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5년차 청와대, 그리고 지금은....(3) 누가 떠오르는 해를 막을 수 있을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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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라진 2017년 대선시계
이번 추석을 전후하여 언론은 여야의 대선잠룡들 소개에 앞장서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대선으로 끌어냈다. 더욱이 정세균 국회의장이 3당 원내 대표를 대동하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방문하면서 추석민심을 대선으로 이끌었다. 2017년 대선시계는 1997년과 비교하면 최소한 3-4개월은 더 앞당겨진 것 같다.
1997년 대선시계는 3월 들어서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97년 새해의 정국은 노동법 날치기와 노동계 총파업, 한보사태와 YS 차남문제로 YS를 “문민독재”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로 들끓었다. YS와 신한국당에 대한 국민지지도는 떨어지고, 그동안 YS의 공직자 재산등록, 금융실명제, 하나회창산, 역사바로세우기 등 문민개혁에 숨죽이던 여권 내의 민정계 등 반YS세력들이 목소리를 내고 반YS 전선구축을 본격화 했다. 한 때 YS 후계자로 거론되며 참신한 이미지를 주었던 이홍구 대표도 빛을 잃었다. 혼란에 빠진 정국의 분위기 쇄신을 위한 대선시계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홍구 대표는 명망 있는 정치학교수로 노태우정부에서 발탁되어 장관과 대사를 지냈고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YS는 이홍구 총리를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영입하여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시켰고 곧바로 당대표로 까지 지명했다. 이홍구 대표는 취임직후부터 YS 후계자로, 떠오르는 해로 주목을 받았다. 언론은 그가 과연 대권주자인지, 그리고 그가 앞으로 어떠한 정치인으로 변신할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조용하고 정치인으로서는 다소 서툰 행보와 언행 때문에 그가 과연 실세인지 허세인지에 대한 논란도 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대표는 당대표로서 여소야대의 신한국당을 여대야소로 바꾸고, 노동법날치기 강행처리라는 악역을 담당했다. 반민주적이고 반의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이며 그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대표직을 물러나야 했다. 여당은 초조해졌고 분위기 반전을 위한 새로운 인물이 필요해졌다. 여권 지지자들도 대선을 향해 새로운 해를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민주계의 위세에 눌려있던 신한국당내의 민정계가 결집하며 당내 영향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당시 이 대표가 정치학자로서 민주정치철학을 확고히 하면서 YS가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열망에 부응하여 오히려 의원 빼내오기나 날치기 처리에 직을 걸고 반대하였더라면, 그리고 당대표로서 DJ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JP)를 만나 난국돌파를 위한 정국돌파에 나섰더라면, 그리고 노동법 개정에 대해서 국민 앞에서 당당하게 노동법개정의 시대적 불가피성을 설득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지나간 역사에 대해 가정을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우리 정치역사와 YS 정치역정에 어쩌면 가장 아쉬웠던 대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상상해 본 것이다.
이홍구 대표를 생각하면 이번 추석민심에서 여야를 아울러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후보로 떠오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는 것은 왜일까. 그가 과연 정치공학이 난무하는 한국정치에서 새로 떠오르는 희망의 해가 되어 서산에 지는 해가 된 대통령을 가려주는 단순한 간판스타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경륜을 말하고 행동하는 진정한 대권을 향한 강한 권력의지를 가진 정치인의 언행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서다. 앞으로 남은 1년여의 대선 레이스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떠오르는 해가 될 수 있을지, 내년 1월 귀국 후 그가 어떤 언행과 행보를 보여 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DJP 연합 혹은 야합’의 학습효과
1997년 봄의 정국은 이미 DJP연대가 주도하고 있었다. DJP연대를 성사시킨 DJ는 야권의 차기 대권후보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지며 떠오르는 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 빛을 발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강력한 빛을 낼 수 있게 도와줄 새로운 전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1996년 5월 DJ는 15대 총선이후 신한국당의 의원 빼가기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JP에게 반YS 연합전선구축을 제안했다. JP는 그의 회고록에서 1996년 가을부터 DJ쪽으로부터 “97년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후보 단일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각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며 JP에게 본격적으로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고 썼다. YS의 1990년 3당 합당을 정치적 야합이라고 맹비난했던 DJ가 JP에게 야합을 제안한 것이다.
1996년 10월 JP는 당시 김용환 자민련 사무총장을 DJ에게 보내 DJP연합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고 했다. 1995년 JP는 민주계의 압박으로 YS와 결별을 선언하고 민자당을 탈당 YS개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모아 자민련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행보를 “해불양수(海不讓水), 바다는 큰 물, 작은 물을 가리지 않으며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 대양을 이룬다”는 말로 표현했다. 자신은 내각제 관철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며 자신의 행보를 합리화 시켰다. “정자정야(政者正也), 정(政)은 본시 천하를 바로 잡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큰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JP는 자신과는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이 너무나 다른 DJ의 은밀한 제안을 수용했다.
사실 YS의 3당 합당은 오늘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보면 극우적 민정계와 공화계 그리고 개혁적 보수의 민주계가 손을 잡은 ‘보수 대연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노태우 정부 이후 소멸의 위기에 처한 극우적 보수 (민정계)는 개혁적 보수(민주계)의 피를 수혈 받아 회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실제로 YS는 문민개혁을 통해 보수진영의 대개혁을 가져왔고 보수진영을 위한 새로운 문민민주주의의 이념적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1996년 신한국당 출범이후 보수진영 내 민정계와 민주계가 경쟁과 갈등을 통해 지난 20년 보수진영이 그나마 정치적 균형감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회창의 한나라당, 박근혜의 새누리당을 거치면서 보수진영은 차즘 민정계 중심의 극우적 보수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4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새누리당의 친박(극우적 보수)에 의한 비박(비판적, 합리적 보수) 쳐내기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보수진영내 개혁적 보수를 축출하고 보수 대연합의 틀을 깨면서 보수진영의 역사의 시계를 YS 3당 합당이전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1997년 대선에서 그랬듯이 2017년 대선에서 보수진영이 다시 분열한다면 대선은 보나마나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다시 보수 대연합을 이룰 수 있을지가 대선의 승패를 판가름 나게 할 것이란 점에서 새누리당과 보수진영 모두의 깊은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야권의 경우 1997년의 DJP연합은 솔직히 JP와 DJ가 보수와 진보의 길을 걸어 온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를 내 팽개치고 오로지 정권교체만을 위해 권력(대통령-국무총리)을 나눠 갖기로 하고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룬 새로운 정치 공학적 야합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보수를 자처하는 JP는 명분으로 내건 내각제도 얻어내지도 못하고 DJ를 앞세운 합리적 진보뿐 만아니라 좌파적 급진진보, 심지어는 친북성향의 좌파진보들의 정치세력화의 길을 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1997년 DJ와 JP가 만들어낸 정치적 야합은 하나의 ‘정치모형’이 되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야당의 정치적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야권은 선거 때마다 국가발전을 위한 정치적 비전이나 가치, 그리고 정책을 놓고 경쟁하기 보다는 야권 후보단일화라는 정치공학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 야당의 건전한 정책정당으로서 발전을 가로막는 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대선에서 현재 분열되어 있는 야권이 또다시 어떤 술수로 DJP연합과 같은 야권후보 단일화를 만들어 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대한 DJP연합의 학습효과가 무엇인지를 여야 모든 정치인이 성찰해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YS와 이회창의 갈등과 불신의 정치
1997년 3월, 이홍구 대표가 낙마한 다음 누가 신한국당의 대표가 되느냐가 새로운 관심으로 떠올랐다. 대표가 된다는 것은 곧 차기 대권후보의 고지를 선점하는 것을 의미했다.
YS는 그의 회고록에서 “차기 신한국당대표로 이홍구 대표를 계속 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당시의 국정분위기 쇄신을 위해 대표를 교체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이) 이한동, 이수성, 이회창을 놓고 고심한 끝에 이회창을 당대표로 지명했다”고 적었다. YS는 그가 “당대표로서 당을 무난히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YS의 이런 설명은 그가 흔쾌히 이회창을 당대표로 지명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YS는 정권초기 “대쪽판사”로 이름을 날린 이회창 대법원 대법관을 발탁 감사원장을 시켰다.
그의 이미지대로 이 대표는 그 동안 관행으로 금기시되어 왔던 청와대·안기부 등에 대한 감사는 물론 '평화의 댐'과 ‘율곡사업 비리’ 감사 등으로 성역 없는 문민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큰 지지를 받았다. 1993년 12월 16일 UR 쌀시장개방협상 등으로 흐트러진 국정분위기 쇄신을 위해 당정을 개편하면서 YS는 그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총리 취임이후 ‘국무총리의 법적권한’을 내세우며 대통령의 지휘권에 도전하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YS는 이 총리의 행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총리임명 4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사표를 받았다. YS는 “이 총리 해임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업무에 혼선을 주어 국정을 혼란케 한 사람에 대한 당연한 조치였다”고 그의 회고록에 적었다. 그러나 이 대표는 헌법에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노력하다가 YS와 충돌했으며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총리직 사표를 냈다고 자신의 총리직 사임은 YS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고 언론에 말했다. 이회창의 YS 때리기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YS는 이 부분에 대해 “이 대표의 언론플레이였다”며 진실은 “잘못했으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는 이 총리에게 “당장 사표를 내지 않으면 해임조치 하겠다.”고 했다며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그의 회고록에 적고 있다. 그처럼 두 사람의 불신은 깊었고 갈등은 심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당시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국무총리의 관계가 미국의 대통령-부통령의 관계처럼 국정운영에 공동의 정치적 책임을 진 ‘한 팀’이 아니라는 마치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견제하는 사람처럼 인식되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열린사회의 민주적 국정운영시스템에 근본적인 제도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특별한, 그리고 잘못된, 대통령-국무총리의 관계가 1948년 헌법제정당시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재론하기로 한다.
“떠오르는 해”가 된 이회창
1994년 불편하게 헤어졌던 이회창을 YS는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1번으로 다시 불렀고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을 시켰으며 그를 다시 신한국당 대표로까지 지명했다. 이회창은 민정계의 등을 타고 떠오르는 해가 되기 시작했다. 15대 총선당시 막후에서 선거를 관리하면서 ‘소통령’이란 소리를 들었던 YS 차남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YS가 이회창을 다시 부른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그는 “YS는 이 대표를 탐탁치 않아했으나 이 대표를 다시 포용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범여권을 집결시켜야 선거에 승산이 있다”며 YS를 설득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회창이 총선이후 당대표가 되고 대선 후보까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YS가 이 대표를 당대표로 선출한 것은 YS의 큰 패착 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 대표를 총선용으로 생각했다”며 “그의 당 대표지명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YS가 이 대표를 선택한 것은 YS가 한보사태이후 여론에 매도되고 당내에서 민주계의 입지가 약화되고 민정계의 압력에 밀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YS를 떠받치고 있던 민주계의 좌장 최형우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YS의 당내 버팀목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6룡이 나르샤”
당 대표에 선임된 이 대표는 대권을 향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1997년 3월 초까지만 해도 신한국당은 누가 나서도 DJ는 이길 수 있다고 평가했다. 국민들은 여전히 DJ를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대권의 꿈을 품은 사람들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7월 21로 예정된 대통령 후보 선출을 4개월여 앞두고 이홍구, 이인제, 김덕룡, 김윤환, 이한동, 이수성, 박찬종, 최병렬, 그리고 이회창 등 9룡의 후보가 난립했다. 대선경쟁이 본격화 되면서 이홍구, 김윤환, 박찬종 후보가 중도포기를 하고 6룡(이회창, 이인제, 이수성, 김덕룡, 이한동, 최병렬)이 최종 경선에 참여했다. YS는 대통령 예비 후보 경선주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공정한 경선’을 통한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 선출을 당부했다.
7월 1일 신한국당은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해 후보등록을 시작으로 7월 21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후보경선 전을 연출했다. 선거는 민정계가 지지하는 이회창 후보와 민주계가 지지하는 “젊은 피” 이인제 후보가 격돌하면서 “정치의 재미”를 국민에게 보여주었고 국민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신한국당의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은 대대적인 흥행몰이로 대박을 쳤다. 최종 경선투표에서 이회창 후보가 1위를 지켰고 이인제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며 2위에 올랐다. 1차 투표에서 아무도 과반수이상의 득표를 얻지 못해 2차 결선투표 끝에 이회창 후보가 60%의 지지로 신한국당의 제15대 대통령선거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인제 후보는 40%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다.
민주계는 이회창 후보가 선출되는 것은 “TK (대구·경북)를 중심으로 한 ‘도로 민정당’ 부활”로 여겼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흐름을 막는 차원에서 당내에 ‘정발협(정치발전협의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수성 전 총리를 지지하기도 하고, 이회창 후보와 맞붙은 네 후보들(이인제·이한동·이수성·김덕룡)이 결선투표에서 자신들의 표를 2위 후보에게 몰아주기로 결의까지 했지만 역부족 이었다”고 YS 차남은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민주계의 집단행동은 경선 내내 ‘김심(金心)논란’과 함께 ‘이인제 지원설’을 낳았다. YS는 ‘경선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김심은 없다”고 선언하고 “정발협의 즉각 해체를 지시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힘을 잃고 있었다. 이회창 후보는 김심의 작용에 의심을 품었고, 그의 그런 의심은 시간이 가면서 눈덩이처럼 커졌고 여권분열을 일으켜 결국 그를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자멸의 길로 이끌었다.
신한국당 경선효과로 1997년 7월경까지만 해도 이회창 후보는 대선후보로서 50%대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DJ를 압도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회창 후보는 여권을 대표하는 눈부시게 떠오르는 해가 되었고 YS의 지는 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YS는 떠오르는 해를 막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여야가 그렇게 대권몰이에 빠져 있는 동안 나라경제는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보사태이후 유수한 대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졌고 모두의 우려대로 마침내 우리경제에 치명적 한방을 날리는 초 대형사건이 터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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