 보고했다. YS는 IMF와 즉각 협의할 것을 지시했다. YS는 당시의 IMF행 결정에 대해 “IMF 지원 금융을 받지 않고는 머지않아 국가부도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치적 부담이 있다 하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록에 쓰고 있다.
김 수석과 강 부총리가 최종적으로 IMF행을 결정하기 까지는 IMF행이 처음 거론된 11월 7일부터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11월 3일 이후부터 긴박해진 외환상황을 생각하면 거의 2주 만의 결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IMF행에 대한 지연결정으로 김 수석과 강 부총리는 DJ정부 출범 후 실시된 환란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검찰로부터 “외환위기 예방 및 수습기회 일실, 외환위기 상황도래 사실은혜, IMF 구제금융 요청 확정시기 지연”을 가져왔다며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이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정책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중한 검토’라는 정당한 행위를 검찰이 범죄로 본 것은 김 수석과 강 부총리를 환란의 주범으로 특정하기 위한 무리한 정치적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그때 만일 김 수석과 강 부총리가 IMF행을 좀 더 일찍부터 검토하고 YS을 설득 추진했더라면.....’하는 큰 아쉬움이 남는 대목인 것은 분명하다.
YS는 회고록에서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에둘러 말하고 있다. “경제팀에서는 IMF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참모들이 쉽게 말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단안을 내려야 할 입장 이었다” 그리고 “IMF행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피할 것이 아니라 IMF의 지원을 받아 경제를 서둘러 안정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경제팀이 IMF행에 대해 ‘좌고우면’하는 사이 YS는 이미 10일 경부터는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IMF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제참모들의 건의를 기다렸고 오히려 조속한 결정을 재촉까지 했던 것 같다.
우호적으로 끝난 IMF와의 비밀협상
YS의 지시를 받은 강 부총리는 곧바로 미셀 깡드쉬 IMF 총재와 접촉했다. 11월 16일 극비리에 깡드쉬를 서울로 초청하여 이경식 한은총재와 같이 비밀협상을 갖고 300억불 규모의 IMF 지원을 요청했고 시장안정에 필요한 충분한 자금지원을 약속받았다. 협상은 매우 우호적이었고 특히 깡드쉬는 한국경제의 기초가 튼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개혁을 통한 금융산업 구조조정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금융개혁법의 국회통과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구체적인 조건 협상 시 대통령당선자의 동의가 필요한 점 등을 언급하고 협상결과를 미국과 일본에도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까지 했다고 한다. 깡드쉬는 협상결과 발표 시기는 우리가 정하되 한국정부가 발표하면 IMF는 지원 성명을 발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고 곧바로 실무진을 파견 구체적인 협상을 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11월 18일 금융개혁법에 대한 국회 처리가 끝나면 외환위기극복종합대책과 함께 11월 19일 발표하는 것으로 정했다. 김 수석은 이러한 협상결과를 17일 오전 YS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김 수석과 강 부총리는 금융개혁법 국회처리에 총력을 기우렸다. 모든 것은 잘 되어가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환란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YS의 치명적 인사실수
그러는 사이 YS는 금융개혁법 개정안이 처리된 직후 평소 생각해온 외환위기상황을 초래한 데 대한 문책성 인사로 경제팀 교체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YS는 11월 17일 오전 청와대에서 ‘임’과 단둘이 만나 IMF행과 11월 19일자로 경제부총리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국회는 대선을 앞두고 11월 18일 조기폐회하면서 여야는 한국은행법 등 13개 금융개혁법안의 처리를 다음 국회로 넘기기로 결정했다. 나라보다는 금융노조 등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의식하고 표만 생각한 ‘창’과 ‘DJ’가 법안처리를 무산시켰기 때문이었다. 11월 18일 밤 금융개혁법 국회통과가 무산된 후 김 수석과 강 부총리 등은 대책회의를 갖고 ‘금융시장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정리 확정했다. 그리고 IMF 행에 대한 사항은 발표문 안에 넣는 대신 기자들과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발표하기로 합의하고 이러한 사실을 모두 정리하여 다음 날 19일 아침 YS에게 보고했다. 강 부총리는 일본과 미국에도 전화하여 IMF행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보고를 마치고 나온 직후 경질되었고 곧바로 신임 부총리에 ‘임’이 임명되었다.
임창열의 ‘IMF행 거부’ 발언으로 촉발된 ‘환란’
11월 19일 오후 부총리에 취임한 ‘임’은 기자회견을 갖고 긴급금융안정대책을 발표했다. 내용은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이 YS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그러데 ‘임’은 IMF행에 대한 기자 질문에 .“IMF에 가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임’의 ‘IMF행 거부’발언은 심각한 후폭풍을 불러왔다. 무엇보다도 IMF와의 합의를 파기하고 미국, 일본과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외환의 해외조달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시장에서는 환율이 폭등하고 정부의 가용 보유외환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우리 경제는 설마 했던 국가부도 상황을 맞게 되었고 ‘환란’에 빠졌다.
DJ정부가 출범하고 환란주범 찾기가 시작되면서 ‘임’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런데 ‘임’은 뜻밖에 전임자로부터 “인계를 받지 못해 내용을 몰랐다”고 말했다. 감사원은 외환특감결과를 발표하면서 “강 전 부총리가 IMF 구제금융결정 사실을 후임 부총리인 임씨에게 제대로 인계하지 않아 임씨가 1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IMF행을 부인했고, 이것이 우리나라 대외신인도를 급락시키며 외환보유고가 고갈된 상태에서 IMF와 조건협상을 진행하게 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며 “IMF자금지원 건에 대해 인수-인계가 미비했던 탓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혐의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YS는 “17일 내게 후임 통보를 받고 곧장 경제수석과 김용태 비서실장을 찾아가 ‘IMF로 가기로 했다’는 나와의 대화 내용까지 발설한 그가 막상 기자회견에서 ‘IMF 지원신청을 하지 않겠다’고 한 예상치 못한 발표에 놀랐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실수”이며 “IMF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에 먹칠을 한 것”이라고도 했다. YS는 19일 그를 부총리에 임명한 직후 고건 국무총리와 김용태 비서실장등이 배석한 가운데 차를 마시면서도 그에게 “IMF 지원 금융을 받는 것을 포함하여 강 부총리가 추진해온 사항을 잘 승계 받아 발표를 하라”고 말했다고 했다.
1997년 대한민국을 환란에 빠뜨린 주범은 누구인가?
그러나 DJ정부의 감사원과 검찰은 YS의 증언을 무시했고 ‘임’ 감싸기에 급급했다. 당시 언론도 ‘노골적인 임창열 봐주기 수사’라고 검찰을 비난했다. YS의 회고록과 검찰 답변서를 보면 ‘임’은 ‘단순실수’가 아닌 ‘고의실수’를 저질렀다고 밖에 달리 해석이 안 된다. ‘인수인계가 안 되었다’는 말은 그야 말로 만화 같은 말이다. ‘임’은 명백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임’은 ‘왜 그랬을까?’ 그런 ‘임’을 DJ정부는 ‘왜 감싸주었을까?’ 의문이 생겨나는 대목이다. DJ 정부 출범이후 ‘임’은 곧바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고 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도지사에 출마했고 지사에 당선되었다. ‘임’의 정치적 행보는 ‘임’과 DJ측과 어떤 정치적 거래가 있었음을 역시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DJ정부는 분명 진정한 ‘환란유발자’를 그토록 감싸 안아 주어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유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나라경제를 환란에 빠뜨린 ‘임’은 11월 21일 밤 IMF에 200억 달러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발표했다. 우리는 외환고갈상태에서 협상력을 상실했고 한시가 급한 외환도입을 위해 IMF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해야만 하는 굴욕적인 협상을 해야 했다. 협상 막바지에 IMF는 대선후보들이 IMF 합의 사항을 지킨다는 각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12월 3일 밤 어렵게 IMF와 550억 달러 지원을 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런데 다음 날(4일) DJ는 기다렸다는 듯이 ‘IMF재협상’을 요구하며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IMF와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에서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DJ의 요구는 또다시 IMF의 불신을 불러왔다. 나라는 없고 대선만 보고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여 한 표라도 더 얻어 보자는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재협상요구로 IMF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우리에 대한 IMF의 불신이 가중되면서 후일 우리는 더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창’과 ‘제’ 그리고 DJ는 IMF와의 협약을 준수한다는 서약을 IMF에 다시 해야 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12월 13일 YS는 대선 후보들을 청와대로 불러 국가위기 상황에서 정치지도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로 합의 하고 공동발표문을 발표했다. 이 사실을 IMF와 미국에 전달하면서 IMF행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고 IMF 지원 자금 집행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가까스로 국가부도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라경제는 이미 결딴이 났고 국민은 IMF의 감독 속에서 치욕스런 눈물과 고통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2월 18일 DJ는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모든 책임이 사면되었고 ‘창’도 낙선으로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환란의 모든 책임은 YS와 그를 잘못 보좌한 참모들의 몫이 되었고, 문민정부의 무능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문민정부의 무능이 YS대로 끝나지 않고 DJ,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가며 되풀이 되고 이제 박근혜 정부도 그 전철을 밟고 있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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