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무역 시대의 통상정책 방향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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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공정무역 움직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18년 6월 8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전통적으로 이 자리에서는 세계경제의 운영과 질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미국과 여타 국가들 간에 유달리 불협화음이 크게 들렸다. 미국이 주장하는 공정무역에 대해 다른 나라들이 동의 하지 않았고 자유무역을 훼손하는 미국의 조치에 집단으로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매년 채택되던 공동성명조차 무산되고 말았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free & fair trade)는 2차대전 이후 GATT 체제 하에서 줄곧 지향하던 이념이었다. WTO 시대에는 보다 더 자유롭고 보다 더 공정한 무역(freer & fairer trade)가 캐치프레이즈다. 문제는 근래에 새로 등장한 공정무역은 국제규범에 기반한 rule based fair trade가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력+정치군사력의 힘을 바탕으로 한 power based fair trade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공정무역을 주창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때로 동맹과 통상도 빅딜의 대상이 되는 시대임을 직감할 수 있다. 강자가 힘(power)을 앞세워 선택할 수 있는 옵션 폭, 즉 협상의 지렛대(leverage)를 넓혀 판을 키운 후 최대 성과를 거두는 전략을 구사하는 식이다.
한미 FTA 재협상 과정에서 보면, 시간이 지나며 상호 이익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사실이 목격된다. 힘에 바탕을 두고 기존의 이익은 굳힌 채, 계속 손에 잡히는 국익을 확보하려는 현실주의적 접근인 것이다. 2015년에 미국은 對韓교역에서 283억 달러 적자를 시현했다(revealed). 그러나 만일 한미 FTA가 없었다면 그 규모가 44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는(estimated) 분석 결과가 이미 나왔었다. 우리나라 보고서가 아니라 미국 무역위원회(USITC) 보고서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한미FTA가 불공정 협정이라고 강변해 왔다.
WTO 중심의 다자질서를 보는 미국 행정부의 시각에 대한 파악도 필요하다. (1국 1표제로 운영되는) WTO는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앞길을 막는 것을 허용하는 존재라고 미국은 일관되게 인식해 왔다. 2017년 3월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발표한 ‘대통령 통상정책 의제’에서 제시한 4가지 최우선 정책과제 중 첫째는 미국의 주권을 통상보다 우선시한다는 것이었다. WTO 중심의 다자통상체제가 미국의 국익과 상충되면, 미국의 통상이익을 더 우선으로 삼겠다는 의미다. 현재 국제통상질서나 기존의 틀을 인정하지 않고 판 자체를 흔들어보겠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대EU 철강 분쟁)와 오바마 행정부(대중국 타이어 및 승용차 분쟁)에서도 교역상대국과 무역 분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WTO 기준과 절차를 완전 무시하지는 않는 범위 내에서 점진적이고도 우회적으로 접근했다. 상대적으로 모범생 접근방식이었던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무역 분쟁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데다, WTO 규범에 아랑곳하지 않는 노골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적어도 국제무역질서에 관한 한 문제아가 아닐 수 잆다.
그러나 모범생이건 문제아건 간에 미국에 불리하게 설계되었다고 여기는 WTO 체제에 대한 미국의 일탈은 오래되고 일관된 꿈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WTO 패널 정원의 충원을 거부했고, WTO 상소기구 판정을 무력화시키곤 했으며, 미국 통상법을 일방주의적으로 집행하는 한편, 심지어 자국의 반독점법을 역외에 적용하는 등 갖가지 조치를 주저없이 취하거나 앞장섰다. WTO건 FTA건 간에 절대치로 불공평한 관세양허율을 불인정하고 새로운 개념의 상호성(reciprocity) rosuadp 입각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새롭게 평평한 운동장으로 조성하려는 시도가 앞으로 계속 진행될 것이다.
이제 트럼프 행정부가 대응 수위를 높여놨으니, 앞으로 다자체제로 회귀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 커질 전망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Trumpism’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순히 불확실성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아니고, Trump 시대 이후에 사라질 일시적 현상도 아니라는 문제의식에서다. 이른바 Trumpism은 새로운 질서 형성을 모색하는 카오스 정도로 인식하는 게 타당하다. 따라서 너무 지나친 다자질서에 대한 기대는 당분간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다자 체제 하에서의 매크로 공정무역이 아니라 양자 간의 마이크로 공정무역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협상의 지렛대, 즉 Leverage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2.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가?
자유무역 대신 공정무역이 강조되는 통상질서의 격랑 속에서 한국이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의 문제를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한국은 개발연대 이래 자유무역의 최대수혜자로 무역자유화 추구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제 자유무역의 모멘텀이 후퇴하고 힘을 바탕으로 하는 공정무역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상대국 입장을 파악해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국이 무역불균형 시정 및 무역균형을 추구하고자 하는 속내는 교역상대국과의 단순한 적자 축소가 아니라 장∙단기의 정책 목표가 상이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법률서비스 같은 고급 일자리가 아니고, 국내적으로 극심해진 소득 양극화를 해소할 방책으로서의 일반 일자리의 창출이 주목적이다. 바로 이점에서 한미 FTA의 체결 당시와 재협상 시에 정책 우선순위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지식재산권 보호와 서비스 시장 확대가 주목적이 될 수도 잇다. 통상정책의 대응도 여기에 맞추어야 바람직하다.
교역환경이이 바뀐 만큼 ‘돌격 앞으로 식’의 시장진출과 무역진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우회 전략이나 주고받기식의 딜 메이킹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무역진흥을 단순히 시장진출이라는 좁은 개념으로 접근하지 말고 교역상대국과의 다각적인 상생 전략으로 전환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역수지 관리 및 교역상대국 관리 차원에서 전략적 시장 진출 및 수입 정책을 구사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교역상대국들이 국별/업종별 무역수지 수준 및 추이를 통상정책의 레버리지로 삼고 있으므로 교역의 확대 추구뿐 아니라 무역균형 전략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좋다. 쌍방 교역의 관점에서 (업종별로, 일자리 창출 여부로) 무역적자를 다루는 추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교역을 통한 지속발전 프로그램을 가동하되, 교역상대국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진출 및 상생 전략을 마련해 봄직하다. 만성적/대규모 무역불균형국가, 우리 수출이 급속히 증가하는 국가, 우리나라가 10대 교역상대국의 하나인 국가, FTA 체결국가, ODA 중점지원국가, 정상교류가 이루어진 국가 등에 대해서는 미시적인 통상 관리가 요구된다.
공정무역이 강조되는 시기에는 사안별 협상 논리만으로는 부족하고, 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필요하다. 단일 사안을 갖고 협상하기보다 상대방이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들을 일괄적으로 거래하는 딜 메이커로서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다. 통상과 외교(국방)을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하여 공정무역 시대의 전략을 모색해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역, 통상, 외교, 국방, ODA/KSP 등 파편화된 다양한 기능들을 연계하여 leverage를 확보하는 역량을 확충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미 무기 구입의 무역수지 및 일자리 창출 효과를 앞세우는 것과 같은 다양한 leverage points를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도 유효하리라고 본다. 통상 HS Code 93(무기류)은 무역수지 산출에서 배제되어 있지만, 이를 전략적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교역상재국 간 무역 균형 및 교역에 따른 일자리 창출 효과에 대한 이해 증진, 무기 구입에 따른 가격 협상 및 적절한 기술이전, 절충교역 등 부대조건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leverage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상 정책이 외교∙국방 정책과 불가분하고, 국제정세 움직임과도 밀접해지고 있다는 시대다. 그렇다면 전략적∙포괄적 통상연구 기능 확충을 위한 실용적 Brain Trust를 확보하는 일도 절실한 고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적 두뇌(필요조건)와 전략적 연계(충분조건)가 결합된 연구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KIEP 등 통상관련 연구기관이 존재하지만 실용적∙포괄적 접근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국제무역연구원도 무역이슈 위주로만 접근하고 있다. 사실상 통상전략을 외교∙국방 등 여타 현안과 연계하는 역량이 부존재한 게 현실이다. 단순 무역 이슈뿐 아니라 국가적 이슈도 함께 개발하는 방안의 검토가 시급한데, 통상외교를 뒷받침하는 전략적 자산을 확보하는 기구로서의 역할 수행이 그만큼 절실해지고 있다. 외교∙안보∙국방 관련 기관들과의 협업을 통해 통상이슈뿐 아니라 경제, 외교, 안보 및 국방 이슈 등 다양한 제안들을 연계하여 ‘국가마케팅’ 전략을 모듈화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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