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 6.25 전쟁 되새기는 계기 되어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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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강원도 철원 지역 비무장지대(DMZ) 철책선의 통문 앞에 있는 군부대에는 “선배님들의 숭고한 희생, 우리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반드시 모시겠습니다” 등의 문구가 적힌 대형 현수막들이 걸렸다. 공병, 폭발물처리반(EOD), 의무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등의 인원과 각종 장비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정전협정 준수를 확인하기 위한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소속 군인들도 배치되었다. 여기가 바로 6·25 전쟁 중 격전지로 유명했던 ‘화살머리고지’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지금은 남방한계선 북쪽 DMZ 내에 위치하고 있고 오른편 3km 지점에는 역시 격전지로 유명한 백마고지가 있다.
지난 9월 19일 제5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은 이곳에서 시범적 공동 유해발굴 사업을 벌이기로 합의했었고, 이에 따라 한국군이 유해발굴에 필요한 출입로 및 수색로를 확보하기 위한 지뢰제거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연말까지 화살머리고지의 초입에서 군사분계선(MDL)까지 1.7km 구간에 도로가 개설되고 북한 측에서도 상응하는 작업을 완료하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유해발굴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박재권 이등중사
그렇게 하여 작업이 시작된 지 24일 만인 10월 24일 처음으로 2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수십 개의 총탄구멍이 난 수통, 대검 등과 함께 인식표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인식표에는 ‘8810594 PAK JE KWON 육군’이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인식표의 주인은 6.25 전쟁 당시 국군 2사단 31연대 7중대 소속의 박재권 이등중사였다. 그렇게 하여 이 중사는 차디찬 땅속에 65년 동안 묻혀 있다가 이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10월 25일 문재인 대통령도 자신의 SNS를 통해 “이제야 그의 머리맡에 소주 한잔이라도 올릴 수 있게 되었다”면서 “다시는 이 땅에 전사자가 생기는 일도, 65년이 지나서야 유해를 찾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남북 사이에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6·25 전쟁을 경험한 노병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이라면 여기에서 숨져간 수많은 한국군, 유엔군, 북한군, 중국군 등의 유해들이 묻혀 있을 이곳이 다시 파헤쳐지는 것을 보면서 포연이 자욱했던 그날들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기지 않을까? 오늘날 6·25 전쟁이 학생들의 역사 교과서에서, 그리고 젊은 세대들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탄식하지 않을까? 노병들의 뇌리에는 6·25 전쟁의 역사가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살아있을 것이다.
노병들이 기억하는 ‘푹풍’ 작전
북한군에게 전면남침 개시를 알리는 ‘폭풍’작전 명령이 하달된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였다. 준비를 완료하고 명령만을 기다리던 북한군의 제1, 2, 3, 4, 5, 6, 12사단과 제105, 107, 109, 203 전차여단 등이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철〮원, 강릉 등 다섯 개 방면의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38선을 돌파했고, 제5 전차연대는 3일 만인 6월 28일 수유리를 통해 서울로 진격했다. 그 때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까지 장장 1,129일 동안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든 6·25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도발 이후 휴전협상을 먼저 제안한 쪽도 북한이었다. 북한은 기습 남침을 통해 한달 만에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38선 너머로 패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북한이 휴전협상을 제안 한 것이다.
물론, 이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38선 돌파를 지연시키면서 중국군의 지원 참전을 기다리는 시간벌기 전술이었기 때문에 맥아더 사령관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다.
이후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다시 뒤바뀐 1951년 3월에는 맥아더 장군이 중국군의 펑더화이 사령관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했지만,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중국군은 이를 거부하고 4∼5월 동안 춘계 대공세를 감행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공세가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저지되면서 전선은 교착되었고 중부 전선에서는 밀고 밀리는 백병전이 이어졌다.
이 상태에서 1951년 여름에 양측 간 휴전협상은 시작되었는데, 양측 대표들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최초의 협상을 가졌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정전협정 이전에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총력전이 펼쳐진 것이며,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가 위치한 중부 철원평야 지역은 총력전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백마고지는 한국군과 중국군이 혈투를 벌인 곳이다. 1952년 10월 당시 백마고지는 한국군 제9사단 30연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 고지를 뺏기 위해 중국군이 10월 6일 새벽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면서 10일 간의 혈투가 벌어졌다.
10월 15일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인해전술을 거듭했지만 한국군 역시 미 포병부대와 미 공군의 필사적인 지원을 받으며 맞섰다.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뀌었고,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3,400여 명, 그리고 중국군은 14,0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2만 발 그리고 중국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쏟아 부음으로써 백마고지 전투는 6.25 전쟁 중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포탄이 소비된 전투로 기록되었다.
노병들이 기억하는 화살머리 고지의 혈전
화살머리고지 역시 백마고지와 함께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요충지로서 북한군이 6·25 전쟁을 도발했을 때에도 주요 남침로였지만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뺏고 뺏기는 공방전이 거듭된 대표적인 격전장이었다. 화살머리고지에서는 1951년 11월부터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까지 한국군 2사단, 미군 2사단, 프랑스 대대 등이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한 무수한 전투가 벌어졌고, 특히 두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첫 번째 큰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0일까지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제113사단을 맞아 싸운 전투였다. 프랑스 대대는 전사 47명 부상 144명이라는 손실을 입으면서 고지를 사수했다. 한 때 방어선이 뚫리기도 했지만 긴급 투입된 한국군과 미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섬으로써 5일간의 격전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도 중국군은 5천여 명의 전사자와 7천여 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 보듯 하는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당시 프랑스 대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장 르우(Jean Le Houx) 병장도 있었다. 르우 씨는 19세이던 1951년 12월 참전하여 지평리 전투, 화살머리 고지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1956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훈했다. 그는 2016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직전 함께 싸우다 산화한 동료들이 잠든 한국의 전적지에서 영면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은 프랑스 참전용사협회와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 전달되었고, 2017년 11월 그의 유해는 한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화살머리고지 부근의 민통선 지역에 안장되었다. 가슴을 저미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큰 전투는 휴전을 코앞에 둔 1953년 6월과 7월에 벌어졌다. 철원평야에서 한국군 제2사단과 대치하던 중국군 제23군은 6월 12일에 제29사단을 백마고지에 투입하고 6월 26일에는 73사단을 화살머리 고지에 투입하여 두 고지를 동시에 점령하고자 했고, 수적인 열세로 고전하던 한국군은 7월 9일 화살머리 고지를 중국군에 넘겨주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군 2사단은 역습 작전을 통해 7월 11일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중국군은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퇴각했다. 박재권 이등중사는 안타깝게도 정전을 보름 앞둔 7월 10일 전사했다.
전쟁역사 외면하는 한국의 역사교과서
그렇다. 화살머리고지에는 수많은 젊은 죽음들이 묻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왜 여기에서 그토록 많은 젊은 생명들이 죽어 갔고 왜 그들이 어떻게 전사한 것인지 확인조차 되지 않는 무명용사가 되어 65년의 세월을 차디찬 땅속에 묻혀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책을 만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들일까? 국립현충원에 계급과 이름 다섯 글자만 남긴 채 종적을 감춘 한국군 전사자 및 실종자들의 대부분이 이런 격전지에서 황망한 죽음을 맞아 묻혔거나 북한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들은 이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며, 그래서 그런지 젊은 세대들은 할아버지들이 겪은 6·25 전쟁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남과 북이 격전지에서 유해 발굴 사업을 벌이는 것은 남북 상생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것을 떠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군과 유엔군의 유해들은 하루라도 속히 정중하게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모셔져야 하며,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옷깃을 여미고 6·25 역사를 되새겨야 한다. 그것이 국가와 구민의 의무이며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렇게 해야 한다. 중국군과 북한군의 유해도 정중한 예우 속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자(死者)는 더 이상 적군이 아니다.
하지만, 유해발굴을 통해 남북의 정치인들이 만나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축하행사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지명도를 높이겠노라며 추모행사에 재빠르게 얼굴이나 내밀고 사라지는 정치인들이 있어서도 곤란하다. 그보다는 이번 유해발굴이 후세들에게 박재권 이등중사와 같은 젊은이들이 화살머리고지에서 죽어야 했는지를 가르치고 생존한 참전용사들을 위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누가 왜 6·25 전쟁을 도발했는지, 왜 63개 나라가 한국을 지켜주기 위해 유엔의 이름으로 지원을 했는지, 왜 16개국이 195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왜 4만여 명의 미군이 전사했는지 등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2000여 년 전의 마사다 전투를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이 60여 년 전에 겪은 6·25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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