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뽑았는데 네가 나를 속여?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국정농단의 주인공들
박근혜, 최순실, 차은택 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들 때문에 나라가 혼미하다. 최순실, 그의 죄는 대통령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점이다. 차은택, 그의 죄목 역시 최순실의 앞잡이가 되어 사욕을 채웠다는 점이다. 박근혜, 그는 대통령으로서 친구 최순실을 비호하며 그의 전횡을 방조했다는 점이다. 국정 운영이 대통령의 비선 조직에 의해 좌우되고 최순실이 밤의 대통령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했으니 나라꼴이 우습지도 않게 되었다.
지난 대선, 국민행복과 문화융성이란 구호에 동참한 많은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다. 창조경제로 나라가 부흥하기를 원했던 국민들은 부동산 투기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강남부자들이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고 뜨악한 심정이다. 국가가 정상 운영되고 법치가 서고 경제가 제대로 작동되고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원했다. 그런데 양극화는 심화되고 교육은 망가지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을 외친 대통령에게 환호했다. 그 모든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49대 51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비록 선거에서는 이겼지만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숫자가 이긴 편과 엇비슷하게 많았다. 당연히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반대편도 국민이다. 대통령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외쳤지만 과연 그러한가? 대통령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지들도 가차 없이 내쳤다. 그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그랬다는 것이다.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은 반대 의견을 말하는 경우다.
이견의 옳고 그름은 두 번째다. 의견 자체를 거부하거나 듣는 것조차 싫어한다는 것. 임금님 귀는 당나귀가 되어서는 안 되거늘. 국무회의에서 장관 등 각료들은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 적기에 바빴다고 한다. 그간 신문 보도의 내용이다. 박대통령의 리더십을 수직적 리더십이라고 한다. 그보다 열 살 스무 살이 많은 올드 보이들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한 그의 전제적 리더십이 성공하였는가? 그래서 우리가 원했던 국민행복, 문화융성이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었나?
배신자는 누구인가?
유승민의원 공천 사태를 기억한다.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그를 꼭 집어 내쳤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 배신자는 나빠” 라며 대통령을 옹호했다. 배신이란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그에게 덧씌워졌다.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유권자들은 유승민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주군의 뜻과는 달리 배신의 낙인찍힌 그에게 표를 던졌다. 왜일까? 대통령이 해도 너무한다, 지나치다고 생각했음이 아닐까?
배신이란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것이다. 정당하지도 않을 뿐 더러 은혜를 입고도 되레 적으로 모는 배은망덕한 짓이다. 정정당당한 경쟁 대신 상대를 비겁하게 죽이는 것이 배신이다. 진짜 배신자는 누구인가? 배신이란 겉과 속이 다름을 말한다. 진실을 뒤로하고 거짓말을 수시로 하는 짓도 배신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국민을 속이고 기만한 자를 배신자로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면 문화융성의 국정 이념을 표리부동하게 사적 편취의 목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배신자가 아니고 무엇이런가.
수많은 국민들의 분노는 배신감에 기인한다. “내가 너를 뽑았는데 네가 나를 속여?” “박근혜, 당신을 뽑았는데 우리가 허수아비를 뽑은 거야?” 참담한 심정의 사람들이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촛불시위를 시작했다. 이 촛불은 단순한 촛불이 아니다. 정당성을 갖고 있기에 무서운 것이다. 정당성이란 정의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대에 적법한 절차와 질서와 당위성이 비선 권력의 부당한 개입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촛불은 바로 더럽힘 당한 정의의 회복을 위한 염원인 것이다.
문화융성의 현주소
현 정부는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를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문화는 지금껏 경제 우선주의에 밀려 항상 뒷전이었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가 ‘문화융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국가예산 2% 할당을 선언하였다. ‘문화가 있는 삶’으로 국민의 생활을 보다 윤택하고 품위 있게 하고 ‘창조경제’를 원동력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데 박수치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러한가? 지난 4년간 문화 분야만 돌아보자.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이 있었다. 8천명이 넘는 문화 예술인의 이름이 올라와있단다. 이 무슨 망칙한 일인가? 문화와 예술은 ‘자유’를 먹고 산다. 자유를 구속하는 그 어떤 작태도 있어서는 안된다. 억압과 감시는 해악이다. 만일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존재하고 실재로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이는 문화융성의 근본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 김수영 시인은 원래 “모든 예술은 불온하다”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문화융성을 모르는 자들이 문화를 외치고 지배하지는 않았나?
또한 인사에서 가장 큰 난맥상을 보인 곳이 문화체육관광부다.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시절 ‘배 째라’ 차관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해놓고 스스로 면직시켰다. 초유의 일이다. 돌이켜보니 최순실의 딸과 관련된 승마협회 사건과 무관해보이지가 않는다. 청와대가 정부 부처 국장은 물론 과장급 인사에 까지 개입한다는 말이 풍문으로 돈지 오래다. 대통령은 스스로 약속한 책임 장관제를 완전 무시했다. 장관의 공식 추천을 비웃기라도 한 듯 최순실, 정윤회와 연결된 문고리 삼인방 등 십상시들이 추천한 자들이 요직을 차지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문화계는 기관장 인사 마다 홍역을 치렀다. 대통령은 취임 초기 인사 원칙으로 국정철학을 이해하고 전문성 있는 인사들을 등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빈 말이 되고 말았다. 인사에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깡그리 무시했다. 국립오페라단의 경우 경력이 일천한 40대 모씨를 단장에 임명했다가 반대에 부딪쳐 철회한 적이 있다. 영화진흥위원장은 무려 3차에 걸친 공모를 다 무산시키고 장관 경질 후 만화애니메이션 교수를 임명했다. 수많은 영화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깡그리 짓밟은 처사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선이 문화체육관광분야에 한두 건이 아님은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알려진 것처럼 차은택이 대학 선배이자 은사를 장관으로 추천하고 일개 광고회사 상무 출신을 한국콘텐츠진흥원장에 추천했다. 다 이루어졌다. 허수아비 장관과 콘진원장은 배후 세력의 조종대로 사업을 승인하고 예산을 집행했다. 여기에 청와대가 뒷심을 받쳐주었다. 사리사욕을 채울 창구가 미르문화재단이었다. 최순실은 문체부 2차관을 내세워 멀쩡한 체육인재육성재단을 없애고 K스포츠재단으로 일감을 몰았다. 문화융성이 최순실 일당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었나? 문화융성위원회 역시 들러리에 불과한 허깨비 무용지물이었나? 문화융성이 아니라 문화퇴행의 진면목을 우리는 목도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법조계에 ‘일도이부삼빽’이란 속어가 있다. 사건이 터지면 당사자는 일단 도망친다(일도). 잡히면 무조건 부인한다(이부). 조사가 시작되면 빽을 동원한다(삼빽). 이 법칙은 최순실 게이트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최순실은 독일로 도피하고 차은택은 중국으로 도망가서 눈치를 살폈다. 언론이 혐의점을 보도하기 시작하자 죄가 없음을 외치며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고 항변했다. 이후 모종의 사주(?)에 의해 관련자들이 자진 귀국한다. 최순실은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빈다. 지금 최순실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빽이 작용하는지 두고 볼 일이다.
우려스러운 상황들이 전개된다. 파놓은 거대한 함정으로 모든 진실이 매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진실은 흔적도 없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몇 명을 희생양으로 삼아 용서를 구하는 척 하다가 더욱 굳건히 체제를 유지하려고 시도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범죄 혐의자들의 자진 귀국과 검찰 수사가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파묻지나 않을지 걱정스런 눈초리가 많다. 문고리 중 나머지들은 왜 소환 대상에서 제외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법은 정의다. 검찰을 믿고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는 소중한 것이다. 문화는 생활이다. 입는 옷과 먹는 음식, 여행, 관광 등 즐길 거리, 책과 영화, 음악, 미술, 디자인, 학문을 포함하여 우리 정신세계의 전부가 문화다. 물질이 외피라면 정신은 알맹이다. 정신이 바로 문화다. 정부의 문화융성은 비선 버러지들의 개입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다시 사람을 생각한다. 법과 제도와 인사와 개혁과 소통 모두 운용하는 사람에 달려있다. 사람 잘 보고 뽑아야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시인 정신이 그립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