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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되어야 소통하는 군주다.(#3) - 남의 말을 듣고 천하를 제패한 조조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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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09월22일 17시0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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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통(疏通)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듣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명령이고 지시이고 하달이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교화되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소통은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듣고 고침(聞改)’이다. 소통은 매우 어렵다. 첫째, 높은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둘째,  낮은 사람들이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육단여친(肉袒輿櫬), 즉 죽음을 각오하는 의미로 웃옷을 벗고 관과 상여를 끌고서 곧은 말을 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셋째,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말이 통하는 길, 즉 언로(言路)가 대부분 막혀있다. 결국 소통은 듣는 자와 말하는 자와 길(언로)의 삼박자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듣는 사람이다.  

역사상 보기 드문 몇 가지 소통의 사례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수록된 중국 역사에서  간추려 시리즈로 엮어본다. 

 

 

(1) 순욱(荀彧)의 충고를 받아들인 조조 (AD 195년)

 

조조는 AD155년생이다. 조조가 태어난 시기 후한이란 나라는 혼란 그 자체였다. 

첫째로 후한 순제의 부인 양황후과 동생 양기가 황제인 어린 질제를 죽이고(AD146년) 꼭두각시 환제를 세워 전권을 장악한 뒤 충신 이고, 두교, 오우를 모조리 죽이고(AD 147년) 폭정에 폭정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양황후가 죽자(AD150년) 동생 독재자 양기는 환제와 환관 5인방, 즉서황,구원,당형,선초 및 좌관의 쿠테타에 의해 축출될 때(AD159년)까지 10년 동안 폭정과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를 일삼아오던 시기였다. 

둘째로 양기를 몰아낸 환관 5인방의 쿠테타 이후 들어선 것은 양기 때 못지않은 전횡과 난맥상이었다. 쿠테타 주역이었던 서황 등의 오후(오후) 외에도 후람이나 유보나 조충과 같은 환관들이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하며 요직과 황실군대를 장악했다. 조등도 당시 실력 있는 환관이었는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그에게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다. 후손이 있을 수가 없는 환관들은 평상인을 양자로들여서 서로 상부상조하며 권력과 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셋째로, 환관의 발호를 맹렬히 비난했던 사대부들이 두 차례 큰 환란(1차 및 2차 당고의 화, AD166년과 AD169년)을 겪던 시대였다. 무능한 황제를 등에 업고서 독재와 만행을 저지르는 환관들에 대해 유림들은 맹렬한 비판을 가해왔는데 이들에 대한 환관의 대대적인 반격이 두 번에 걸친 유림 숙청으로 나타난 것이다. 

넷째로,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한수(AD184년),장수의 미적(AD184년) 장각 삼형제의 황건적(AD184년) 저비연의 흑산적(AD185년) 등이 전국 곳곳에서 환관이 주도하는 후한 조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후한 조정은 AD175년 20세이던 조조를 효렴(효도가 뛰어난 인재)으로 등용하였으나 주변의 모함을 받게 되자 병을 핑계로 들어앉아 조용히 20년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황건적의 난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자 AD188년 전군교위로 나섰고 동탁의 난(AD190년) 때 의병을 일으켰고 AD192년 황건적을 격파했다.

 

다섯째로, 전국에 수 없는 군웅들이 할거했다. 북쪽에는 원소, 동쪽에는 진궁과 유비와 여포, 남동쪽에는 원술, 남서쪽에는 유표, 북서쪽에는 마등과 한수가 중부 산동성 한 귀퉁이(兗州)를 장악하고 있는 조조를 에워싸고 있었다.  AD 195년 당시 조조는 지금의 하남성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수 많은 군웅 중 한 명에 불과했고 바로 일 년 전에는 여포에게 사로잡힐 뻔했을 만큼 조조의 지위는 위태로웠다. 그런 그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수도 없는 강적들을 다 물리쳐야만 했다. 누구부터 먼저 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천하제패를 성공시키거나 실패시키는 가장 핵심과제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남동쪽에 있는 원술을 먼저 공략한 뒤 여포를 공격하고 싶었다. 아마도 작년에 여포에게 잡힐 뻔 한 것이 겁을 먹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욱(荀彧)이 말렸다.

“ 옛날 고조 유방은 먼저 관중을 지켰고 광무제는 먼저 하내를 굳건하게 점거한 뒤에 그 뿌리를 바탕으로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장군에게 산동성 귀퉁이(연주)는 천하의 요충지이니 장군에게 유방의 관중이고 광무제의 하내입니다. 동쪽의 여포무리를 먼저 습격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남동쪽으로 돌려 원술을 제어하십시오. 만약 먼저 원술을 치게 되면 반드시 여포가 후미를 공격할 것이어서 근본인 연주를 뺏기게 됩니다. 무릇 일에는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얻는 일이 있게 마련이고,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어야 하며, 위태로움을 버리고 안전함을 택해야 하는 법입니다. 권력의 형세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근본이 튼튼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夫事固有弃此取彼者,以大易小可也,以安易危可也,权一时之势,不患本之不固可也)이 세 가지 점을 깊이 유념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조조는 서주공격계획을 포기하고 순욱의 말대로 여포를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4년 뒤 년 여포는 죽고(AD198년) 조조는 그 다음해에 원술을 멸망시킨다(AD199년).

 

 

(2) 순욱의 말을 듣고 유표공격계획을 취소하고(AD201년) 원소공격에 주력하다.

 

관도의 전투(AD200년)에서 원소의 군사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아직 원소는 살아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조는 서둘러 남쪽의 유표를 공격하려했다 순욱이 또 나서서 말렸다. “원소가 크게 패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그에게서 떠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기회를 살려서 끝장을 보셔야지 어떻게 멀리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려고 하십니까. 만약 원소가 잔당의 군사를 몰고 우리의 배후를 습격한다면 장군의 거사는 끝장나고 마는 것 아닙니까?” 조조가 깜짝 놀라서 계획을 취소하고 원소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로 생각을 바꿨다. 원소는 결국 다음해(AD202년)에 피를 토하며 죽고 두 아들의 내분에 휩싸인 원소의 세력을 결국 조조에게 흡수되고 만다.(AD2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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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적의 신하 신비(辛毘)의 충언을 받아들인 조조(AD203년)

 

원소의 두 아들 원담과 원상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원상이 원담을 공격하자 원담은 신하 신비를 조조에게 보냈다. 유표는 원상과 원담에게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두 사람의 원한이 워낙 깊은지라 말이 먹히지 않았다. 순유는 두 형제가 다툴 때가 공격의 적시라고 재촉했다. 이럴 때 마침 신비가 도착한 것이다. 조조는 신비에게 원담을 믿을 수가 있는지, 원상을 반드시 이길 수 있는지 물었다. 신비가 대답했다.

“ 공께서는 믿을 수 있는지 이길 수가 있는지를 먼저 묻지 마시고 현재 군사의 형세를 먼저 물으셨어야 합니다. 형제가 서로 다투기를 몇 년 동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쪽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다른 쪽의 힘이 고갈되어서입니다. 전쟁물자도 고갈되고 모사들도 다 주살되었으며 천지가 재변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늘이 원상을 공에게 주었는데도 공께서는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엉뚱한 남쪽의 형주를 공략하시고자 하는데 형주는 풍요롭고 나라안에 아무런 틈새도 없어서 공략하기 쉽지 않습니다. 황하 북쪽을 먼저 공격하시면 천하가 진동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조조가 계획을 수정하고 신비의 말을 좇아 원상을 공격하기로 했다. 패배한 원상은 조조에게 항복을 요청했으나 거부하자 흉노족에게로 도망갔다가 결국죽음을 맞았다. 

 

 

(4) 순욱의 자결(AD212년)

 

조조가 천하를 거의 제패하게 되자 아부하는 신하들이 조조에게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꼬드겼다. 동소같은 사람은 신하로써 천하에 조조와 같은 위대한 공을 이룬 사람이 따로 없었고 이런 공을 세우고서도 신하로 머물렀던 적도 없으므로 더 높은 지위를 만들어서라도 오르셔야 한다고 부추겼다. 마침내 열후와 제장들이 숙의한 끝에 조조에게 국공(國公)의 작위에 오르게 하고 특별한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아홉가지 선물, 즉 구석(九錫)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순욱이 반대하고 나섰다.“ 조공께서 의병을 일으키셔서 조정을 바로잡으시고 나라의 안녕을 지키신 것은 충성스럽고 곧은 정성으로 하신 것 아니십니까. 물러나고 양보할 때를 지키십시오.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이와 같아야 하므로 이렇게 국공이나 구석을 받으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조조가 기쁠 수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권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하면서 순욱을 불러 옆에서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순욱은 견딜 수가 없었다.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서 약을 먹고 죽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순욱을 극찬했다. “관중은 옛 주인 자규를 위해 죽지 않았으나 순욱은 조조를 도왔으나 결국은 후한 황실을 위해 죽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조조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왕조의 부활을 위해 헌신한 순욱을 사마광은 관중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어쨌거나 순욱이 없었다면 조조도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5) 도망한 군사의 처자식과 형제•친족 연좌제 확대문제

 

군사가 탈영하여 도망치면 처자식을 연루시켜 고문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럼에도 탈영군사가 줄지 않자 조조는 형벌을 더 무겁게 하려고 처 및 가족은 물론 부모와 형제를 포함시킬 생각이었다. 법무를 담당하는 이조연 고유가 반대하고 나섰다.

“ 사졸이 도망가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만 개중에는 후회하는 자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처자식을 용서하여 일단 그들을 시켜서 탈영병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법령 만으로도 한 번 탈영한 사람은 후회한다고 한 들 마음을 돌리기 어려운데 형벌을 더욱 무겁게 한다면 겁을 먹은 병사들이 더 많이 도망을 가게 될 것이고 결국은 군대 자체가 궤멸되고 말 것 아니겠습니까. 무거운 형벌을 탈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늘이게 된다는 점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조조가 훌륭하다고 칭찬하고서 연좌제를 강화하려던 생각을 접었다.(AD214년)   

 

(6) 두습(杜襲)의 충간을 받아들인 조조

 

AD219년은 유비에게는 최고의 한 해였고 조조에게는 최악의 한 해였다. 그렇게 소중한 한중지역을 조운(조자룡)의 신도위담(身都爲膽,몸 전체가 담력으로 되어있다는 유비의 칭찬)의 수훈에 힘입어 유비가 조조에게로부터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3년 전부터 위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조조에 대응하여 유비는 한중왕이라는 명칭을 쓰면서 아들 유선을 왕세자로 책봉하기까지 했다. 큰 땅을 잃어 상심하고 있던 차에 관중(서안을 중심으로 하는 광대한 분지)지역의 부하장수 허유가 말을 듣지 않고 뻣뻣하게 대들자 화가 난 조조가 무엇보다도 먼저 허유를 쳐부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휘하 여러 장수들이 나서서 반대했다.“먼저 그를 회유하셔서 공동으로 적 유비를 토벌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조조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관중지역을 통괄하는 두습이 조조에게 말렸다.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조조가 칼을 꺼내 만지면서 소리쳤다. “계획은 정해졌으니 다시 말을 꺼내지 마시오.” 두습도 물러서지 않았다.“전하의 계획이 옳다면 그것을 따라 일을 이룰 것이지만 전하의 계획이 틀렸다면 그것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저희들의 사명입니다. 전하가 신을 마주하고서도 말하지 말라니 어찌 신하를 대하는 것이 그렇게 옹졸하실 수가 있습니까?” 조조가 분을 참지 못하며 내뱉었다. “허유의 교만함을 내가 어찌 내버려두겠는가?” 두습이 물었다. “허유가 어떤 인물입니까?” 조조가 답했다.“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놈 아니냐.” 두습이 말했다. “오직 현인만이 현인을 알아보고 오직 성인만이 성인을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악한 이리 허유가 길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여우와 너구리같은 유비가 서두르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여우같은 유비를 두고 허유를 먼저 공격하신다면 사람들은 강한 적을 두고 약한 적을 쳤다할 것 아닙니까. 나아가신다 하더라도 용기라고 아니 할 것이며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인자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근짜리 화살은 생쥐를 잡으려고 발사하는 것이 아니며 만석짜리 종은 풀포기 따위로 친다고 소리 나지 않는 법입니다.(臣闻千钧之弩 不为鼷鼠发机 万石之钟 不以莛撞起音)。보잘 것 없기 짝이 없는 허유를 치기위해 귀신같은 전하가 수고로워서야 되겠습니까?” 조조가 탄복하며 말했다. “훌륭하오.” 결국 허유는 귀순하고 항복했다.(AD2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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