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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7) 정치교범이 된 ‘창(昌)’의 ‘질수 없는 선거를 지는 법’(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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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0월26일 17시03분
  • 최종수정 2016년10월26일 17시06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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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의 디스공격, 셀프디스가 되다

  ‘창’의 DJ 비자금 디스공격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셀프디스, 자충수가 되었고 ‘정치공작’이란 역풍을 만나 지지율을 10%대로 추락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DJ의 ‘창’에 대한 ‘병풍디스’는 ‘신의 한수’가 되었지만 왜 ‘창’의 DJ에 대한 ‘비자금디스“는 자신을  파국으로 몰아간 ’악마의 한수‘가 된 것일까? 

 ‘창’의 비자금디스공격에 대한 보고를 받은 YS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고뇌 끝에 YS는 10월 19일 일요일 아침 김태정 검찰총장을 관저로 불러 “DJ 비자금 수사는 대통령선거이후로 미룬다”고 발표할 것을 지시했다. 21일 김 총장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수사유보방침을 공식발표했다. 

 YS는 왜 ‘창’을 돕지 않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DJ를 살리는 결정을 내렸을까. YS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그의 회고록에 남겼다. “DJ비자금수사를 하게 되면 그의 구속은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라도지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럴 경우 대통령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이었다.” 이어서 YS는 “이회창씨의 생각은 경쟁자를 선거에서 배제하려다가 선거 자체를 없애 버리게 될 무모한 발상이었다. 그는 눈앞의 승리에만 급급해 이런 잘못된 시각을 갖게 된 것이 분명했다”고 평가했다. 

 YS가 남긴 말의 행간을 읽으면 YS는 DJ비자금은 실체가 있는 것을 전제로 수사를 하게 되면 DJ구속은 물론 후보직사퇴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았다. ‘창’은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YS는 그 이후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 이후 대선 판은 어떻게 되고, 나라는 어떻게 되는 가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대책도 ‘창’에게는 없었다. ‘창’은 전후좌우를 살피고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무모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창’은 YS와 DJ라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국민들은 어떻게 설득시켜 나갈 지에 대한 준비를 했어야 했다. 정치적 디스공격은 그 것이 몰고 올 가능한 모든 종류의 정치적 파장을 상정하고 그에 대한 치밀하고 단계적인 대응전략 등에 대한 사전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창’에게는 그런 준비가 없었다. 

 어쩌면 ‘폭동설’은 DJ측이 수사중단을 위하여 YS와 청와대를 압박하기 위해 만들어 유포한 또 하나의 정치공작으로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DJ를 구속하면 DJ지지 세력들이 DJ구속을 정치탄압과 정치공작으로 몰아 DJ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일으키고 소요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DJ구속은 결국 대선 판을 파국으로 몰아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대선실종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YS는 판단 한 것으로 보인다. DJ를 너무나 잘 아는 YS는 정치공작에 능한 DJ가 대선정국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YS는 퇴임을 몇 개월 남겨둔 임기 말 현직 대통령으로서 대선이 실종될 수 있는 초유의 국가적 사태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YS는 차남에 대한 재판과 기아사태 수습, 위기로 치닫고 있는 나라경제, ‘창’의 지지율하락과 ‘제’의 분파적 행보 등등의 정치 경제의 현실 앞에 무너져 있었고 지쳐있었고 무기력해져 있었다. YS는 그러한 예상되는 엄중한 정치적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DJ비자금 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갈 힘도 의욕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YS는 대선실종사태가 일어나는 일을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대선 후 수사’로 비자금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자신에게도 최선의 선택이라는 ‘고뇌의 결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DJ가 아닌 YS를 공격한 ‘창’

 YS의 결단에 DJ는 안도했고 ‘창’은 격분했다. ‘창’은 YS의 결정은 ‘제’를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고 더 나아가 YS가 ‘창’이 대통령 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다고 극단적인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YS에 대한 “내면에서 신음하는 강력한 의혹들은” 이성을 잃은 ‘창’을 폭발시켰다. 10월 22일 ‘창’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YS에게 “당을 떠나라”고 그의 공격의 칼을 DJ가 아닌 YS에게 겨누었다. 만일 당시에 ‘창’이 YS의 수사유보결정의 잘못과 수사의 불가피성을 설득력 있게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창’은 오히려 신한국당 내 비주류 민주계의원들에 대해서도 “나갈 사람은 다 나가라”며 자신의 지지기반마저 스스로 무너뜨리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나라를 이끌어 나갈 대통령으로서 오히려 품어 안아야 비주류를 내치는 정치력부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창’의 한마디는 패거리정치를 선언하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들은 ‘창’의 행태에서 편협하고 오만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신한국당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창’은 DJ를 침몰시키기 위해 핵공격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자신을 포함 여권을 초토화시키는 결과를 자초했다.  

 박관용 전 의장은 “365개 가⦁차명 및 도명계좌를 통해 동화은행 등에 입금액기준 67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관리하고 있다”는 ‘창’의 주장에 대해 “670억 원의 은행계좌 번호, 액수, 입출금 일자, 통장사본 등등 구구한 변명이 소용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팩트(fact)였다. DJ에게 치명상을 입힐, 여당에는 DJ 덜미를 잡을 호재(好材) 중의 호재(였)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상대방을 옥죌 카드를 주도면밀하지 못한 일처리로 사태만 악화시켰다” 며 “도둑을 잡았다가 교통위반 했다고 혼난 셈”이라고 평가했다. 

 10월 22일 이후 신한국당내 민주계와 청와대의 입장은 분명해졌다. 민주계는 더 이상 ‘창’과 ‘제’사이에서 눈치 보며 곤혹스러워 할 이유가 없어졌다. 청와대 내에서도 ‘누구는 누구 파다’라는 수군거림이 있었으나 비서관이나 행정관가운데 입장이 다른 사람은 ‘청와대를 떠나라’는 말까지 나왔다. 박관용 전 의장은 이 일로 YS의 이인제 지원이 본격화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YS가 수석회의 석상에서 밝힌 공식입장은 ‘선거엄정중립’이었다. 

 

가슴 아팠던 DJ의 ‘사후보장설’

  YS는 DJ 비자금문제를 정리한 후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조순, 이인제 등 5명의 대통령후보들과 차례로 청와대에서 연쇄조찬회동을 가지고 어느 후보에게도 절대 불이익이 가는 일이 없도록 공명정대한 선거관리의지를 전하고 당면한 경제문제와 안보문제 등 국정현안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10월 24일 첫 번째로 YS는 DJ를 만났다. 청와대에서 YS를 만난 DJ는 비자금 수사유보 결정에 대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YS에게 감사했다고 YS는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DJ는 밖으로 나와 YS가 퇴임 후 보장을 요청했다는 ‘사후보장설’을 유포했다. DJ는 YS가 자신의 당선을 전제로 사후보장을 대가로 검찰조사를 유보한 것처럼 말을 만들어 YS와 ‘창’의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이 소식을 접한 YS는 수석회의 자리에서 자신의 고뇌에 찬 결단을 왜곡한 DJ에 대해 불쾌감을 강하게 토로했다. YS가 그 토록 DJ를 거짓말쟁이라고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처음으로 마음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모든 정이 다 떨어졌다”

 11월 1일로 예정되었던 YS와의 만남을 ‘창’을 거부했다. 모처럼 마련된 대화의 자리를 ‘창’이 걷어 차버린 것이다. ‘창’의 YS에 대한 “악 감정”은 극으로 달렸다. 지방 선거유세장에서 ‘창’ 지지자들이 YS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를 만들어 몽둥이로 치거나 심지어 ‘YS 화형식’도 서슴지 않았다. YS는 ‘창’의 이성을 잃은 행태에 “패륜아적 작태”라며 흥분했고 “이회창 씨와 그의 주변 인사들이 벌인 행동을 보면서 나는 모든 정이 다 떨어졌다...인간적인 배신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나는 이회창씨와 당에 대한 모든 미련을 다 털어버렸다”고 회고록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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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는 해가 서산을 붉게 물들이는 마지막 힘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지는 해는 표 확장에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지만 감표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지는 해를 쳐다보며 가슴아파하는 지지층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지는 해와의 원만한 관계는 필수적이다. ‘창’은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킨 YS에 대한 무례한 도발은 선거 마지막까지 이어졌고 결국 ‘창’에게는 치명적인 감표요인이 되었다. ‘창’의 YS공격은 TK표를 얻는 데는 기여했을 수도 있지만 PK표를 깎아내리고 ‘제’에게 몰아주어 39만 표차이로 질 수 없는 선거를 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YS는 사석에서 당시 “‘창’이 나에게 그렇게 무례한 행동만 하지 않았더라도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DJP연합은 DJ의 “또 하나의 속임수” 

 ‘창’의 DJ 비자금 사건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DJ는 JP에게 대대적인 정치적 양보를 하면서  DJP연합을 밀어붙였다. 11월 4일 DJ는 JP자택으로 찾아가 그동안 계속해온 JP와의 물밑협상을 마무리 짓고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JP와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 한다’는 ‘DJP 후보단일화’를 골자로 하는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총리는 JP가 맡고 내각제 개헌은 1999년 말까지 완료하여 2000년 4월 16대 총선이후에는 자민련이 수상선택권을 가지고 내각제 정권을 출범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를 본 YS는 1996년 총선당시 집권여당(민자당)이 내각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내각제 개헌저지’를 외쳤던 DJ가 말을 바꾸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는 것은 “DJ의 또 하나의 속임수”라고 평가했다. 결과는 YS 예측대로 진행되었다. ‘진보와 보수의 역사적 대 연대’라는 DJP연합은 DJ의 ‘거짓말 논법’대로 ‘지킬 수 없는, 또는 지킬 의사가 없는,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지 않은’ 대권을 위한 정치 공학적 야합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것은 보수의 상징이었던 JP가 “DJ가 빨갱이가 아님을 보증한 것”으로 “DJ의 당선 기대치”를 높여준 것이라고 박관용 전 의장은 DJP연합의 의미를 평가했다. JP는 DJ의 방패막이가 되어 중도 보수층의 ‘DJ 비토론’을 잠재웠다. 당시 보수층은 “어떤 방법을 쓰든 DJ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DJ는 용공(容共)분자인데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의 체제와 정체성을 파괴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DJ 비토론’이 강했고, ”6·25 참전 장교이자 반공을 국시로 5·16혁명을 일으킨 내(JP)가 어떻게 DJ 같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정서적인 압박이 심했다.“고 JP는 당시의 고충을 그의 회고록에 적고 있다.   

 ‘DJP진보-보수연합’과 ‘후보단일화’는 이후 진보좌파들을 위한 새로운 대선, 총선의 필승전략이 되었고 새로운 정치모델이 되었다. 노무현대통령 때는 정몽준이, 2012년 대선에서는 문재인후보에게 안철수가, 지난 4월 총선에서는 김종인이 문재인당을 위해 그 역할을 담당했다. 다가오는 2017년 대선에서는 또 어떠한 진보-보수연합이 등장할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2017년이 1997년과 다른 점은 여야 모두가 내부적으로 친박-비박, 친문-반문 등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있고 여기에 손학규, 안철수 등 제3지대로 사분오열되어 있어 앞으로 여야 간 어떠한 합종연횡이 일어날지 현재로서는 예측자체가 어렵다. 

 그러나 국민들은 DJP와 노무현-정몽준연대를 통해 터득한 학습효과 때문에 그동안 두 차례의 ‘진보-보수연합 혹은 야합’은 결국 ‘트로이 목마’가 되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가치와 역사를 훼손하는 급진좌파 또는 친북인사들의 국가기관 침투 및 세력 확장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또다시 그러한 진보-보수야합을 지지하게 될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급진적인 보수와 급진좌파진보에 식상하고 있는 국민들의 우려와 기대가 극우와 극좌를 배제한 중도적인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의 연대라는 새로운 정치실험모델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 가하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2017년의 대선이 관심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39만 표’의 정치적 의미, “만일 그 때 ‘창’이 그렇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YS는 11월 7일 신한국당 탈당을 발표하고 수석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YS는 수석회의 석상에서 “누가 당선돼도 관계없다. 국민이 선택한 사람을 지지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모든 수석들은 모든 정당과 거리를 두고 처신하라”며 “법에 따라 엄정하게 선거를 관리할 것”을 지시했다. 11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도 YS는 공식석상에서는 처음으로 공직자의 정치적 중립을 지시했다. 그 후 YS는 수석회의 때 마다 “공명정대한 선거관리”를 강조했고 수석개개인들이 엄정중립을 지켜 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선거관련 수석실 비서관들과 행정관들의 언동조심을 지시하고 청와대 전 직원 특별조회를 가지고 직원들의 엄정중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들은 YS의 탈당선언으로 YS와 당의 인연이 끊어지고 신한국당 민주계의 선택이 자유로워지면서 YS의 ‘제’ 지원설이 오히려 확산되었다고 전 했다. 특히 청와대의 일부 수석실을 중심으로 ‘제’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보도하기도 했다. 어쩌면 일부 수석이나 비서관들의 개인적인 움직임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YS의 마음을 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당시의 YS는 ‘누가 돼도 관계없다“는 생각으로 선거엄정중립의 입장을 취했으며, 더 이상 대선에 정신을 팔 수 없는 ’국가부도‘라는 나라를 흔드는 또 하나의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된 외환위기를 진화하고 선거에 발목이 잡혀 추락하고 있는 나라경제를 구해야 하는 긴급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YS가 ’제‘의 당선을 생각하고 지원하는 정치공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YS는 그런 행동을 할 정치인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다.   

 10월 23일 홍콩중시 폭락사태가 발생하면서 우리 증시도 폭락했다. 우리 경제가 이상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 전날인 22일 ‘창’은 YS에게 당을 떠나라고 했다. YS는 11월 10일 당시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로부터 처음으로 ‘외환부족으로 국가부도가 일어 날수도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11월 7일 YS가 신한국당을 탈당한 직후의 일이다. 

  ‘창’은 11월 21일 당시 민주당(조순 총재)과 합당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개명하고 YS 흔적지우기에 나섰다. ‘창’은 TK지역의 반 YS바람과 YS의 ‘제’지원설 등으로 경남북의 지지기반을 다지면서 지지율 확보를 위해 뛰었지만 1997년 12월 18일 DJ의 대통령 당선을 지켜보아야 했다. 외환위기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역사상 최초로 여야 간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역사적 정권교체를 가져온 표차는 39만 표에 불과했다. 

 2017년으로 다가오는 대선을 앞에 두고 집권여당과 보수진영을 비롯한 여야의 모든 대선준비생들은 ‘39만 표’에 담긴 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창’은 모든 대선후보들에게는 정말 ‘질수 없는 선거를 지는 법’을 몸으로 가르쳐준 대선교범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 때 ‘창’이 그렇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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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0월26일 17시03분
  • 최종수정 2016년10월26일 17시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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