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4 북량(F)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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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30] 후진 요흥의 무리한 남량 독발녹단 공략(AD408)
요흥은 안팎으로 어려운 독발녹단의 남량을 흡수할 생각을 품고서 상서령 위종(韋宗)을 무위에 보내 염탐을 시켰다. 무위에서 독발녹단과 오랫동안 예기를 나누었던 위종이 나오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 기이한 영재와 영특한 인물이
화하(華夏,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밝은 지혜와 명석한 지식이
반드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구주(구주) 바깥과 오경 밖에도
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발녹단의 재주에 놀란 위종이 돌아와 요흥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보고했다.
“ 남량왕국이 비록 피폐하긴 했어도 아직 도모할 수 없겠습니다.”
요흥이 이렇게 되물었다.
“ 아니 유발발은 그 까마귀 떼 같은 무리들로도
독발녹단을 궁지에 몰수 있었는데
나와 같은 천하 대군을 가진 사람이 그를 처단하지 못한단 말인가?“
위종이 말했다.
“ 형세가 변하고 뒤집어지는 경우는
천만가지가 넘습니다.
남을 깔보는 자는 반드시 패하고
남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에게 패한 것은
그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독발녹단이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군의 천만대군을 가지고도 이기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요흥은 위종의 충간을 듣지 않았다. 아들 요필과 염성 걸복건귀 등의 장수와 함께 3만 군사를 보내 독발녹단을 공격하고 동시에 좌복야 제난을 시켜 2만 기병으로 유발발을 공격했다.
이부상서 윤소가 요흥을 막아섰다.
“ 차라리 북량의 저거몽손과 서량의 이고에게 명하여 남량의 배후를 공격함만 못합니다.”
요흥은 이 또한 듣지 않고 독발녹단에게 기만하는 편지를 썼다.
“ 제난을 보내 유발발을 토벌시켰다.
유발발이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요필에게 군사를 붙여서 하서회랑(난주-무위-장액-주천을 잇는 길)
그쪽으로 보내니 그대는 그렇게 알아라.“
독발녹단은 요흥의 편지를 곧이곧대로 믿고서 대비하지 않았다. 요필의 부하 강기가 군사 5천을 요구하면서 급습하자고 건의했지만 요필은 듣지 않고 정상 속도로 무위로 다가갔다. 요필의 군대가 무위로 들이닥치자 독발녹단은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전투가 지루하게 계속되자 무위 성안에서 내부반란의 기미가 있었으나 독발녹단은 반란무리 5천명을 전원 매몰시켜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독발녹단은 성안에 있는 양과 소를 모두 성 밖으로 풀어 내 보냈다. 후진 장군 염성이 병사를 풀어 양소무리를 잡게 했는데 이 틈을 타고 독발녹단의 군사들이 뒤를 공격하여 요필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7천명의 후진 병사의 목이 이 때 달아났다. 요흥은 요현에게 2만 기병을 붙여서 패전한 요필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나 요현 또한 독발녹단에게 패했다. 요현은 패전의 책임을 염성에게 묻고 독발녹단에게 사과하고 철군했다. 독발녹단 또한 사자를 종주국 후진에 보내 사죄했다. 후진과 남량이 다시 화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 AD409년에 독발녹단은 독립을 선언한다.
[31] 독발녹단의 저거몽손 공격 실패(AD410)
후진과의 연대를 끊어버린 남량의 독발녹단은 끊임없이 서쪽의 북량지역을 넘보면서 침략을 그치지 않았다. 북량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번 남량이 치고 들어오면 반드시 북량도 반격으로 보복했다.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던 AD410년 3월 독발녹단은 스스로 5만 기병을 거느리고 저거몽손을 쳤는데 궁천에서 대패하여 단기로 도망나오는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저거몽손이 승기를 타고 진군하여 남량의 수도 고장(무위)를 포위했다. 멸절될 것이 두려웠던 고장 주민 1만여호는 저거몽손에게 항복했다. 독발녹단은 측근 경귀와 그 아들 경타를 보내 인질로 삼게 하고 화친을 요청했다. 저거몽손이 화친을 수락하고 8천 호를 데리고 돌아왔다. 독발녹단의 부하 절굴기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수도를 다시 고장(무위)에서 낙도로 옮겼다. 독발녹단의 군대들은 이 때 대부분 저거몽손에게 항복하였다.
[32] 북량의 남량공격 (AD411)
독발녹단은 북량공격 실패로 세력이 크게 약화된 반면 저거몽손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남량의 장군 초랑이 고장을 수비하고 있었으나 저거몽손이 뽑아버렸다. 초랑을 풀어 준 뒤 동생 저거나에게 진주자사로 삼아서 고장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몰아서 남량의 수도 낙도를 포위했다. 30여 일 동안 함락을 시키지 못했는데 독발녹단이 아들 독발안주를 인질로 보내자 저거몽손은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여러 차례 저거몽손에게 치욕을 당한 독발녹단이 다시 저거몽손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호군 맹개가 나서서 극력 반대했다.
“ 저거몽손이 새로이 고장을 병합하고
형세가 강성하니 지금은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독발녹단은 맹개의 충고를 듣지 않고 다섯 길로 나누어 출병했다. 독발녹단은 저거몽손의 변방지역을 공격하여 5천여 호를 약탈하는데 성공했다. 장군 굴우가 이번 승리로 만족하고 군사를 돌리자고 권했으나 독발녹단은 듣지 않고 진군을 강행했다. 마침 날이 어둡고 안개가 끼면서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길을 잃은 독발녹단 군대는 저거몽손의 기습군을 만나 참패하였다. 독발녹단은 다시 낙도로 돌아갔지만 저거몽손의 군대가 낙도를 포위하자 다시 아들 독발염간을 인질로 보내 화친을 간청하였다. 저거몽손은 다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33] 저거몽손의 서량 이고 공격 실패(AD412)
남쪽 독발녹단을 누르는데 성공한 저거몽손은 서쪽의 서량을 겨누었다. 경무장병을 거느리고 친히 서쪽 주천을 공격해 들어갔다. 서량의 주군 이고가 말했다.
“ 군사에는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법이 있으니
적군의 예봉을 꺾는 일입니다.
저거몽손은 우리와 동맹을 맺은 사이(AD410)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왔으니
우리는 문을 닫고 적군의 예봉이 무디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얼마 후 저거몽손의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려고 할 때 이고는 세자 이흠을 파견하여 기병 7천으로 저거몽손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대 저거몽손의 부장 저거백년이 사로잡혔다.
[34] 서진의 천도와 걸복공부의 반란(AD412)
끊임없이 후진의 변방을 침략하던 서진의 걸복건귀는 천수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뒤 감숙성 장랑현을 빼앗고 또 감숙성 임하마저 뺏은 뒤 수도를 임하로 옮겼다. 걸복심건을 하주자사로 삼아 부한에 진수시키고 걸복공부는 청수지역을 토벌하도록 지시했다. 걸복치반은 감속성 유중에 주둔하도록 했다.
[그림] 서진의 강역(AD412)
유중에 주둔하던 걸복치반이 남량영역인 서쪽 청해성 순화현을 공략하여 장악하였는데 이 때 걸복공부가 주군 걸복건귀와 그 아들 10여 명을 살해하고 대하(감숙성 대하)로 도주하였다.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동생 걸복지달과 걸복목혁간 등을 보내 3천 기병으로 걸복공부를 쫓아가 토벌했다. 도망가던 걸복공부는 걸복지달에게 잡혀 환형에 처해졌다.
후진 신하들은 서진의 혼란을 틈타 걸복치반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지만 후진 주군 요흥은 남의 상사를 틈타 공격하는 것은 도리와 예의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하왕 유발발도 걸복치반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군사중랑장 왕매덕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극구 말리는 바람에
유발발 또한 공격하려는 마음을 거두었다.
이 해에 저거몽손은 수도를 장액에서 고장(무위)으로 옮겼다.(AD412)
반란괴수 걸복공부를 처단한 걸복치반은 난주 동남쪽 위원 방향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농서지역을 방어하던 후진의 태위 색릉 또한 관할지역을 거두어 걸복치반에게 항복해 들어왔다.(AD413)
저거몽손과 독발녹단의 알력은 간간히 지속되었으나 일진일퇴를 반복할 뿐 어느 쪽이든 큰 진전은 없었다. 어느날 저거몽손이 잠을 자는 동안 환관 왕회조가 저거몽손을 죽이려고 했으나 저거몽손의 발을 조금 다칠 뿐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다. 왕회조의 아내 맹씨가 남편을 사로잡아 오므로 목을 베었다.
[35] 독발녹단의 을불공격(AD414)
청해호 서쪽 타계한과 을불 부족들이 남량을 배반하고 나섰다. 호군 맹개가 극력 반대했다.
“ 지금 해마다 기근이 들었습니다.
남쪽에서는 걸복치반이 들이닥치고
북쪽에서는 저거몽손이 위협하고 있어서 백성들이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지금 먼 길을 나서시면 이길지라도
반드시 배후의 걱정이 생길 것입니다.
걸복치반과 더불어 맹약을 맺으신 다음
양식을 유통하도록 하여 여러 부족들에게 안심을 시키신 뒤에
무기를 수선하고 때를 기다려 출병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독발녹단은 맹개의 말을 듣지 않았다. 태자 독발호대를 불러 말했다.
“ 저거몽손은 지금 출병 중이니 별안간 닥칠 수 없을 것이다.
걸복치반이 걱정되는데 그러나 군사의 숫자가 적고 방어하기가 용이하니
네가 낙도를 잘 방어하기만 하면 한 달 안에 내가 돌아 올 것이다.“
마침내 7천 기병을 이끌고 독발녹단은 을불과 타계한 토벌에 나섰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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